< 불순한 자의 의심 - 모든 곳에 계셔서 아무데도 없고, 언제나 계셔서 한 번도 없다?> 1. 신학박사고 목사이면서 네덜란드의 수상이었던 아브라함 카이퍼는 그의 70세 생일이 네덜란드 국경일이 되는 명예를 얻기도 했다. 무려 223권이나 되는 책을 내고 45년이나 신문에 칼럼을 쓴 그를 사람들은 ‘열 개의 머리와 백 개의 손을 가진 자’라고 불렀다. 그의 유명한 말 중에 ‘1제곱인치’(inch²)라는 용어가 있다. 그 내용은 이렇다. "그리스도는 모든 것의 주인이시다. 인간 삶의 영역 중에서 그 분이 '그 곳도 내 꺼야!'라며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는 곳은 아무데도 없다. 단 1제곱인치도 없다!" (참고로 1제곱인치는 면적(넓이) 개념으로서, 가로세로 2.54cm(센티)의 정사각형 면적, 그러니까 2.54X2.54=6.54cm2(제곱센티)다. 건빵 한개 정도의 크기? 라고 이해하면 되겠다.) 그렇게 작은 크기조차 주님의 것이 아닌게 없다니. 2. 너무 능력이 많아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과 너무 무능력한 사람, 또는 불행을 벗어나지 못하며 좌절한 사람이 전혀 다른 의미로 비슷한 말을 하기도 한다. ‘신은 없다!’라고. 안타깝게도 많은 이들이 종종 후자에 속한다. 성경에서 '나는 알파요 오메가요 시작과 끝이라'(계22:13)이라 했고, 창세기에서는 여호와는 하늘과 땅, 공간과 시간을 창조하신 분, 전부를 포괄하신 분(창1:1)이라 했다.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고 모든 시간과 모든 삶이 그의 것이니 당연히 하나여야 할텐데 두 개의 세상, 두 개의 영역으로 구분하기 시작하는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그의 것과 아닌 것,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으로. 심지어 한 걸음 더 나가면 사람에게 믿음과 불신이라는 서늘한 딱지를 붙이기도 한다. 3. 하나님의 창조물인 아담과 카인의 행동을 통해서도 보게 되고 노아의 홍수와 소돔과고모라 심판을 통해서도 보듯 하나님이 직접 창조한 그의 세상에 사는 피조물인데도 버릴 것이 생겼다. 싫어하는 모습, 비기독교적인 삶의 행위들, 신성했던 ‘모두’ 안에서 신성하지않은 ‘부분’이 싹튼다? 어떻게 이런 일이... 단 1제곱인치의 면적도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이 없다고 한 아브라함 카이퍼조차 두 개의 세상으로 나누었다. 두개의 영역과 그 둘을 나누는 경계선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기독교인은] 인생의 지도에서 이웃과 전혀 다르게 선을 긋는 법입니다. 당신이 그은 경계선 라인 왼쪽에 서 있는 사람과 오른쪽에 서 있는 사람의 관점은 겹치지 않습니다. 당신은 이것을 택하든지 저것을 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오류가 있을 수 없는 성경에 대한 믿음이 있는 자는 (...) 그 경계 사이의 선을 봅니다.” (카이퍼 1880년의 취임기념 강연 (Sphere Sovereignty)과 1898년 미국 프린스턴 대학의 초청을 받고 행한 강연의 모음집 (Lectures on Calvinism)에서) 4. 기독교와 비기독교를 경계하는 잣대로 교회는 교리라는 자와 가위를 사용하기도하고 개인은 신앙고백의 수준 혹은 취향으로 그 경계를 긋기도 한다. 위 1제곱인치의 카이퍼는 오류가 없는 말씀에 대한 믿음으로 두 영역을 나누는 경계의 선을 긋는다고 주장했다.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고 각각 다를 수 있는데 문제는 없을까? 그래서 오랜 세월 끝없이 교리 다툼과 심지어 종교 간에는 전쟁이, 개인 간에는 논쟁과 배척이 일어났다. 누군가 모두가 군말 없이 인정하는 공용의 잣대를 보여줄 수 있을까? 가능하기는 할까? 완벽하게 구분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 한다는 전제를 포기하지 않는 한... 문제는 그걸 완벽하게 할 수 있다는 무리들에 의해 난도질을 당하는 사람이 비기독교인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의지가 연약하거나 깊이가 얕은 신앙인들, 또 그저 고분하지 않은 성격을 가진 신앙인들조차 그 난도질에 곧잘 피를 흘리게 된다. 5. 39세라는 젊은 나이에 히틀러를 암살하라는 음모에 연루된 죄목으로 강제수용소에서 종전을 한 달 앞두고 생을 마감한 본회퍼의 옥중 시 ‘나는 누구인가‘에서 본회퍼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누구인가. 그들이 종종 말하기를 나는 간수에게 말을 건낼 때 마치 내게 명령하는 권한이라도 있는 듯 자유롭고, 다정하고, 분명하다고 한다. 나는 누구인가. 그들이 또한 말하기를 나는 불행한 날들을 견디면서 마치 승리에 익숙한 자와 같이 평화롭고, 미소 지으며, 자연스럽다고 한다.“ 주변에서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본회퍼목사를 그렇게 당당하고 믿음에 우뚝 서서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인이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본회퍼는 이어서 자신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정말 다른 이들이 말하는 그런 존재인가. 아니면 다만 나 자신이 알고 있는 자에 지나지 않는가. 