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몰랐다... 생명의 주인이 따로 있음을>
여러 날을 몸살 통증에 시달리면서 동시에 아내의 코로나 백신 접종 후유증을 곁에서 돌보았다. 그러던 중 바로 옆 병실의 간병인 아주머니 한 분이 아침을 먹고 난 직후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졌다. 링거 몇 병과 소변주머니, 산소통을 끌면서 긴급하게 큰응급실로 실려가는 상황을 지켜보아야 했다. 목에서 꾸르륵 꾸르륵 거품 같은 소리를 듣는데 많이 놀랐다. 이어 생명회복이 거의 어렵다는 뒷소식까지 들었다. 하루에도 몇번이나 얼굴을 마주치고 보던 분, 중국에 딸 하나만 있는 60세 언저리 이 아주머니에게 불과 5분 사이에 닥친 이 충격적인 비극은 믿어지지 않았다. 누구도 예상을 못했을 일... 늘 이런 식이다. 사람들에게 닥치는 예고없는 사고, 질병으로 모든 삶이 무너지는 경우들이 그랬다. 의문 하나가 꼬리를 길게 물고 여러 생각으로 이어졌다. ‘도대체 내 생명이 내것이기는 한걸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내일은...’ 혹은 ‘미래를 위해!’ 라는 꿈 하나를 붙들고 허리띠를 조이며 참고 사는가? 많은 부모들이 자신들도 힘든 생활을 버티며 자녀들에게도 지금은 못해주지만 나중에 채워줄게 하며 달래고 입을 다물게 한다. 먹고 싶은 거 다먹고 언제 돈을 버냐고, 하고 싶은거 다하면 집 장만을 못한다며... 지금은 오늘은 참고 견디라 몰아세운다. 그놈의 내일, 미래는 정말 꼭 보장받은 것처럼 말한다. 정말 그럴까? ‘그날이 오기는 하고 그날까지 부모도 자녀도 안전하게 살아남는다는 보장은 있는 걸까?’
사람들은 참 용감하다.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은 그걸 주구장창 누리겠다는 당당함으로 살고, 반대로 아주 없는 사람들은 그 긴 날동안 내내 궁핍하고 시달릴 걱정에 미리 좌절하고 탄식을 한다. 양쪽이 공통점이 있다. 다 자기들이 오래 산다는 믿음 없이는 안 가질 태도다. 성경에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부자가 추수한 재물을 쌓아놓고 이제는 배 두드리며 살아야지 할 때 하나님은 가소롭다고 경고를 한다. ‘오늘밤 내가 너 생명을 가져가면 그 재산 다 누구것이 될까?’라고. 이 대상에서 예외가 될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계속 그런 생각을 가지는 걸 보면 정말 사람들은 용감하다. ‘도대체 생명의 유효기간을 과연 누가 보장해주는걸까?’
안타깝게도 반대로 가난과 불행에 치어 고통스럽게 사는 사람들도 비슷하다. 그 고단한 삶이 얼마나 지속될지 사실은 아무도 모른다. 물론 행복한 날보다 슬픈 날, 힘든 날은 몇배로 시간이 길게 느껴지기도 하니까 더 그럴거다. 그래도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어느 날 끝이 나거나 상황이 바뀔지는. 그럼에도 감당이 어려운 감정은 미리 비극을 불러오기도 한다. 무리한 좌절감으로 파탄이나 자살 등 절망적인 행동으로... 남은 평생을 불행하게 살것이 분명하지 않다면 그럴 필요가 없는 데도. 그 수치스러운 상태로 평생을 살거라는 근거가 있을까? 그러고보면 또 의문이 생긴다. ‘과연 생명의 주인은 누구일까?’
아는 분이 이런 말을 했다. ‘나부터 기쁘게 살아야 남을 기쁘게 해줄 수 있다’라고. 트집을 잡자면 내맘대로 나만을 위해 이기적으로 살아도 되는 말로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진심으로 듣는다면 그 말에 많은 공감을 하게 된다. 내가 기쁘게 살지 못하는 사람이 남을 기쁘게 해주는 것은 억지 춘향이거나 장님 코끼리 더듬기다. 아니면 뭔가 따로 목적이 있어서 하는 행동일 수도 있다. 나도 모르는 방법, 못하는 이론을 남에게 권하는 마음은 틀렸거나 잘못된 것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결심한다. (자식이나 부모, 이웃을 포함해) 남을 위해 살지 못해도 나부터 기쁘게 살자! 그리고 내일이나 미래를 위해 오늘을 희생하지말고 지금부터 기쁘게 살자! 라고...
성경에서 하나님의 관심은 늘 오늘, 지금, 여기부터 였다. 그래서 ‘내일 일은 근심하지말라!’ 또 ‘오늘 필요한 양식만 기도하고 하루치 만나만 챙겨라!’ 그랬다. 마지막 남은 음식으로 아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고 죽으려던 과부에게 그랬다. ‘내일 먹을 양식도 남기지 않고 탁탁 털어 엘리야를 대접하라!’ 고... 들어 가면 죽을 것이 예상되는 예루살렘으로 예수를 들어가게 한 일도 그랬고, 아무 준비도 보장도 없는 데도 아브람에게 아내와 자식을 데리고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가라고 한 일도 그랬다. 내일이나 다음을 위해 오늘을 포기하거나 미루지 않도록 했다. 죽은 이들을 장사하려는 가족들에게도 죽은 이는 죽은 이들에게 맡기고 지금 내게로 오라! 그러셨다. 내일 굶거나 죽거나 그런 근심은 지금 오늘 사람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의미가 아닐까?
에녹 한 사람을 제외하고 모든 사람은 한명도 예외없이 죽는다. 심지어 아담도 예수님조차도. 그렇게 모두가 통과하는 죽음은 전 인류에게 주어진 공평한 통과문이었다. 어떤 부자도 가난한 이도, 힘이 많거나 적거나 건강하거나 아픈 사람이거나 차별이 없다. 모두 빈 몸으로 다 같은 처지로 그 끝에 도착하고 그 문을 지나가게 하셨다. 그러나 아무도 그 날을 미리 알 수 없고 그날까지 산다는 귀뜸이나 보장도 없는 생존의 세월을 지나...
나는 몰랐다. 그저 한평생 무지 오래 살것으로 당연히 알았다. 그러니 이것 저것 하고 싶은 일도 많았고 많이 벌고 높은 자리까지 오르고 싶은 야심을 품었다. 반대로 고민이 생기면 평생 갈 줄 알았고 실재로 불행이 닥치자 난 죽었다! 이제 평생 혹독하게 살거라는 절망감이 온통 나를 짖눌렀다. 이러나 저러나 안죽을 사람처럼 어리석은 단정에 빠졌다. 이제 조금 알게 된 것은 죽음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예약되어 있지만 모두가 잊고 산다는 것을. 그래서 숱한 착오와 절망이 그로부터 생겨난다는 것을. 아무도 유효기간을 모르는 생명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도. 아픈 깨달음은 그 착오나 단정적 좌절때문에 서로 유익하고 아름답게 살 수도 있는 날을 허비하면서 간다는 것을...
‘하나님, 오늘, 지금을 날마다 기쁘고 평안하게 살게 해주세요! 내일이 오지 않아도 원망하지 않도록 딱 하루에 필요한 만큼의 욕심과 기대만 가지고 살게 해주세요! 아멘’
* 이미지는 마지막 음식을 엘리야에게 대접한 사르밧 과부.
이후 음식이 끊어지지 않는 기적과 죽었던 아들이 다시 살아나는 은총을 입었다.
2021.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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