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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병일기 3038일 - 염치 없는 결혼기념일, 그래도... 이벤트를!>
1. 그래도 고마운 사람 고마운 날
“아침에 눈을 뜨면 옆에 당신이 있었으면 좋겠어!” “당신을 바래다주고 혼자 돌아가는 이 순간이 참 싫어...” “잘해줄게, 나만 믿어줘!”
1988년 9월 3일, 종로5가 기독교 100주년 기념관. 대기실에는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한 여자가 두근거리며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소강당 통로로 입장하는 그 여자는 내게만 보이는 천사였다.
세월이 흘러 2016년 9월. 내일 3일이면 온갖 감언이설로 순진한 여자를 속여 결혼한 지 28년이 되는 기념일이다. 그때는 고의가 아니었다. 거짓말은 더더욱 아니었고. 살다보니... 지키지 못하는 날들이 더 많았고 청혼 약속은 반쯤 사기가 되어 있었다.
아내는 몸은 망가지고 영혼은 깊은 수렁에서 오르려 발버둥치는 중이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별로 많지 않다. 그중 가장 잘해낸 것은 불행의 분노를 꼭꼭 잘 여미고 종종 헤헤 웃어주는 정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라고 유행가 가사를 쓴 사람도 필시 못된 남편이었을 거다. 안 그러면 이렇게 족집게같이 남정네 속마음을 잘 알 리가 없다.)
2. 하늘이 준 귀한 날, 아름다운 신부
비록 몸이야 불편하지만 그날에는 없었던 세 아이들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또 그 이전에는 없었던 다른 사람을 향한 그리움이 내 가슴에 자리 잡았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그날 우리를 축하 해주러 왔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소식이 끊어졌다. 너무도 오래 아프면서 손가락 열 개로 못 셀 정도로 병원을 옮겨 다니는 동안에. 그러니 우리의 결혼기념일은 축하도 스스로, 위로도 스스로 해야 한다.
사진을 다시 찾아보니 세월이 참 오래 되었음을 실감한다. 그나마 피난살이 같이 돌아다니다보니 앨범이고 액자고 다 없어져버렸다. 겨우 남은 건 액자에 담겼던 것, 그나마 핸드폰으로 찍어놓은 거 하나 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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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결혼기념일에는 고열과 염증으로 주사 맞는 사진 한 장 만 남겼다.)
3. 결혼기념일 선물을 뭘로 준비해야 할까?
"우와~~ 누구…세요?" "탤런트 같다! 진짜 이쁘다!"
그때 멀리 안산에서 온 노동교회 청년들이 아내를 보고 한 마디씩 했다. 아내는 원래 평소에 워낙 화장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 조금만 했는데도 많이 달라보였다. 뽀얀 뺨, 짙은 눈썹, 빨간 입술, 초가을의 푸른 하늘과 너무도 어울리는 맑은 신부였다.
사실 나는 결혼을 하지 않고 평생을 살고 싶었다. 요즘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독신으로 살았으면 더 나았을까? 적어도 지금 당하는 이런 고통은 겪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하면서... 후회는 않지만 너무 힘들면 이웃집 담장을 넘겨보듯 기웃거려본다.
성경의 어느 구절들이 머릿속을 지나가고 있었다. 마치 시골 역을 통과하는 비둘기호처럼 천천히.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아름다운 아내의 기억들이 풀의 꽃이었을까? 그 꽃이 시들고 마르는데 내가 얼마나 원인이 되었을까?
1988년 9월 3일 결혼, 고생길을 걸어와서 도착하는 2016년 9월 3일, 결혼 28주년 기념일에 뭐라도 선물 하나를 해야겠다. 하도 고생시키다 덜컥 병만 안겨서 미안하니까.
이런 건 어떨까? 아내에게 힘내라고 손전화기에 보내주시는 축하의 문자! 아는 분 모르는 분 무더기로 날아와 품에 안기는 사랑 한 조각들.
비록 착한 아내 좋은 지아비로 작은 처소에서라도 오순도순 사는 그런 고운 꿈은 물 건너갔지만 마지막까지 곁에 있어주겠다는 마음의 표시. 그 이벤트를 하고 싶다. 물론 아내가 탐내던 분홍 운동화를 구해서 포장도 하고.
(마음이 내키시는 분들은 한통의 문자 부탁합니다. 010-9407-8987 로 보내주시면 이쁘게 프린트도 하고, 배경음악 넣어서 동영상 사진앨범으로 만들어 아내에게 전해 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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