새장에 갇힌 새처럼 불안하게 뭔가를 갈망하다 병이 들고 손들이 나의 목을 조르고 있는 듯 숨 가쁘게 몸부림치고 빛깔과 꽃들과 새소리를 갈구하며 부드러운 말과 인간적인 친근함을 그리워하며 사소한 모욕에도 분노로 치를 떠는, 그리고 위대한 사건들을 간절히 고대하고 저 멀리 있는 친구들을 그리워하다 슬퍼하고 기도하고 생각하고 글 쓰는 일에 지치고 텅 빈, 무기력하게 그 모든 것과 이별할 채비를 갖춘 그런 존재, 나는 누구인가, 이것인가, 저것인가 오늘은 이런 인간이고 내일은 다른 인간인가, 아니면 동시에 둘 다인가, 타인 앞에서는 위선자이고, 자기 자신 앞에서는 경멸할 수밖에 없는 가련한 약자인가“ 무겁고 슬퍼지는 공감의 침몰 속에서도 다행히 그의 시 끝에 쓴 자문자답이 많은 이들의 가슴을 울리고, 경멸할 수밖에 없는 가련한 약자로 느껴져 비루하고 민망할 때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살아갈 힘과 용기를 내게 했다. “나는 누구인가, 이 고독한 물음이 나를 비웃는다. 하지만 내가 누구이든, 하나님은 아신다, 내가 그의 것임을. “ 6. 과연 사람은 정밀한 잣대와 예리한 칼로 비기독교적인 영역을 과감하게 잘라내면 가장 기독교적인 영역만 가진 훌륭한 신앙인으로 될 수 있는 것일까? 사람이나 세상은 과연 그런 경계선을 긋고 나눌 수 있는 대상일까? 위에서 본 본회퍼 목사의 경우처럼 사람들은 바깥에서 보는 나와 내가 아는 나로 두 본질이 잘라낼 수 없도록 단단히 섞여 동시에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혹시 어쩌면 우리는 모두 완벽한 잣대에 의해 잘려 버려지는 사람은 아닐까? 또 어느 순간은 꽤 훌륭한 신앙인이 되기도 하다가도 어느 순간은 안 되기도 하지는 않을까? 내 자신을 들여다보니...솔직히 그다지 자신감이 없다. 그러다보니 불순한 신자의 의심과 좌절이 밀물처럼 몰려온다. 모든 곳에 계신다지만 찾아다녀도 어디서도 보지 못했다. 언제나 계신다지만 힘들고 괴로울 때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래서 천국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지 않고 그런 말은 거짓이다 했을까? 여기 있으면 여기가 끝나는 경계 너머는 없게 되니까. 지금 있다 며칠에 온다 하면 다른 순간은 다 부재중이 되기 때문에 아무도 그 시간은 모른다 했을까? 그저 오늘도 내일도 하던 일을 계속하신다던 예수님. 나는 예수가 아니고 믿음이 흔들리는 약한자니 어쩌나... 7. 그럼에도... 용기를 얻는 글 한편이 있다. 영문학 교수이자 기독교작가였던 C. S. 루이스는 기독교와 비기독교의 경계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인상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세상은 100퍼센트 그리스도인과 100% 비그리스도인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도 서서히 신앙을 버리고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중략) 또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하지는 않지만, 서서히 그리스도인이 되어가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중략) 다른 종교를 믿지만 하나님의 은밀한 영향을 받아 자기 종교 중에서도 기독교와 일치하는 부분에만 집중함으로써,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리스도께 속하게 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순전한 기독교』중에서). 8. 컵에 담긴 절반의 물에서 ‘아직도!’ 라는 느긋함과 ‘벌써...’의 초조한 감정으로 나누어지는 사람의 태도처럼 우리는 강함과 연약함, 능력과 무기력, 성결함과 탁함 등 여러 이중적이고 끝에서 끝까지 오가는 변덕스러움을 가진 존재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천행일까? 다음 발걸음을 앞으로 갈 것인지 뒤로 가거나 주저앉을 것인지 선택할 자유는 분명 우리에게 있다. 하늘이 우리를 완벽한 생명으로 만들어 주지 않은 대신 준 큰 선물이 바로 그런 선택의 자유가 아닐까 싶다. C. S. 루이스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을 향하여 나가는 스타일이 되던지, 본회퍼목사처럼 내가 가진 힘은 믿을 수 없음에도 내가 아닌 바깥 하나님의 손에 잡힌 것을 믿던지! 단지 조심할 것은 완벽한 잣대질, (남이 나에게 하던지 나 스스로 나에게 하던지) 그 판결에 목매지 말일이다. - 오늘도 스스로에게 다짐하며 기대보는 마음, 부족하지만 이대로의 내 모습을 반겨주고 품어주는 하나님 같은 사람을 만날지 누가 아는가, 내 가족이나 이웃, 연인이나 신앙의 동지 중에서. 그러니 오늘도 그런 행운이 있든지 없던지 전진! |
'이것저것 끄적 > 길을 가는 사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식언, 나는 밥먹듯 뱉은 말을 주워먹으며 사는 인생에도 불구하고... (0) | 2017.04.03 |
---|---|
하늘도화지에 그리는 봄 (0) | 2017.03.19 |
조금만, 한 번만 더 살펴보고 들어주고 나누고... (0) | 2016.09.10 |
로제 형, 부탁이 있어요! (0) | 2016.09.05 |
간병일기 3038일 - 염치 없는 결혼기념일, 그래도... 이벤트를! (0) | 2016.09.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