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담 168 - 지금도 알 수 없는 것들>
많이 아픈 사람은 또 다른 아픈 사람을 만나면 무지 반길 것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제 경험은 달랐습니다. 아픈 사람은 고사하고 환자복을 입은 사람도 보기 싫어지고 복도에서도 만나지 않았으면 싶어지는 이 마음은 무슨 까닭일까요?
이해요? 누구보다 잘 알지요. 한마디만 들으면 그 뒤로 나올 두 마디 다섯 마디도 마치 듀엣으로 노래 부르듯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싫어합니다. 한 번 겪으며 무지 힘들었던 순간을 다시 또 한 번 겪는다는 것이 정말 기쁘겠어요? 그런 사람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의 심정과 형편을 속속 아는 것 당연하지요. 왜 모르겠어요. 무엇이 수치스럽고, 무엇이 죽기보다 싫으며 무엇이 허리가 끊어지도록 고단하게 하는지 다 알지요. 그래서 가난한 사람은 또 다른 가난한 사람만 보면 얼싸안고 반갑다고 붙잡을까요?
아니요. 가난한 사람은 그 지긋지긋한 가난 말고 넉넉하고 번쩍이며 여유있고 배부르게 먹을 상이 차려진 집을 좋아합니다. 그런 곳에 끼어서 살고 싶고, 그런 사람이 부르면 행운이라고 생각하고 정말 겸손히 비위 상하지 않도록 애쓰며 머무르고 싶어집니다.
나쁘다고요? 위선자이고 영혼을 팔아먹은 거 아니냐고요? 아뇨, 단지 지겨운 삶을 피하고 싶고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을 뿐입니다. 너무 나무라지 마십시오. 진짜 그런 고통을 겪어보지 않았다면 단지 이론으로만, 의무로만 강요하지는 말아주세요.
선거만 끝나고 나면 그럽니다. 왜 가난한 사람들이 그들을 위해 애쓰고 뛰겠다는 사람은 제쳐두고, 오히려 그들의 알량하고 얇은 주머니를 털어 부자에게 주려는 사람들을 찍어주는지 모르겠다고. 정말 모르시나요? 그렇다면 진심으로 그들의 고충과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전, 아주 오래 전 예수라는 젊은 사람이 그랬습니다. 옳지 않은 짓을 하는 사람들은 회개하고 다시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은 괜히 주눅들고 죄인이라고 자책하며 살지말고 용기를 내서 직접 하나님께 구하고 용서받고 그러고 살면 된다! 라고...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닌 그들이 예수를 죽이라고, 십자가에 못 밖으라고 부자와 힘센자들의 편을 들었습니다. 세상에 이런 억울한 일이 어디 있나요? 정말 속상하게...
그러나 그런 겁니다. 하루하루 벌어먹고 사는 사람들, 질병을 등에 지고 사는 사람들, 배운 거 별로 없고 눈치보며 평생 산 사람들은 자신감이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정의 신념 자존심 그런 거 정말 거리가 멉니다.
그러나 너무 쉽게 침 뱉고 욕하지는 마세요. 그런 사람이라고 좋은 세상, 고통이 끝나는 날을 바라지 않는 게 아닙니다. 다만 자신이 없고 일주일 뒤 다리 부러지는 생일상보다 단지 당장 오늘 끼니가 더 급하고 필요할 뿐입니다.
끝까지 그런 하찮은 인간의 고통을 이해하신 예수만이 그들을 변화시켰지요. 저들이 몰라서 하는 행동을 용서해달라며, 그래도 사탄에게 넘기지 않고 사랑하고 지키는 일을 계속 하겠노라고...
제게도 그런 분이 있습니다. 아내가 셋째아이를 낳다가 뇌경색이 와서 거의 식물인간(이 표현을 참 싫어하는데 다르게 뭐라고 해야할 지 모르겠어요.) dl 되어버리신 사모님과 십년이 넘도록 사시는 목사님,
가끔 전화 통화를 하면서 아내만 돌보며 우리 인생은 날려버린 억울함과 속상함을 주고 받습니다. 고상하게가 아니고 하나님도 씹고, 아내도 원망하고 처지도 비관하면서요. 그렇다고 위선자니 죄인이니 그런 소리는 하지마세요. 세상에 우리 같지 않아도 다 위선자고 죄인인데 세삼스레 따로 구별할 것 뭐 있나요.
그런데 그 목사님이 욥기를 통해서 절절하게 말하고, 아이들의 소식을 통해서 또 깎고 견디는 이야기를 올리시면 저는 고개를 돌립니다. 아니면 보고도 안 본 척 모른 척 합니다. 한 마디만 하셔도 뒤에, 아래에, 심중에 담긴 마음까지 말보다 먼저 비수가 되어 제 가슴에 찌르는 아픔이 싫어서입니다. 누구보다 잘 알기에 위로의 말을 할 수 있지 않냐구요? 해 주기 전에 내 마음이 먼저 찔려 피가 철철 흐르게 되는 거는 생각 안 해보셨나요?
그래서 다시 놀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목사님은 이런 저런 고통을 안고 가까이로 오는 많은 사람들을 안고 토닥입니다. 저는 끔찍하게 싫어 도망가는 데 말입니다.
그 목사님이 김병년 목사님입니다. 정말 하나님은 목자로 세울 분과 평신도로 머물 사람을 참 잘 구별하십니다. 하나님이 괜히 하나님이 아니신 걸 인정하는 밤입니다.
(그걸 아시는 분이 제게는 왜 이리 혹독하고 견디지 못할 높은 벽을 주시는지 잠깐 의심스럽습니다. 혹시 주무시다가 잠이 덜 깨셔서??...흐흐) — 김병년님과 함께.
