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병일기 3029일 - 달팽이들의 외출>
1. 달팽이의 외출은 준비도 빡세다.
“일어나! 빨리빨리~”
다른 날이면 아직 미적거릴 시간에 머리 감고, 씻기고 옷 입히고.
어제 밤 미리 사온 죽을 전자레인지에 데워 봉투에 담고 약과 마실 것도 담았다..
멀리 일산에 있는 큰 병원 국립암센터 가는 날.
머릿속에는 차례차례로 해치워야할 순서들이 예행연습처럼 스쳐간다.
몇 시 몇 분 단위로 붙인 숫자들과 함께.
벌써 몇 년째인데 아직도 조바심이 무슨 족쇄처럼 질질 끌려온다.
‘무슨 일 안 생겨야할 텐데, 잘 버티고 다녀와야 하는데’
그렇게 아직 7시도 안되어 병원을 나섰다.
소풍은 아니지만 달팽이들의 외출이다.
아픈 아내 달팽이 하나, 그 달팽이에 메인 남편 달팽이 하나.
이것도 외출이라고... 주차장을 나와 큰 도로에 들어서니 마음이 설렌다.
“야! 좋다~흐흐”
2. 또 다른 달팽이들의 사는 법
“안녕하세요! 잘 지내지요?”
몇 년 째 병원에서만 얼굴 보는 사람들. 세상에는 이런 모임 아닌 모임도 있다.
여기서만 보는 아픈 사람들. 만나면 병과 약과 통증을 쏟아놓는 사람들.
“와! 안정숙씨 엄청 살 빠졌네요!”
예전 7년쯤 전에 같은 병원에 입원해있었던 부부를 만났는데 그 남편이 감탄사를 날렸다.
아내는 졸지에 살 쏙 빠진 몰라보는 돼지(?)가 되었고 그리 기분 나쁘지 않은 칭찬이다.
“그래요? 하긴 그때보다 7-8킬로는 빠졌으니 그렇겠네요. 그때는 스테로이드 때문에...”
“정말 몰라볼 정도로 날씬해졌는데요!”
“뭐, 그렇다면 좋은 거지요? 하하! 아이는 잘 커요?”
“벌써 7살이에요. 제가 아파서 할머니가 키워주셔요.”
그랬다. 부부가 환자로 만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다. 그러니 생활비 버느라 남편 환자는 일하고 아내 환자는 휠체어를 타고 거동도 어려워 재활병원 입원 퇴원을 수시로 하니 아이를 양육할 수가 없을 거다. 에구, 희귀난치병 가정의 삶이란...
다른 달팽이들도 끼리 모여 수다 삼매경이다.
두어 달 전에 보고 다시 두어 달 지나야 만나는 잠시의 시간이니 아껴서 반가워하느라.
3. 달팽이가 델마와 루이스로 변신했다.
“더워도 너무 더워... 벌써 끝난다던 무더위가 왜 아직도 기승인거야?”
“누가 아니래, 벌써 8월 말이 내일 모레인데”
요즘 기상대는 기상예보를 하지 않고 기상중계를 한다고 누가 비난했다.
비가 온다 안 온다, 더위가 간다 안 간다 하도 여러 번 틀리는 바람에 화가 나서.
이럭저럭 검사와 진료를 정신없이 마치고 다시 작은 지방 재활병원 집으로 내려오는 길.
올라가는 길에는 무사히 병원 일정을 마치게 해달라고 비는 심정으로 찬양을 들으며 갔다.
내려오는 길은 몸은 지치고 마음은 서러워 노래 분위기를 바꾸었다.
‘응답하라 1988’ 드라마에 배경으로 나온 곡들 모은 OST로.
“아~ 이별 뒤엔 만남이, 만남 뒤엔 무엇이 기다리나요!”
이선희의 ‘갈등’이라는 노랫말을 아내가 목소리 색색거리며 따라 부른다.
“뭐하는 거야? 그러다 숨 넘어가서 졸도하겠다. 쉬어! 제발~ 흐흐”
“아, 노래방 가서 소리 질러 노래 하랬다구! 재활치료선생님이! 페활량 늘리는 도움 된다고, ”
“늘기 전에 응급실 실려갈까봐 무서워서 그렇지!"
