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크리스마스는 너무 추웠다.>
청년 시절, 그 때는 많은 사람들이 살기가 쉽지 않았다.
많이 배우지 못한 젊은 사람들에게는 좋은 직장도 얻을 수 없고
집안 부모가 넉넉하지 않은 객지생활하는 청년들은 더욱 그랬다.
그저 쉽게 구하는 직장이란 쉽게 없어지거나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그 때 신문 공고를 보고 구한 직장도 그랬다.
영어 월간지와 녹음 테이프를 배달하고 매달 월부로 수금도 하는 일
이름은 관리직이지만 택배와 수금사원을 합친 몸으로 사는 노동이었다.
그런데... 운영이 잘 안되면서 월급이 쪼개서 받으며 조금씩 밀리더니
두 달, 세달 쯤 밀렸을 때 안팎으로 독촉에 시달리던 사장이 사라졌다.
핸드폰도 없던 그 시절 잠적해버린 사장을 찾기란 정말 쉽지 않았다.
모든 일이 정지된 사무실에서 밀린 월급을 받으려 일주일쯤 버티던 중
직장 동료 서너명이 간신히 알아낸 사장이 있는 곳을 급습했다.
그러나... 난감해졌다.
체불 석달째 도망가버린 사장을 찾았는데... 안 찾은 것만 못했다.
어둑한 단칸방을 들어서자 그 방에는 대여섯살 서너살 두 꽤재재한 꼬마가
구석에서 나무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었고 더 난감한 것은
막 나은 갖난아기 울음소리가 드문 드문 방을 채우는 상황이었다.
사장은 어디를 나갔는지 없었고 부인만 산후조리도 못하고 끙끙 앓고 있었다.
지금이라면 없을 1970년대 후반 어디서나 흔할 모습이기도 했다.
문밖에 여기저기 앉아 사장을 기다리다 우리는 주머니 돈을 털었다.
누가 먼저 말을 꺼냈는지 기억은 안나지만 그 돈으로 가게에서 미역을 사왔다.
그러던 중 사장이 돌아왔다.
초췌하고 머리숱이 더 없어져버린 사장은 거의 며칠 굶은 사람처럼 힘이 없었다.
멱살을 쥐고 주머니를 뒤져 가진 돈 전부를 빼앗아 가기라도 할 참이었는데
우리는 오히려 몇 푼 없는 각자 주머니를 털고 아이들 손에 과자를 쥐어주고
그 길로 돌아서 왔다. 부디 기운내고 가족들을 잘 돌보시라고 말 남기고...
사무실에서 다시 의논을 한 우리는 모두 밀린 월급을 포기하기로 결정하고
다들 각자 다시 직장을 찾아보기로 하고 헤어졌다.
자취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길가에 노래소리가 울려 나왔다.
성탄절이 가까운 날이었지만 당시는 교회를 다니지 않던 때라 별 생각이 없었다.
돈 있고 시간 많은 사람들이 즐기고 연인들이 신나는 계절이지만
나같은 벼랑끝에 선 사람에게는 도무지 씁쓸하기만 한 우울한 계절이었다.
손에는 케익이나 선물쇼핑백을 들고 바삐들 이리저리 가는 물결은 더 서러웠다.
하늘에서는 잔뜩 흐린 구름이 해를 가리고 금방 눈발이라도 날릴 날씨였다.
한시간 반을 넘게 걸려 돌아온 서울의 변두리 자취방이 있는 동네
방문을 열자 꽁꽁 얼은 냉기가 확 나를 덮치듯 반겼다.
사람 체온을 무지 기다렸다는 듯, 방이 사람 덕을 보자는 듯.
두달 째 밀린 방세로 주인 할머니 눈치를 보는 것에 비하면
떨어진 연탄과 냉골 얼음장은 차라리 참을만 했다.
옷을 입은 채 양말도 벗지 못하고 이불을 다 꺼내 깔고 덮어도 따뜻하지 않았다
잠이 쉽게 오지 않았다. 춥고 배고프고 외롭고...
그 겨울 크리스마스 전후의 서러운 기억들이 가끔씩 몸서리치게 떠오른다.
그 해 크리스마스는 유난히 추웠고 그 겨울은 너무 서러웠다.
그 사장님과 가족들, 그 때 태어났던 아이는 잘 살고 있을까?
나는 다행히도 지금은 따뜻한 곳에서 배고프지 않고 외롭지 않고 잘지내는데...
어떻게 이렇게 긴 세월을 잘 살아 넘기고 좋아졌을까?
짧게 하루, 한 달을 생각하면 늘 힘들고 불안하게만 사는 것 같은데
아주 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보니 내게 내려온 복이 넘치고 감사하다.
해마다 크리스마스와 새해는 오고 그동안 겨울은 분명 진행되지만
이제는 그때 그 해처럼 난감하고 벼랑에 서지는 않는다.
다만 인내심과 감사가 줄어진 자리를 믿음없는 근심이 채울 뿐....
* 이 그림은 영국 런던 디킨스 하우스 박물관에 전시된 1834년 제작 최초의 크리스마스카드
거의 200년 가까이 지나가지만 크리스마스의 두 세계 풍경은 여전해 보인다.
2020.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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