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건너 계시는 존경하는 목사님의 짧은 글이 난타를 당하고 있었다.
세상의 슬픔, 세월호 유가족 심정에 동감하여 쓴 마음 한 조각이
생각이 다른 분들에게 집중 몰매를 맞는 느낌이 들 정도로,
그 분이 속한 교단이 세상의 복 받기를 많이 추구하고
높은 분과 힘 가진 집단에 상당히 무비판 동조를 하는 성향이라
충분히 일어날 일이고, 그걸 아시면서도 한 마디를 하셨다.
어느 친하신 목사님은 또 바른 정보와 긍휼의 시선으로 바라보라며
여러 자료를 보여주시고 친구를 위해 울타리가 되어주시고 있었다.
별 효과없이 더 몰아치는 오물을 받게 되면서도,
“가능할까? 수 십 년을 뿌리 깊게 쌓아온 습관적 성향이 변하는 게...”
손가락에 장을 지질 필요도 못 느끼면서 나는 부정적 단언을 했다.
“안 변해, 어디 하루 이틀 살아 온 방식도 아니고,
그건 자기 부정과 다름없는데 보통 사람은 힘들지, 그럼”
나는 그렇게 본다. 자신이 쌓아온 성향, 버티던 자리를 바꾸는 건 거의 죽음과 마찬가지이고, 그건 위대한 일이라고, 사람은 그러기가 거의 불가능이라고 본다. 성경에 ‘돼지에게 진주목걸이를 거는 것은 미련하다’라고 했다. 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 속담에도 그런 뜻이 있다. 소의 귀에 3년을 경을 읽어도 도를 깨닫지 못한다면서 생긴 말, ‘소 귀에 경 읽기!’ 성경의 많은 곳에서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용서하고 귀히 여기는 하나님을 공부하는 신앙인들이 잘잘못을 따지며 자식 잃은 아픈 가족들을 비난한다. 이건 돼지고 소와 다를 바 없는 불가능한 존재다. 거기에 성경은 진주목걸이고 경이지 무엇일까?
예수는 영원한 자유를 얻으려면 거듭나라고 말했다. 그걸 못 알아들은 사람은 ‘여자의 뱃속으로 다시 들어가라는 말이야?‘ 고 물었고, 알아들은 이는 낙심하여 돌아갔다.
비슷한 말은 ‘회심’ 혹은 ‘회개’다. 가던 길을 돌이켜 다르게 살라는 뜻, 그러나 그게 어디 쉬운 일일까? 지금까지 쌔빠지게 걸어온 게 아까워서 못하고, 그런 마음은 끝내 자기를 합리화하며 부인하는 자리로 가버린다.
보자, 이전의 모든 쌓은 것을 버리면 무엇이 남을까? 새로 시작하려면 또 얼마나 힘들까?
그걸 해낸 사람이 바울이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을 잡아 죽이러 다니다가 다메섹에서 음성을 듣는다.
“내가 예수다, 니가 잡으러 다니는 사람들이 믿는 예수. 왜 그렇게 사니? 그러지 말고 나와 같이 가자!”
그 말에 돌이킨 바울은 그간 쌓은 모든 것이 날아갔다. 가마리엘 문하생 동료들에게는 배신자 라는 낙인이 찍히고 출세 길도 날라 가고, 또 예수를 믿는 이들은 그가 이전에 자기들을 잡아 죽이던 나쁜 놈이라고 의심하고 비난하며 수군거렸다. 그래서 자기 고향 다소에서 긴 세월을 자숙하고 무명으로 지내야 했다. 고립무원! 딱 그랬다.
그러고도 그가 당시 성공적인 댓가나 해피엔딩을 했을까? 몰매를 수도 없이 맞고 배고프고 추운 여행을 다니며 전도를 하다가 마지막에는 감옥에서 목이 잘렸다. 벌판에 던져진 머리는 2년을 밤낮으로 짐승과 벌레들 속에서 굴러야 했다. 누가 이 길을 성공적인 선택이라고 할까?
회심, 회개의 삶은 그렇게 고단하고 비참하고 쓸쓸한 것이다. 자기를 부정하고 자신이 쌓은 것을 다 포기하는 것, 그리고도 낮선 새로운 길을 시작해야 하는 고단한 일이다. 그런데 그 선택을 저렇게 복과 권세를 추구하며 산 이들이 받아들일까? 고통스럽고 외로울 수도 있는 길을? 차라리 돼지가 변하여 귀부인이 되는 영화나 소설을 보는 쪽이 빠를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쉽사리 회심이나 회개를 하지 못한다. 필요성은 늘 느끼고 그 훌륭한 체험은 해보고 싶어하지만 진짜 체험만, 맛보기만 시식하곤 제자리 제 삶의 길로 돌아간다. 그래서 이천년이 지나도 여전히 성경은 ‘회개하라!’를 외치고 있고, 여전히 ‘가난하고 약한 자를 서로 돌보라!’를 지상 과제로 선포하고 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살고 잇지 못한 과제로...
어떻게 도와줄 길이 없다. 그냥 터무니없이 멀리서 사는 이들은 그냥 그들로 살게 두고 진주목걸이나 회수해서 잘 간직하는 길 밖에,
회심은 미친 짓이다. 정말 어렵고, 그래서 그만큼 값진 길!
바울의 양쪽에서 떵떵거리던 사람들은 다 묻히고 썩어서 이름도 명예도 남김없이 사라졌지만 회심과 회개의 길을 걸은 바울은 기독교의 상당한 바탕을 떠받치고 그의 삶은 소중한 사역으로 남았지 않은가? 신약의 절반에 가까운 기록을 남긴 하나님의 일꾼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