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투병일기

100, 900, 2700, 7000, 아내를 씻기며...

희망으로 2011. 1. 15. 20:47

-100
-900
-2700
-7000

 

이게 무슨 숫자인지 궁금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토요일
집사람 목욕을 시키는 날입니다.
자주 씻기기도 힘들고 더 미룰 수도 없어
평균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목욕을 시킵니다.
완전마비가 아닌 환자들은 간이 샤워실에서
의자를 놓고 앉아서 씻을 수 있어서 이틀에 한 번
어떤 부지런한 가족은 날마다 샤워를 해주기도 합니다.
집사람은 사지마비라 침대목욕밖에 못합니다.

어떤 병원은 그나마 없어서 침대에 비닐을 깔고 물을 떠 날라서
침상목욕을 하기도 했습니다.
한국에서 가장 큰 국립암센터도 침대목욕시설이 없어서
3개월 입원해 있는 동안 침상에서 목욕을 했습니다.
하기사 한국 최고 시설을 자랑하는 강남 삼성병원도
4번이나 입원해 있는 동안 침상목욕을 했습니다.
목욕용 비닐침대도 그만한 욕실도 없습니다.
그래도 그곳은 물차를 갖고 간호조무사들이 와서 해주니
보호자들은 돕기만 하면 되어서 다행이었지만...

 

위에 100 이란 숫자는 제가 아내를 직접 씻긴 숫자입니다.
2년 반 정도 입원해 있는 동안 1년에 52주씩 두 번 반이 지날 동안
아마도 그 정도는 제가 혼자 목욕을 시켰습니다.


오늘은 목욕을 씻기면서 속으로 ‘감사합니다!’를 몇 번이나 했습니다.
지난 달과 최근 장염과 방광염증이 재발해서 항생제와 수액을 줄줄 달고 있느라
목욕도 제때 해줄 수가 없었습니다.
머리야 물없이 쓰는 샴푸로 침대에 누워서도 해줄 수 있었지만
목욕은 그리 간단하지도 않은데다 체력이 떨어져서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목욕을 할 동안 버틸 정도로 회복되고
주사들을 달고 있지 않다는 그 하나도 감사했습니다.

 

“당신은 행복한 줄 알아야 돼!“
“왜?”
“세상에 남편들이 아내 목욕을 나처럼 많이 해준 사람이
흔하지 않을거야!
너무 아파도 못해주고 많이 아프지 않아도 안해줄테니!“
“...그러네!”
“언젠가는 이 목욕도 안해줄 날이 오겠지?”
“......”
“나빠지거나 힘들어서 못할 수도 있고
좋아져서 혼자 힘으로 할 수도 있을테니!“

“그랬음 좋겠다...“
“그때되면 이렇게 당신 목욕시킨 날들이 추억이 되어 떠오를거야.
나도 나쁘지 않네 당신 사랑하는 추억을 가질 수 있어서!“

 

그렇게 오늘도 땀 흘리며 아내를 씻기고 지치고 배도 고파서
병실로 돌아왔습니다.

 

그 아래 900은 병원에 입원해서 보낸 날짜가 그 정도 될 것 같습니다.
처음 하루는 너무 무서웠고
다음 열흘은 많이 힘들었고
다음 일년은 울고 씨름하며 보냈고
그 다음 몇 백일은 하나님과 물어보고 감사하고
다시 실망하고 좌절도 하고 그러면서 보낸 날들입니다.
저 숫자에 얼마쯤을 더하면 마라톤 선수가 살았다! 싶은
골인테이프를 밀치고 달리기가 끝날까요?
아무도 모르는 긴 마라톤이...

