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병일기 3021일째 - 지금은 2인3각 달리기 중>
1. 다 하나님이 만드신 걸, 뭘~
시골 어느 집사님 댁에 잔치가 있었다. 마당에 자리 펴고 잔치 상 차려서 마을 분들을 대접을 하고 있었다. 마침 탁발을 하며 마을을 지나던 스님이 마당으로 들어섰다. 주인 집사님은 스님이 드실만한 종류로 한쪽에 상을 차리고 많이 드시라고 권했다. 보고 있던 한 장로님이 몹시 불편한 표정으로 참고 있다가 기어이 주인 집사에게 말했다.
“왜 그랬어? 그냥 보내지 불편하게...”
"에이, 스님도 하나님이 만든 사람인데요, 뭘! 그깟 먹는 거 가지고 ~"
그렇다. 성경의 첫 장 첫 절을 믿는 사람은 그럴 수밖에 없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 창세기 1장 1절] 그러니 세상안의 모든 것, 불교의 사람도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이라는 말이 맞다. 그게 사람, 물건만일까? 선하고 악한 성품은?...
2. 사람은 본디 착했고, 동시에... 본디 악했다.
나는 한동안 이렇게 믿었었다. 사람은 선하게 태어났는데 살면서 악해진다고. 딱 맞지 않는 점도 있지만 성선설에 공감했었다. 그러나 살면서 점점 바뀌어 갔다. 성악설로. 사람은 본래 악하게 태어나는데 살면서 배우고 다듬는 수행에 의해서 좀 나아진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어떤 면에서는 그게 더 값져 보이기까지 했었다.
그런데... 좀 더 나이 들면서 지금은 둘 다 인정하기 힘들어졌다. 아님 둘 다 맞다는 쪽으로 변했다. 결정적 동기는 아내를 덮친 희귀난치병이었다. 지독한 불행이 가정을 해체하고, 가족들을 구렁으로 밀어 넣어 미래도 꿈도 다 박살을 내면서였다. 수시로 큰 파도 같은 고통이 줄지어 덮쳐 와서 삶을 할퀴고 무지 아프도록 때리고 갔다. 그렇게 날마다 겪는 현실 앞에서는 착한 심성의 사람처럼 모든 걸 감사 하지도 못했고, 악한 심성의 사람처럼 계속 악다구니도 부릴 수 없었다, 어느 쪽도 머물지 못하고 왔다갔다 혼란스럽게 살기 시작했다.
‘차라리 모태에서 나오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저 욥의 그런 고백이 때도 시도 없이 가장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면서 사람은 선한 의지도 악한 원망도 모두 본성으로 타고 났다고 믿게 되었다. 세상도 본디 어느 한쪽만 있는 곳이 아니고, 애당초 둘 다를 품고 있었다. 하나님의 수하에는 천사만 있지 않고 사탄도 있으며 둘 다 하나님께 속해 있으니.
불행이나 다툼, 질병 실패 등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어떤 힘, 존재가 주는 걸까? 사랑 감사 희생 등은 하나님에게서 나오고, 반대쪽의 미움 원망 절망 등은 하나님 아닌 다른 곳에서 나오는 걸까? 그거야말로 하나님을 반쪽짜리로 작살내는 가장 믿음 없는 불경죄가 아닐까?
같은 시선으로 보면 이 경우는 어떻게 되는 걸까?
질병이나 실패로 다른 가족에게 무거운 짐이 되어버린 가족이 있다면, 그 가족도 하나님 아닌 누가 준 것일까?...
3. 점점 하기 싫어지는 2인3각 달리기
아픈 가족과 함께 살아가는 것. 무엇인가에 실패한 가족과 함께 살아가는 것도 그럴 것이다. 그건 마치 어릴 때 운동회에서 하던 두 사람이 다리 묶고 뛰는 2인3각 달리기와 비슷하다. 2인3각 달리기는 내 마음대로 달렸다가는 자빠지고 더 늦거나 다치기도 한다. 자기 힘, 자기 욕심 위주로 달리고 싶은 충동을 내려놓아야 한다. 더 약한 파트너와 조절하며 숨을 맞추어 뛰어야만 한다. 같이 다리 묶인 사람의 속도와 호흡에 맞추어 느리게 걸어야 넘어지지 않는다.
