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저것 끄적/길을 가는 사람...

견디며 사는 거 재미없지만

희망으로 2018. 3. 9. 15:40

<견디며 산다는 거, 참 재미없지만...>

“내 첫 번째 소원은...”

이틀에 걸친 국립암센터 병원 검사와 진료를 마치고 내려오는 길 차 안에서 그렇게 말을 꺼냈습니다. 많이 힘들었습니다. 출퇴근 하듯 숙소와 병원을 오갔고, 수납하고 진료 시간을 기다리고 하는 반복들이. 몸이 고단하면 어김없이 비염이 심해져서 연신 재채기와 콧물을 흘립니다. 온통 옷이 땀으로 젖을 정도로 힘듭니다, 입은 헐어서 먹을 때면 불편했습니다. 그럼에도 운전을 해야 해서 약을 먹을 수도 없었습니다,

“부디 당신을 먼저 보내고 일 년만 나에게 시간을 주면 좋겠어...”

아내를 두고 내가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되는 경우를 떠올릴 때마다 늘 무겁고 남은 일을 감당하는 것이 끔찍하게 느껴졌습니다. 대소변 마비로 인해 하루도 손을 놓을 수 없는 상태의 중증 아내를 돌보고 병원을 데리고 다니는 일, 그 비용을 마련하는 마음고생 등,

10 여년 아내를 간병하는 동안 밤을 온전히 비운 것은 딱 두 번입니다. 딸아이 응급실에 갔을 때와 대학입학면접으로 지방에서 자야 했을 때, 그 2일 밖에 곁을 비우지 않은 생활에서 오는 누적된 갑갑함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내가 먼저 가고 일 년 정도는 홀가분하게 신세진 분들에게 감사도 하고 홀로 여행도 하고 원망을 다 털고 삶을 마치면 정말 좋겠다 싶습니다.

“만약 그 소원이 안 된다면 두 번째는 같은 날 사고로 가던지, 강제로 동반해서 떠나는 거, 당신 혼자 두고 내가 먼저 가는 거 정말 최악이니까...”

하지만 아내는 그런 나를 말렸습니다. 아니, 근심의 무게를 덜어주는 말을 했습니다.

“괜찮아, 혼자 남겨지면 분명 급속히 빠르게 악화되고, 당신이 돌봐주던 연명치료가 없어지면 오래는 못살겠지. 설사 그렇더라도 혼자 주어진 생명 마치는 날까지 어디서 어떻게든 살고 갈테니 강제로 데려갈 걱정 하지 마. 나 때문에 죄짓는 거 안 돼. 그 길이 아이들에게도 슬픔을 주지 않는 방법 아닐까?”

어깨에 올려 진 무거운 짐이 절반쯤은 휙! 내려지는 홀가분함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고마웠습니다. 그렇게 말해주니 얼마나 마음이 편해지는지 고맙다는 말을 두 번 세 번 아내에게 했습니다. 내게 그 고민은 짐 이상의 고통이고 원망이었습니다. 사는 걸 힘들게 하시면 죽은 뒤라도 평안을 주셔야지 하나님이 너무 하다는 원망이 늘 따라올 정도였습니다.

견디며 산다는 거, 참 재미없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지금 주어진 부족함과 불편, 질병의 고통, 가난을 견디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마 거의가 다 그럴 지도 모릅니다. 무려 26년을 치매 아내를 돌보다 자신의 건강이 나빠져 끝내 아내와 함께 차를 타고 저수지로 동반 자살한 할아버지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남의 일 같지 않아 오래 힘들었습니다. 나아지지 않는 미래를 안고 견디며 산다는 거, 그 생활에 무슨 재미나 희망이 있었을까 공감하면서요.

‘정답 없는 삶속에서 신학하기 - 한나의 아이’ 책을 냈고, 정신병을 앓는 아내와 20여년을 전쟁처럼 시름하며 견디던 미국의 저명한 신학자 스탠리 하우어워스도 결국은 아내의 요구에 이혼해주고 자살로 마감한 아내를 지켜봐야만 했습니다. 삶은 대부분은 우리 손이 닿을 수 없는 어떤 흐름에 실려 가고, 행복보다는 고통과 슬픔을 끝으로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만 상황에 지지 않는 믿음과 고백이 빛이 되어 어둠을 물리칠 뿐입니다.

예전 수도원 공동체 공부 차 방문했던 독일의 개신교 여성수도회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정갈스럽게 꾸며진 작은 식당에 그보다 더 정갈한 음식을 대접받으며 들은 놀라운 이야기는 오래토록 삶에 짓눌릴 때 내게 힘이 되곤 했습니다. 그 수도원의 식탁과 음식이 방문한 많은 이들과 수도자들을 감동시키는 것은 30년 가까이 주방을 지키며 그 일이 하나님께 바치는 자기 헌신이라고 믿는 자매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바깥세상과 사람과 문화를 누리고 싶을까요? 지금보다 30년은 더 이전이면 차고 넘치는 에너지를 가진 젊은 시절이었을 테니. 그럼에도 자진하여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고 식탁을 꾸미고 음식을 대접하는 일을 수도자의 수련처럼 살았다는 그 개신교 수녀님의 믿음에 존경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 분은 누가 억지로 시킨 일을 견디며 사는 삶이 아니었을 겁니다. 견디는 마음으로는 그 결과물이 그렇게 아름답고 정갈 할 수가 없습니다.

