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대답하고 나더니 하는 말마다 “예”만 한다.
“이제 그만해!”
“예”
“예! 그만 하라니까...”
“예”
“.... 내가 잘못했다. 여보야”
아이들이 어릴 때 나하고 잘 안 맞았다.
그래서 ‘내 아이가 아닐지도 몰라’ 하고 중얼거렸다.
도무지 나하고 안 닮았다고...
그런데 세월이 많이 지난 지금은 아이들이 그렇게 대견하고 고맙다.
그래서 내 아이들이 나를 닮아서 훌륭하다고 했더니 날더러 변덕이란다.
“좀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생겨도 이젠 그런 말 안 할 거다.
설사 유전적으로 남의 아이일지라도 친자검사 따위는 안한다.
나는 아이들의 혈육이 아니라 존재를 사랑하니까! 하하하~“
그랬더니 아이들에게 그렇게 전해주겠단다. 협박이다.
‘니네 아빠가 니들 친자식 아닐 수도 있다고 말했다.
안 닮은 구석이 있다고, 그래도 변함없이 사랑하겠단다.‘ 라고...
꼬리 내려야지, 지금 내 나이가 몇이고 아이들은 떠오르는 태양인데,
무엇보다 진실이 아니니까!
그런데 이게 말이 되나?
‘입 닥치고 예!’ 가?
그럼, ‘바람 들어 온다. 문 닫고 나가!’는?
말이 안 된다.
‘꼼짝 말고 손들어!’ 라고 말했던 정신 나간 강도처럼.
입도 닥치고 예! 라고 대답도 할 수 있다.
문도 닫을 수 있고 갈 수도 있다.
꼼짝 않을 수도 있고 손도 들 수 있다.
따로 따로는 얼마든지, 하지만 순서로 늘어놓고 연속으론 불가능한 것 들이다.
사람이 사는 일에도 순서가 바뀌면 안 되는 경우가 많다.
빌려준 돈을 받으러 갔는데 망해서 온 가족이 죽도 못 먹고 쓰러져 있으면
밥부터 한 그릇 사 먹이고, 어떻게 갚을 거냐, 꼭 갚아라, 뭐 그래야 한다.
자녀가 아주 중요한 입시나 취직시험에 떨어져 울고불고 하면
설사 게을렀거나 최선을 다해 준비하지 않은 걸 알고 있더라도
눈물 닦아주고 위로부터 하고 충고를 해줘야 한다.
그리고 뒤집어서 돌아가면 안 된다.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하고 닭이 세 번 운 뒤에 통곡하며 제자의 길을 갔다.
바울은 열심히 그리스도인을 핍박하고 잡으러 다니다가 회심하고 제자가 되었다.
모두 그렇게 산 길을 훌륭하다고 존경하고 그 뒤를 따라 간다.
하지만 만약 베드로가 제자로 살다가 부인을 했다면?
바울이 사도로 전도를 다니다가 변해서 신자들을 잡아 죽이러 다닌다면?
그래도 같은 평가를 해줄까? 후세의 사람들이?
섬머셋의 ‘단비’라는 소설 속에 섬의 창녀들을 회심시키던 신부가
마지막 한 사람을 회심시키기 위해 남은 마지막 날에 유혹을 못 이겨 죄를 범했다.
평생을 윤락행위로 살다가 그 신부의 권유를 받아 삶을 회개하고
먼저 섬을 떠난 창녀들은 참으로 복 받은 훌륭한 여인네들로 칭송을 받았을 것이다.
잘못 산 삶에서 고쳐 사는 삶으로 가는 것은 일방통행만 해야 한다.
다시 번복해도, 돌아가도 안 되는 길이다.
마치 문 닫고 못 나가는 것처럼, 꼼짝 말고 손 들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삶, 부모의 자녀에 대한 태도,
시행착오의 출발을 한 모든 제도와 집단들,
작게는 내 속의 변덕스런 일상 속에서 세우는 결심과 노력들도...
(사진은 오마이뉴스 '사는 이야기 다시 읽기' 팟캐스트 프로그램에 출연기념으로 받은 머그잔이다. 내 이름이 실명으로 새겨진 머그컵! 순서대로, 뒤돌아보며 번복하지말라고 마음 먹게 하는 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