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투병일기

간병일기3004일째 - 경험과 소원, 그 중간을 서성이는 믿음

희망으로 2016. 7. 30. 11:46
<간병일기 3004일째 - 경험과 소원, 그 중간을 서성이는 믿음>

1.

이른 아침 깊은 한기가 몰려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꿈이었는지 생각의 잔상이었는지 애매한 채.
아내가 내 곁을 떠나고 세상에 없는 빈자리만 보였다.

날마다 아내가 누워 있던 병상 침대에는 하얀 시트만 있고
빈자리인 채 날이 밝고 어두워지며 시간이 흐르는 무서움이라니,
침묵만이, 그늘만이 그 시간과 그 빈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어디를 나가도 어디 가냐고 귀찮게 안하고,
나갔다 돌아와도 왜 늦었냐고 묻지도 않는 심심함
더 이상 이거 저거 해달라고 밤중에 나를 깨우지도 않았다.

앞으로도 계속 아이들은 아이들의 인생에 바쁘고
나와 아내를 알던 사람들도 자기들의 인생에 바쁘고
온 세상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돌아가겠지?

아내가 빈자리, 창밖으로 노을이 지는 하늘이 서러웠다.
목소리도 들리지 않고, 병 든 몸뚱이조차 눈물 나게 그리워지는
이 빈자리는 너무 슬프고 너무 아프고 너무 조용하고...

비몽사몽 철렁 무너진 가슴안고 허우적거리는 팔에 뭐가 잡혔다.
보니 병상 침대에 아직 잠이 든 채 쌕쌕대는 아내가 있었다.
아, 다행이다! 그 많은 쓸쓸함이, 그 깊은 적막과 그 넓은 빈자리들이 
모두 꿈이었거나 이유모를 환상이었다니...,

다시는 아픈 몸으로 나를 귀찮게 하는 아내라고 불평하지 않고,
다시는 근심과 걱정의 덩어리라고 생각지 않기로 했다.
희귀병도 괜찮고 짐 덩어리, 일 덩어리도 괜찮고,
여차하면 숨만 쉬면서도 곁에 있어 주기를 빌고 싶었다.

부부는 반쪽 두 개가 모였다는데 나에게 아내의 자리는 9할이었다.

어느 날 지독하게 슬픈 마음으로 경험했던 꿈이었다.
사실이 아니라고 알면서도 스스로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생생했던 꿈
그 꿈 덕분에 쌓인 불평과 고단한 마음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2.

아내가 상태가 나빠져 들어간 중환자실 바깥에서 몇 날 씩 대기할 때
곧 올 것만 같은 그 죽음 앞에서도 놓지 못하고 손에 꼭 쥘만한 건 없었다.
알량한 자존심도, 비싸다는 물건들도, 아무리 맛난 음식도 무엇도.
그저 아내가 살아나기만, 오늘 죽지만 않았으면 싶어졌다.

그런데... 예상도 못했다. 그게 끝이 아니라는 걸.
다른 날 호흡마비로 숨을 못 쉬어 산소기를 입에 달았는데
면회시간에 너무 고통스러워 눈물만 흘리는 아내를 보면서 소원이 바뀌었다.

"안살아도 좋아요. 죽어도 좋아요.
저렇게 고통스럽지 않게만 해주세요! 제발..."

그랬다. 
죽지 않는 것도, 사는 것도 소원이 아니었다.
독한 고통 앞에 서게 되면 그저 지금 같지만 않았으면 하게 된다.
사람 사는 거 경험해보면 평소 큰소리치는 거 비해 참 약하고 허술하다.
그런데도 그 고개를 간신히 넘으면 작은 근심들이 다시 그 자리를 채운다.

'이게 뭐야? 왜 이리 살기 힘들어...'

소원은 이루어지고 나면 생 까고 잊어도 되는 걸까?
그 소원이 계속 이루어진 채로 유지가 되고 있는데도 마치 내성이 생긴 듯,
혹은 멀쩡한 채 치매라도 걸린 사람처럼 말이다.