그 답답함, 그 불편함이란 쉽게 분노를 부르고 수시로 좌절을 부른다. 행여 저만치 골인지점이 눈에 아른거리면 묶인 상대를 버리고 혼자 냅다 뛰고 싶어진다. 아니면 차라리 달리기를 때려치우고 다리를 묶은 끈을 풀어버리고 싶어지기도 한다. 때론 의욕이 마구 넘쳐서 '난 할 수 있어!' 주먹을 쥐고 외치며 시도해보기도 하지만, 그러다 바로 뜻대로 안 된다는 상황을 만나 넘어지기라도 하면 더 의기소침해진다. 어쩔 수없이 넘어진 동반자를 일으켜 세워야 하고 다시 달팽이처럼 엉금엉금 출발하지만.
왜?...운동회는 재미로 한다 치고, 삶에서도 이 힘든 2인3각 달리기를 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누구는 팔팔한 파트너를 주어서 씽씽 달리는 행운을 주고, 누구는 기어이 연약한 파트너를 묶어서 일생을 살게 할까?
숨고르기. 질식하지 않기. 다시 일어서기. 죽기 전에는 풀지 못하는 이 2인3각 인생 달리기를 하려면 그래야 한다. 어쩌면 이 경기는 잘 내뺄 능력을 가진 사람이 중심이 아닌지 모른다. 혼자서는 꼴찌를 할 수밖에 없고 주저앉아 울기 십상인 사람이 중심인지도 모른다. 같은 끈으로 묶인 사람을 부축하여 앞으로 걷고 형편이 된다면 종종걸음으로 뛰라고. 그래서 같이 종착지를 통과하는 기쁨을 누리라고.
그런데 쉽지 않다. 수용도 고백도, 사는 것도. 길어질수록 점점 하기 싫어지는 2인3각 달리기...
4. 피할 곳이 없다.
아담은 무화과 잎으로 가리고 나무 뒤에 숨었다. ‘네가 어디 있느냐?’ 묻는 하나님은 정말 몰라서가 아니다. 네가 숨을 곳이 없다는 경고였다. 요나는 하나님을 피해 36계 줄행랑을 쳤지만 풍랑을 만나고 고기뱃속에 들어갔다. 하나님을 피할 곳이 세상 어디에 있다고...
하나님을 피할 곳이 없는 것처럼 예상 못하고 닥치는 고난도 피할 곳이 없다. 24시간 밤낮 언제나, 괴로움 외로움 서러움이 되어 어느 구석에 숨어도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
[내가 하늘로 올라갈지라도 주께서 거기 계시오며 내가 지옥에 내 침상을 펼지라도, 보소서, 주께서 거기 계시나이다. - 시편139편]
다윗은 그걸 알았다. 나도 진작 알았어야 했는데...
5. 어디나, 언제나 계신다는 것은 이런 거지
안 보인다고 없는 것 아니고, 돌아선다고 없어지지 않는다. 말로 ‘없다!’ 한다고 없는 것 아니고, 글로 ‘없다!’ 라고 쓴다고 없어지는 것 아니다. 성공할 때는 당연히 늘 계시다! 하고, 실패할 때는 애당초부터 없었나? 그런 것도 아니다. 내가 살아 있을 때만 계시고, 나 죽으면 없어지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래서... 이건 나쁜 꿈이야! 라고 해봐도 깨지 않았고, 괜찮은 척 외면해도 고통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안했고, 금방 ‘나을 거야!‘라고 주문처럼 외워도 긴 세월이 흐르기만 했다.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그 상태라면 멀지 않아 형편은 바닥나고 몸과 마음은 파김치가 되어 죽어버릴 예상을 깨고 계속 살아가고 있었다. 생존은 까마귀가 물어오고, 고단함은 작은 로뎀나무 그늘이, 이 벽을 돌아서면 아마 절벽일거야 하며 불안했지만 또 길이 이어졌다.
어디나 계신다는 것은 그런 거지. 언제나 계신다는 것은 그런 거지. 세상을 만들어서 시작하시고 세상을 거두어서 끝내시는 분, 그 사이에, 그 공간에 머무른 나를 기억하시는 분, 내가 무슨 생각을 해도 아시고, 어디서 어떻게 살아도 계시는 분.
- 바로 하나님.
6. 나의 죄를 사하노라!
고작 하루 중에도
몇 번인가 흔들린 나를
외롭다, 외롭다 노래 부르면서도
정작 가까운 이들을 외면한 나를
희망은 까다롭게
좌절은 부풀려 편애한 나를
그럼에도...
'나의 죄를 사하노라!'
연약한 사람에게
고귀한 존재가 분명할 사람의 이름으로,
내가 나에게 오늘도 내리는 응원의 면죄부.
(2008년 5월 9일 - 2016년 8월 16일, 맑은고을 병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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