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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몰랐다 ... '감사'의 기준을

희망으로 2021. 7. 26. 09:57

<나는 몰랐다... ‘감사’의 기준을>

 

숱하게 많은 밤을 잠들지 못하고 뒤척였다. 그만큼 많은 날을 낮에도 근심에 치여 두려워하고 그렇게 생존해가야하는 내 생이 서럽기도 했다. 어느 날 잠 못자고 책 읽어주는 유튜브를 듣다가 자꾸 이상한 질문이 속에서 나를 치받았다. 그런가? 아닌데... 맞나? 그러면서.

 

‘두려움은 없다’ 라는 구절이 있었다. 자기계발 심리치료 분야의 세계적으로 유명한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어느 분의 책 소제목이었다. 제목만이 아니라 내용도 그랬다 사람들이 시달리고 불행해지는 두려움은 모두 실체가 없는 마음속의 헛 그림자고 신기루 일 뿐이다. 모든 두려움은 마음속의 문제일 뿐, 실체도 없으니 마음만 먹으면 자유로워지고 늘 행복할 수 있다고 내내 말했다.

 

요즘 이와 비슷한 논조의 명상 수필 책과 강의가 범람이라고 할 정도로 많다. 생각, 감정, 마음 하나 바꾸면 세상의 온갖 미움과 두려움 근심이 다 아무 것도 아닌게 되고 갈등도 대립도 싹 사라져 행복해진다는 식으로. 그렇게 도를 터득한 사람처럼 생각만 하면 인생이 봄날 꽃놀이 처럼 화사해지고 늘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정말 그럴까? 생각 감정 하나 바꾸면 만사가 아무 문제가 없어질까? 일부분은 맞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위로가 되고 해결책이 되기도하니 틀린 말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경우나  모든 사람을 다 품을 수 있는 정답도 또한 아니다. 또 그러다보니 그 밝은 면에 그림자도 생긴다. 책처럼 그렇게 안되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더 괴로워진다. 왜 나는 미련하고 나약하며 원하는대로 마음컨트롤이 안될까? 자신을 탓하면서 자신감을 잃고 더 위축되기도 한다. 나도 그랬다. 

 

‘두려움은 (분명) 있다’ 심리적으로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두려움의 감정을 감당하지 못해 삶이 더 꼬이고 어려워지고 파국을 맞는 현상도 실재로 있다. 만약 두려움이 단지 감정의 문제이기만 하다면 설사 다스리지 못해도 구체적으로 현실에 더 나쁜 일들이 발생하지 않아야 한다. 그렇지 않은가? 단지 심리적 발생일 뿐이라면 결과도 심리적 현상만으로 존재해야 한다.  그러나 그 심리적 문제가 현실 일상에 구체적으로 관계를 깨거나 더러 심한 불행을 일으킨다면 그건 애당초 헛그림자만은 아니었다. 그건 내 마음 하나 다스리기만 한다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나 다른 일의 문제가 스르르 없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귀신은 있을까? 없을까? 악한 영은 있을까? 없을까? 불행은 단지 감정의 차원에서만 생기는 어이없는 신기루일까? 나는 귀신도 있고 악한 영도 있고 실재로 그것들에서 시작되는 (당하는 입장에서는 억울한 일방적)불행도 있다고 보게 되었다. 나도 이전에는 나만 정신차리면 그런 감정에 끌려다니는 일은 없을거라 자신감도 넘쳤고 확신도 있었다. 남의 탓을 할 필요가 없다는 투로. 비록 가난하거나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신앙의 평정심을 유지하면 내 속의 평화나 감사는 늘 깊은 호수처럼 변치 않을거라 믿었다. 절대 실체없는 유령의 속삭임 따위에 좌절하고 그 존재를 두려워 않을거라며.

 

그러나...나는 몰랐다. 두려움과 불행과 절망따위는 단지 마음만의 신기루가 아니고 실체임을. 나는 그런 일은 마음 약하고 신념이 없고 잘 흔들리는 게으른 사람들에게나 찾아오는 속임수라고 단정하고 주장했다. 아내가 불치병에 걸리고 빠른 속도로 재산과 심지어 아이들까지 포함한 가정이 통째로 무너졌다. 그때문에 잠못자는 불면과 근심으로 뼈가 마르는 현실을 겪기 전까지는 그랬다. 좋은 생각으로 흔들리지 않으면 헛 것에 미혹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으니까...

 

그러니 나는 몰랐던 것이다. 그렇게 당해보지 않은 사람의 오만한 자신감은 종종 나 자신을 포함해 남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다. 가장 많이 시달린 피해자는 가장 가까이 사는 아내였고 아이들이었다. 남 때문에, 어떤 일 때문에... 그런 식으로 내마음 바깥의 이유로 좌절이나 분노를 표시하는 말을 도무지 못하게 하였다. 오히려 남탓하며 불면, 두려움, 근심에 시달리며 괴로움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믿음이 없고 심지가 약해빠져서 그런다고 잘난 충고를 하기도 했다.