3.

한 5년 넘도록 같은 재활요양병원에서 머물다보니 오래 보는 사람들이 있다.
잠시 안보여서 퇴원 했나 싶으면 조금 지나 또 입원, 추운겨울 되면 다시 입원.
그 중 한 사람. 환갑은 넘은 지 십년도 더 되어 보이는 할아버지가 있다.
휠체어를 타다가 워커라는 걷기보조기구를 끌다가 그렇게 수시로 복도를 왕복한다.
재활시간이면 마치 안방에 누운 집주인처럼 매트를 차지하고 편하게 기다린다.

그런데,
간혹 급하게 오는 용변의 신호를 모르시는지 동작이 미처 못 따라가는지
복도에 그만 흘리고 만다. 때론 소변으로 때론 굵은 덩어리로.
그러면 정말 난처해진 간호사들과 여러 사람들이 기겁을 하고 소리 지른다.
청소하시는 아주머니는 여지없이 불려와 일그러진 얼굴로 뒤 처리를 하고.
이런 재활요양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를 받는 나이든 분들이 참 많이도 그러듯
뇌경색의 후유증으로 흔하게 쉽게 오는 인지 기능 저하도 있으시다.
신체의 불편은 병으로 온 것과 나이에 따른 노화의 장애가 복합되어 심해진다.

"상주하며 돌봐주는 가족도 없이 혼자의 몸으로 저렇게 재활을 하면 뭐해?
좀 좋아는 지실까? 얼마나? ㅠㅠ"

어둡게 따라붙는 빤한 예상 질문에 예상대답도 빤하게 바로 온다.
하루 이틀 본 것도 아니고 한 사람 두 사람에게서 보는 것도 아니니.
그럼에도 병원에서 해를 몇 번이나 넘기면서 사시는 게 무슨 희망이 있어서일까?

'저 처지가 되면 목숨을 연명하며 산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 낙은 있을까?'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다 그만 전기 감전되듯 몸서리가 쳐진다.
언젠가 세월이 흘러 혹 겹쳐질지 모를 내 모습이 영상처럼 떠올랐기에.

‘나에게 저런 상황이 오면 그만 살고 싶다. 
그 괴로운 생을 굳이 길게 끌면 뭐해...’

그러나... 누가 정답을 내릴 수 있을까? 
아무리 뛰어난 명 판사 의사라도 답을 할 수 없다.
아니, 해서는 안 되지 않을까? 

누구의 삶이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는 본인만 내릴 수 있는 고유 권리일 테니.
약해지고 가난해지고 우스워 진다고 살 자격이 없어진다면 너무 슬픈 세상일 거다.
더구나 자기 자신의 선택도 아니고 남들의 시선과 유용성으로 정한다는 건 더더욱.

많은 것을 상실하고 비록 남에게는 구차한 생존으로만 보여도
살아가야하는 어떤 것이 분명히 남았을지 모른다. 남들 말고 자기에게는.
가슴 어딘가에 가족이나 사랑하는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 이거나,
손꼽아 기다리는 아직은 오지 않은 기쁜 날, 기쁜 행사가 있을 지도 모르고.
가끔 가족이 같이 하는 맛있는 식사의 즐거움 때문에 또 다음까지 사는지도.

마주 오는 그 할아버지의 불편한 보행을 곁으로 비켜 지나며 짧은 감회에 잠긴다.
어느 날 내가 그 자리에 서고 누군가 오늘 나의 시선으로 볼 지도 모른다는.
그 날 나는 이렇게 말하면서 스쳐갈지도 모른다. 속으로만.

"자네는 살아가는 소원 하나가 있나? 
누구나 원치 않아도 하게 되는 이런 경험을 만나면 그 소원 있어야 해!
안 그럼 못 살고 죽을지도 몰라.“

- ‘내 소원은 뭐지? 
몸은 저 할아버지보다 더 건강할지 몰라도 삶은 내가 더 약해 보이는데...‘


(2008년 5월 9일 - 2016년 7월 30일, 맑은고을 병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