 

다음 2700은 그 900일 동안 밥 떠먹이고
그 숫자만큼 양치질 시키고 식후 30분에 약 먹인 숫자입니다.
처음에는 서툴고 팔이 아프던 일이
이제는 익숙해지고 해치우는 수준까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숙달된 일들을 어디다 사용하고 자랑할 수 있을까요?
부디 그만하고 다시 서투르고 낮설어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 다음 7000은 정확하지도 않은 숫자입니다.
그저 대충 헤아려 본 숫자입니다.
하루에 두세 번 정도씩 받아낸 대 소변 횟수입니다.
그냥 화장실을 가서 볼일을 본 숫자가 아니고
넬라톤이라는 도구로 받아낸 소변과
장갑을 끼고 좌약을 넣고 수지자극을 해서 받아낸 큰 일 횟수입니다.
정말 이 부분이 회복이 안 되면 집으로 돌아가던 병원 생활을 하던
혼자 힘으로는 하루도 보낼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두 세 시간마다 손길을 보태야하는 생활은 많은 비용과
자존심을 꺾고 자립을 막는 벽입니다.


단지 숫자들일 뿐인 몇 개를 떠올리면서
그 숫자에 얽힌 무거움들을 돌아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유를 누리며 살라고 하셨는데
누가 우리의 발목을 잡는 것일까요?

 

이재철목사님의 ‘사도행전속으로’ 라는 책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선택이란 버림의 결과입니다!’ 라는...
무엇인가를 선택한다는 것은 무엇을 버리는 말과 다름없다는 것!
가장 값진 것을 선택하기 위하여 돈이든 마음이든,
혹은 두 번째 세 번째 소중한 것들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만한 값이 있거나 가장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하셔서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세상 사람이 모두 하나님께로 나오지 않는 현실을 감안하면
우리는 하나님께 선택받은 것이 분명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능력이나 우리의 지식으로 산 것이 아니고
순전히 하나님이 거저 손 내밀어 부르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란 존재가 좀 답답할 만큼 문제가 있습니다.
대부분 건강하고 배부르고 넉넉하면 불러도 시큰둥하고
별로 감사하지도 않습니다.
형편이 좋아도 심령이 가난하면 또 달라지지만...
그래서 꼭 어디가 많이 아프거나 사업이 실패하거나
큰 아픔을 겪고 고난 중에 있을 때라야 부르심을 반깁니다.

‘나 하나님 없어도 잘 살 수 있어!’

이러다가 끝 날에 통곡하고 허무해서 몸부림치는 것보다
고난과 아픔 중에 기어서라도 하나님의 부름에 가까이 가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바울도 가시를 감사로 여겼습니다.
부족하고 모자란 것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결국은 하나님과 사람에게도
많은 칭찬을 듣게 되나 봅니다.


그런데 누가 스스로 고난과 아픔을 자청해서 하겠습니까?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견딜만한,
혹은 더 크더라도 고통을 통하여 부르심을 감사해야할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그래서 아내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당신은 힘들고 괴롭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감사해야 할지도 몰라,
24시간 당신과 내가 함께 남은 시간을 보내면서
많은 것들을 같이 나누게 해주시고,
나중에 영원히 누릴 좋은 것들을 받을 자격을 갖추게 하시니
우리가 무슨 공로나 자격으로 이런 복을 받겠어요.
어려움을 주셔서 우리를 부르짖게 하시고 가까이 부르시는거지!
그래서 고난이 복이요 시련을 받으면 상이 큰 줄 알고 기뻐하라! 그러셨겠지“

 

그렇습니다.
주께서 사랑하는 자에게 고난을 주셔서 매달리게 하시고
돌아보며 회개하게 하시니 감사할 일이지요.
잠시 힘주고 땅땅거리다 영원한 불행에 떨어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이 시간들을 잘 참고 견뎌서 하나님이 주시는 뜻과 은총을
깨달을 때마다 기쁨이요 감동으로 살게 하시니 또 고맙지요.

바라는 것은 부디 고비가 올때마다,
심신이 지칠 때마다 예수님의 먼저 견디신 행적을 기억하며
그 길을 죽으면서도 다라가신 믿음의 선배들을 잊지 말고 죽는 것입니다.
가장 비참한 배교만 하지 않도록 성령님께서 도와주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