 

신앙을 바탕으로 거의 강요에 가까운 무자비한 충고를 쏟아 놓는 종교인들이 있는데 이전에는 나도 비슷했다. 신앙이 아니라도 명상과 철학의 논리를 펴면서 심리적 감상적 세뇌를 강요하는 많은 강연자와 자기계발류 수필을 쓰는 사람들도 그런 입장을 가진다. 고상하게 유유자적 살지 못해서 번뇌하는 사람들을 향해 자기 자랑질도 한다. 마치 무릉도원에서 차를 마시며 꽃밭을 거니는 속세를 떠난 사람처럼 그게 가능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당하며 살아보고, 또 다른 사람들이 경험하는 고통의 삶을 지켜보니 두려움도 실체고 나를 흔들며 내 인생을 휘젖는 귀신과 악한 영도 실재로 있다는 고백을 하게 되었다. 불행도 두려움도 갈등도 내가 아무리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써도 객관적으로도 발생하고 나를 힘들게 만드는 분명한 현실로 존재함을 알았다. 결코 명상이나 고상한 논리, 화려한 설교를 계속 듣기만 하면 다 사라지는 헛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다만 우리를 괴롭히는 그 모든 실체들이 존재함에도 우리는 살아 간다는 것이다.  때로는 견디며 어떤 문제는 해결하며, 때로는 속수무책으로 당하며 울고 비명을 지르면서 살뿐이다.

 

흔히 말하는 ‘행복’은 늘 감사의 심정이 내 안에 머물 경우에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감사란 당연히 두려움 근심 괴로움 외로움 뭐 이런 상태가 아닌 좋은 날에만 드리는 것이라고 알았다. 그러지 못하고 미움과 분노, 원망 좌절이 우글거리고 갈등에 휘말릴때면 신앙심이 모자라고 내적 수련이 모자라 그러는 것이라고 자책했다. 신을 제대로 믿고 자신을 세뇌하면 싹 사라질 나쁜 속임수 감정들인데 헛 것에 놀아나는 미련함이라고.

 

그러나 몰랐던 것을 이제는 배운다. 신이 존재하는 만큼 확실하게 악과 불행과 어두운 감정들도 실체라는 것을. 그뿐아니라 우리 마음과 우리 일상생활에 생생하게 들락거리는 존재라는 것을. ‘나는 행복하다 나는 행복하다 저건 껍데기다 저건 껍데기다!’ 반복한다고 없어지는 신기루가 아니라는 것도. 사람들 중에는 그런 식으로는 털어내지 못하는 선천적 후천적 약자도 무지 많고 그러기에는 너무 큰 슬픔과 불행과 고난도 있다. 그 정도로는 끄덕도 안하는 만만치 않은 악한 상대도, 관계도 분명 있다는 것도.

 

감사란 어떤 일의 결과로 발생하는 감정이다. 시간적으로 나중에 따라오고 평가로는 평균보다 잘 풀리거나 성공할 경우다. 그래서 늘 감사하려면 늘 성공하고 늘 행복하고 늘 평안해야만 한다. 일생동안 아무 두려움도 근심도 없어야 한다.  최소한 그렇다고 자신을 합리화라도 하며 살아야 가능하다. 현실은 모든 좋은 일과 나쁜 일이 교대로 다 일어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다. 범사는 분명 좋은 일만 계속되는 것이 아닌데 감사를 하라고 하면 감사의 기준은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그렇다면 감사는 일의 나중에, 성공할 때만 하는 결과적 감정이 아니라 처음과 중간과 일상에 가져야하고 그건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다. 

 

결국 얼마 이상을 손에 쥐면 감사를 하는 나의 기준은 잘못된 것이었다. 한번도 눈물 흘릴 불행이 없을 때만 감사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나는 뭘 몰랐던 사람이다. 비정한 현실을 외면하기 위해 한쪽 눈을 감고 말이나 관념의 유희로 생기는 답례가 아니었다. 감사는 두려움에 빠져 살때도 품고 갖가지 고단한 일과 예상못한 불행으로 고통중에도 드림으로 오히려 갑옷이 되고 진통제가 되는 은총이었다. 두려움과 고통을 인정하면서도 그럴 때도 생존을 바라며 기원하는 감정, 그것이 진짜 감사라는 것. 감사는 ‘슬픔과 두려움은 허구다! 근심은 없다 없다 없다!’ 그런 말의 테크닉이나 감상적 세뇌로 얻어지는 신기루가 아니고 절절한 현실의 삶을 인정하며 고통중에 드려지는 생생한 치유도구로 주어진 것이었다. 

 

오늘도 나는 배운다. 내가 몰랐던 감사의 기준에 대해 새로...

 

 

2021.0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