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가는 길/예수님과 함께 가는 길

여기가 좋사오니! ...안된다구요?

희망으로 2011. 2. 3. 07:48

 

<1>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저 큰 바다보다 깊다.

너 곧 닻줄을 끌러 깊은 데로 저 한가운데 가보라]

 

아무 어려움도 없고 추위나 배고픔도 없는

그런 안전한 곳에서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날마다 기쁜 일만 있고 웃을 일만 생기는

그런 행복한 날들만 계속되면 얼마나 좋을까

 

미운 사람도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도 없고

불쌍한 사람도 없는 세상에 살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데 그곳에 초막을 짓고 천 년 만 년 살자고 하니

안된다고 내려가자고 하신다.

무정하게도 예수님은...

 

내려가야 할 세상은 너무 힘이 드는 곳이다.

춥고 덥고 배고픈 것은 기본이고

위험이 수시로 닥치고 밉고 곱고 울고 웃고...

 

수백 가지 질병 중에 다 피해가기도 불가능하고

수백 번의 재난을 탈 없이 극복하기도 꿈같은 일이다.

그러는 사이 늙고 기운 없어지고 이별들이 상처로 남는다.

 

이것이 세상이다

내려가자고 지목하시는 살아야할 곳이란다.

이곳이 좋사오니!’를 등지고 가야할 곳이란다.

 

어쩌다 그 많은 어려운 재앙들 중에 하나를 만났다

몹쓸 병에 걸린 아내는 물론이고

가족이라는 울타리로 모인 나도 아이들도 호되게 얻어맞았다.

 

검은 구름이 칠흑같이 밝은 하늘을 가리고 덮더니

파도가 세게 몰아치고 비와 우박이 쏟아지고

거센 바람이 좌충우돌로 우리를 때리고 지나간다.

 

우리 가족이 붙잡고 매달린 조각배는

초라한 움막처럼 여기 저기 비새고 찢겨 날라 가

몇 년째 표류중이다.

 

왜 사람들이 고난의 세상을 성난 바다에 비유하는지

가끔씩 몸서리치게 공감을 한다.

바다가 싫다. 폭풍 몰아치고 어두운 바다는 더 싫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더러 그런 바다로 가라신다.

온갖 귀신들을 쓸어 넣고 흉흉하다고 말하는 그 바다로

큰 바다라고 말하시며 그보다 더 큰 은혜의 하나님이라신다.

 

어쩔 수 없이도 아니고

천천히 조금씩도 아니고

얕은 물가도 아니고

! 닻줄을 끌러 깊은 데로 가라신다...

무정하게도!

 

 

<2>

[왜 너 인생은 언제나 거기서 저 큰 바닷물결보고

그 밑 모르는 깊은 바다 속을 한 번 헤아려 안보나]

 

정말 바다는 넓다.

아침과 저녁이 다르고 수시로 변화하는 두려운 곳이다.

깊이는 또 얼마나 깊은지 발이 닿지 않는다.

...그런데 그 바다를 나가라고 하신다.

그것도 한가운데 깊은 데로!

 

지금도 힘에 부치고

잡고 버티는 팔과 손에 힘이 빠져 죽을 것 같은데

더 깊고 먼 곳으로 가라신다.

 

그런데 하나님은 한 걸음 더 나가 야단을 치신다.

눈에 보이는 파도와 넓은 크기만 보고

그 밑을 모르는 바다 속을 짐작할 줄은 모르냐고,

 

생각만으로도 몸이 오싹해진다.

상상만 해도 두려움이 몰려오고 미리 지치는 바다를

깊은 바다 속을 짐작해보라고?

 

그 바다 속엔 무엇이 있을까?

많은 고기들과 바다풀들과 오래된 모래들?

어쩌면 그 속은 고요하고 출렁이는 바람 한 점 없을지도 모른다.

 

인생이란 원래 그렇다.

아니다! 원래는 아니지만 정직하고 욕심 없을 때는 당당했는데

죄를 짓고부터는 스스로 불안해지고 두려워졌다.

 

그래서 벼락만 쳐도 움찔하고

세찬 바람만 불어도 몸을 떨고 숨는다.

그러니 흉흉한 파도치는 바다가 얼마나 두렵게 보일까

마치 내 죄를 심판하는 벌을 받을까 무서워지는가 보다

 

죄 없는 아이들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산 사람들이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보면...

 

 

<3>

[많은 사람이 얕은 물가에서 저 큰 바다가려다가

찰싹거리는 작은 파도보고 마음 약하여 못가네]

 

많은 사람들만 그러는 게 아니다

나도 얕은 물가에서 살고 싶다.