많이 아픈 사람은 또 다른 아픈 사람을 만나면 무지 반길 것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제 경험은 달랐습니다. 아픈 사람은 고사하고 환자복을 입은 사람도 보기 싫어지고 복도에서도 만나지 않았으면 싶어지는 이 마음은 무슨 까닭일까요?
이해요? 누구보다 잘 알지요. 한마디만 들으면 그 뒤로 나올 두 마디 다섯 마디도 마치 듀엣으로 노래 부르듯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싫어합니다. 한 번 겪으며 무지 힘들었던 순간을 다시 또 한 번 겪는다는 것이 정말 기쁘겠어요? 그런 사람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의 심정과 형편을 속속 아는 것 당연하지요. 왜 모르겠어요. 무엇이 수치스럽고, 무엇이 죽기보다 싫으며 무엇이 허리가 끊어지도록 고단하게 하는지 다 알지요. 그래서 가난한 사람은 또 다른 가난한 사람만 보면 얼싸안고 반갑다고 붙잡을까요?
아니요. 가난한 사람은 그 지긋지긋한 가난 말고 넉넉하고 번쩍이며 여유있고 배부르게 먹을 상이 차려진 집을 좋아합니다. 그런 곳에 끼어서 살고 싶고, 그런 사람이 부르면 행운이라고 생각하고 정말 겸손히 비위 상하지 않도록 애쓰며 머무르고 싶어집니다.
나쁘다고요? 위선자이고 영혼을 팔아먹은 거 아니냐고요? 아뇨, 단지 지겨운 삶을 피하고 싶고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을 뿐입니다. 너무 나무라지 마십시오. 진짜 그런 고통을 겪어보지 않았다면 단지 이론으로만, 의무로만 강요하지는 말아주세요.
선거만 끝나고 나면 그럽니다. 왜 가난한 사람들이 그들을 위해 애쓰고 뛰겠다는 사람은 제쳐두고, 오히려 그들의 알량하고 얇은 주머니를 털어 부자에게 주려는 사람들을 찍어주는지 모르겠다고. 정말 모르시나요? 그렇다면 진심으로 그들의 고충과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전, 아주 오래 전 예수라는 젊은 사람이 그랬습니다. 옳지 않은 짓을 하는 사람들은 회개하고 다시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은 괜히 주눅들고 죄인이라고 자책하며 살지말고 용기를 내서 직접 하나님께 구하고 용서받고 그러고 살면 된다! 라고...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닌 그들이 예수를 죽이라고, 십자가에 못 밖으라고 부자와 힘센자들의 편을 들었습니다. 세상에 이런 억울한 일이 어디 있나요? 정말 속상하게...
그러나 그런 겁니다. 하루하루 벌어먹고 사는 사람들, 질병을 등에 지고 사는 사람들, 배운 거 별로 없고 눈치보며 평생 산 사람들은 자신감이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정의 신념 자존심 그런 거 정말 거리가 멉니다.
그러나 너무 쉽게 침 뱉고 욕하지는 마세요. 그런 사람이라고 좋은 세상, 고통이 끝나는 날을 바라지 않는 게 아닙니다. 다만 자신이 없고 일주일 뒤 다리 부러지는 생일상보다 단지 당장 오늘 끼니가 더 급하고 필요할 뿐입니다.
끝까지 그런 하찮은 인간의 고통을 이해하신 예수만이 그들을 변화시켰지요. 저들이 몰라서 하는 행동을 용서해달라며, 그래도 사탄에게 넘기지 않고 사랑하고 지키는 일을 계속 하겠노라고...
제게도 그런 분이 있습니다. 아내가 셋째아이를 낳다가 뇌경색이 와서 거의 식물인간(이 표현을 참 싫어하는데 다르게 뭐라고 해야할 지 모르겠어요.) dl 되어버리신 사모님과 십년이 넘도록 사시는 목사님,
가끔 전화 통화를 하면서 아내만 돌보며 우리 인생은 날려버린 억울함과 속상함을 주고 받습니다. 고상하게가 아니고 하나님도 씹고, 아내도 원망하고 처지도 비관하면서요. 그렇다고 위선자니 죄인이니 그런 소리는 하지마세요. 세상에 우리 같지 않아도 다 위선자고 죄인인데 세삼스레 따로 구별할 것 뭐 있나요.
그런데 그 목사님이 욥기를 통해서 절절하게 말하고, 아이들의 소식을 통해서 또 깎고 견디는 이야기를 올리시면 저는 고개를 돌립니다. 아니면 보고도 안 본 척 모른 척 합니다. 한 마디만 하셔도 뒤에, 아래에, 심중에 담긴 마음까지 말보다 먼저 비수가 되어 제 가슴에 찌르는 아픔이 싫어서입니다. 누구보다 잘 알기에 위로의 말을 할 수 있지 않냐구요? 해 주기 전에 내 마음이 먼저 찔려 피가 철철 흐르게 되는 거는 생각 안 해보셨나요?
그래서 다시 놀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목사님은 이런 저런 고통을 안고 가까이로 오는 많은 사람들을 안고 토닥입니다. 저는 끔찍하게 싫어 도망가는 데 말입니다.
그 목사님이 김병년 목사님입니다. 정말 하나님은 목자로 세울 분과 평신도로 머물 사람을 참 잘 구별하십니다. 하나님이 괜히 하나님이 아니신 걸 인정하는 밤입니다.
(그걸 아시는 분이 제게는 왜 이리 혹독하고 견디지 못할 높은 벽을 주시는지 잠깐 의심스럽습니다. 혹시 주무시다가 잠이 덜 깨셔서??...흐흐) — 김병년님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