그러고 보니 초기 심할 때 비하면 많이 소리가 늘었다. 커지기도 하고.
역시 달팽이도 연습과 치료를 계속하면 늘어나는 거 맞나보다.
“가슴을 내밀어도~”
이번에는 내가 선수를 쳤다. 아내가 따라 부르는 사이를 치고 들어갔다.
“표가 안 나네~”
“...엥? 뭐야!”
신형원의 ‘개똥벌레’ 에 나오는 원래 가사는 그 다음이 ‘친구가 없네~’다.
그런데 내가 바꾸어 부른 가사의 의미를 아내가 눈치 챘다.
잠시 멍하더니 그래도 다행히 화를 내지 않고 킥킥 웃었다.
‘없는 사람들’이 빨리 알아차리는 의미. (아내니까 하지 남에게는 절대 못하는~)
“그래도 난 지난 번 유방암 검사할 때 의사 선생님이 나가지는 않았어!”
그러면서 들려준 이야기는 아주 슬픈 이야기였다.
너무 남자같이 절벽인 아주머니가 검사를 들어갔는데 의사선생님이 ‘에이...’하며 그냥 나가버렸다는.
아마도 누군가 지어낸 개그의 소재가 분명할 건데 사람들은 킥킥거리며 퍼졌나보다.
이별 뒤엔 만남이 온다고 이선희는 노래했지만, 웃음 뒤엔 슬픔이 왔다.
신형원의 ‘개똥벌레’의 끝 가사를 따라 부르며 아내가 울먹거렸다.
“울다 잠이 드네, 울다 잠이 드네, 울다 잠이 드네...,”
마치 레코드 바늘 넘어갈 때처럼 아내는 그 구절을 반복하며 중얼거렸다.
그 바로 앞 가사는 이랬다.
‘아아 외로운 밤 쓰라린 가슴 안고
오늘 밤도 그렇게 울다 잠이 든다.‘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몰라, 나는 울면서 잠 들어보았지. 그 슬픈 마음...ㅠㅠ”
공연히 놀려먹다가 뒤통수를 얻어맞는다. 필시 천벌이다. 하늘이 내리는.
무슨 말을 하랴? 무슨 방법이 있을까? 그저 손만 잡아주었다.
이 뻘쭘한 위기에서 건져준 것은 바로 이어진 노래.
들국화의 ‘걱정말아요 그대’
둘이 따라 부르며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우리 다 함께 노래 합시다
후회없이 꿈을 꾸었다 말해요
새로운 꿈을 꾸겠다 말해요!“
우리는 차안에서 낄낄거리며 델마와 루이스가 되었다.
달팽이처럼 느리고 무익한 처지로 생존을 끌어가는 생활이 싫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일 년 삼 년도 아니고,
언제라고 기약도 없는 삶.
눈 뜨면 치료하고 밥 먹고, 다시 치료하고 밥 먹고,
새로운 증상과 씨름하다가 밥 먹고,
반복만 하면서 아무에게도 유익을 못 주는 삶이라니...
달팽이는 그래도 많이 명예롭고 온유한 비유였다.
가슴 깊은 곳에는 차마 말로는 못 꺼내는 ‘벌레’라는 단어가 웅크리고 있었다.
그러다 그나마 그 장소라도 탈출하는 큰 병원 가는 날.
우리 부부는 구겨지고 불행한 과거를 뒤로 떨치고 차로 달리는 델마와 루이스가 되었다.
소리 지르고 푸른 하늘이 마냥 좋아 죽어서 새처럼 날고 싶어지는...
그래도 새 꿈을 꾸는 델마와 루이스가 되고 싶어 엑센트를 더 주어 부르는 구절.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우리 다 함께 노래 합시다
후회 없이 꿈을 꾸었다 말해요
새로운 꿈을 꾸겠다 말해요.~“
(2008.5.9 ~ 2016.8.24 맑은고을 병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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