어쩌다 용기를 내어 한 번 부딪쳐보자! 했다가도

찰싹거리는 파도만 보아도 금세 위축이 되어 오그라든다.

 

어쩌랴 눈에 보이는 건 더 믿어지고

피부에 닿는 것은 안 보이는 마음보다 더 확실한데

그러니 그 넘어, 혹은 그 밑에 있는 것을 어찌 볼까

 

모두 떼거리로 모여 얕은 물가에서

부족해진 먹을 것을 놓고 서로 싸우고

좁아터진 자리에서 밀어내며 사는 수밖에...

 

조나단이 쓴 갈매기의 꿈은 특별한 사람이나 꾸는 것

불안과 불평, 괴로움과 갈등이 난무하는 줄 알면서도

얕은 물을 떠나 넓고 깊은 바다 한가운데로 갈 엄두도 못 내며...

 

베드로도 예수님을 보며

그리움 가득안고 달려갈 때는 바다에 빠지지 않았지만

발밑을 보자마자 두려움으로 빠져들었지 않았는가?

우리는 그렇게 다 발밑만 보며 달달 떨면서 살아온 것을...

 

<4>

[자 곧 가거라 이제 곧 가거라 저 큰 은혜 바다 향해

자 곧 네 노를 저어 깊은 데로 가라 망망한 바다로]

 

그래도 가라신다.

그것도 곧! 가라신다.

험한 바다를 은혜 바다라고 하시며!

 

그럴까? 정말 저 큰 바다가 은혜바다일까?

위험하고 고단한 저 바다보다 더 큰 힘이 있을까?

그것도 은혜가~

 

하나님이 이 세상과 하늘과 바다를 지으심을

믿습니다 아멘!이라고 수백번 외쳤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과 바다를 뒤 흔드는 불안과 고통의 힘보다

더 높고 넓고 깊은 능력이 있음을 인정하지 못했다.

그것들을 지으신 분이 계심에도!

당연히 그 분이 더 권리와 힘을 가지시고 사랑이 넘치는 분인데도...

 

세상의 논리는 백성이 임금을 모르고 살 때가 가장 좋다고 한다

있는지 없는지, 필요도 못 느끼고

의식도 못하게 하는 임금이 훌륭한 임금이라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르시다.

그렇게 우리를 온실 속에서 완벽한 보호만 받으며

아무런 면역성도 없어서 허약한 꽃으로 키우시기를 원치 않으셨다.

비록 죄를 선택할 위험을 안고도 자유를 주셨다.

자기를 닮기를 바라신 아버지가 자기가 가진 자유를 왜 안주겠나?

 

아무 감정도 기쁨도 모르는 로봇을 만들기보다는

선택과 고통을 같이 누리고 감사와 회개를 할 줄 아는 영혼을 주셨다

그래서 비록 고난과 심한 괴로움을 겪을지라도!

 

그러니 높은 산에서 초막을 짓고 사는 길을 버리셨고

얕은 물가에서 안전하지만

살찐 갈매기처럼 뭉개고 살기를 바라지 않으셨다.

 

자 곧 가거라!

이제 곧 가거라!

그것도 작은 노를 손으로 저어가는 고통과 수고를 다 하면서

저 깊은 바다 망망한 바다로!

그 바다를 덮고 감싸고 있는 은혜의 하나님이 함께 있는 곳으로!

 

<5>

[언덕을 떠나서 창파에 배 띄워

내 주 예수 은혜의 바다로 네 맘껏 저어가라]

 

언덕을 떠나라고 하신다.

바람도 막아주고 햇빛도 따뜻한 언덕을!

기대고 의지하며 살던 여러 언덕을 다 떠나라신다.

 

통장의 잔고에 기대던 언덕도 떠나고

지식 많은 의사에게 병 고쳐달라고 기대던 언덕도 떠나고

형제 친척이라는 핏줄로 기대던 언덕도 떠나라신다.

 

모진 비바람 파도에도 불구하고 배를 띄우고

내 주 예수가 걸어가신 바다로 가라신다.

발밑만 보지 말고 고개들어 예수님 얼굴만 보면서

구름 위 햇빛으로 365일 계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가라신다.

 

큰 모타를 달거나

멋진 돗을 달지도 못했지만

두 팔로 작은 노를 저어가며 가라신다.

얼핏 말도 안 되는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 같지만

말씀으로도 세상 천지를 만드신 분이 하시는 명령이다.

위로다.

약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