또 한 분의 삶이 생각납니다. ‘빗자루 수사’로 불리기도 하는 흔치 않은 카톨릭의 흑인성자 성 마르띠노입니다.

그는 흑인이지만 인디언 혈통을 가졌을지도 모르는 파나마의 해방된 여자 노예와 페루 리마의 스페인 귀족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였습니다. 그는 자기 어머니의 모습과 검은 피부를 물려받았습니다. 이것은 그의 아버지에게는 큰 불만이었기에 8년이나 뒤에 자기 아들로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여동생이 태어나자 가정을 버렸기 때문에 마르띠노는 가난 속에서 컸으며 리마 사회의 하류층에 빠져들었습니다. 그 환경들은 결코 그가 스스로 원한 것이 아닌 삶들이었습니다.

그가 15세가 되었을 때 리마에 있는 도미니꼬 수도원에 자기 자신을 바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자기가 태어난 것은 완전히 이것 때문이라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제도 노동수사도 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수도원의 심부름꾼이 되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를 제외하고, 누구에게도 이 일은 하찮은 것이리라. 마르띠노는 그렇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흑인으로 태어났기에 버림받는 인종들을 끌어안았고, 사생아로 외면당했기에 불행한 사람들을 더 이해하고 돕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많은 평범하고 악조건인 천한 환경들로 인하여 오히려 주님을 바로 받아들이고 한없이 감사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부자나 불행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깨닫기 쉽지 않은 경험을 일찍 하게 된 것입니다.

1962년 5월 6일 교황 요한 23세는 마르띠노의 시성식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죄에 대해 용서를 빌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마땅히 휠씬 더 엄한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가장 쓰라린 모욕까지도 용서해 주었다. 그는 자신의 모든 힘으로 죄인을 속량하려고 애썼다. 그는 사랑으로 병자들을 위로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음식과 옷과 의약품을 마련해 주었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농장의 노동자들과 흑인들 그리고 그 당시 노예와 비슷하게 간주되던 혼혈아들을 도와주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이 그에게 ’애덕의 마르띠노’ 라고 붙여준 이름으로 마땅히 불릴 만하다,"

마르띠노 수사는 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저에게 내주셨습니다. 저도 그분을 위해 저 자신을 바치겠습니다. 주님! 저를 힘겨운 사람들, 세파에 지친 사람들,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들, 불행한 사람들을 돕기 위한 도구로 써주십시오.”

이 일화는 그의 고백이 어떤 수준인지 보여줍니다. 당시 도미니코회가 재정난에 허덕이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발 부탁입니다. 요즘 수도원 경제 사정이 어렵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노예이자 수도원의 재산에 불과하니 저를 팔아서 수도원 빚을 갚아주십시오.”

그가 자기에게 주어진 운명과 환경을 견디는 것으로 살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재미도 없고 우울할 수밖에 없을 삶을 견디는 수준이 아니라 스스로 기도하고 고백하는 그대로 살았다는 것을 봅니다.

물론 아무리 마음을 비우고 아름다운 기도를 올리며 살겠다고 각오해도 변치 않는 것이 있음을 압니다. 하루 종일 아픈 사람과 씨름하며 보이지 않는 걱정거리들, 하지 못하는 일로 화가 나서 사는 삶이 분명 현실로 존재한다는 것도 압니다.

이 글을 정리하는 동안 어제 다녀온 병원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검사 결과가 좋을 때는 문자로 알려옵니다. 다음 예약한 날짜에 오면 된다는 내용으로. 하지만 검사결과가 좋지 않아서 바로 항암주사를 맞아야 할 때는 전화로 옵니다. 통화를 하고보니 영락없습니다. 3일 뒤 다시 올라가서 하루 종일 항암 주사를 맞기로 했습니다. 여독이 채 풀리지도 못한 사이에 또...이 만만치 않은 나날들이 제 앞에 놓인 삶입니다.

그럼에도 제게 입으로, 말로, 글로 그치지 말고 재미없을 오늘과 희망 없을 내일을 다르게 살아보라고 자꾸 권합니다. 주위 분들을 통해, 말씀을 통해, 주님이 목숨을 주고 다시 살려낸 우리의 생명이 귀하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그래서 견디고 또 견디며 빕니다. 정갈한 식탁과 음식을 만들어 낼 마음을 주시고, 빗자루를 잡고 살다가 어느 날은 내 몸을 팔아서 무엇인가를 구하는 마음까지 주시기를...


모두 다 주님의 것 - 희망으로 김 재 식

땅과 그 안에 가득 찬 것이
모두 다 주님의 것입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도
모두 다 주님의 것입니다

사랑도 미움도
믿음도 믿지 않음도
모두 다 주님의 것입니다

재산이나 출세는 내 것이고
가난이나 실패는 남의 것이라고
몸부림치며 땅에 매여 살 때도

주님은
제 근심을 가슴에 끌어안으며
아픔을 다독거리며
그조차 모두 다 내 것이라며
너희는 다만 희망을 가지라 합니다.

안 겪어본 것 없이 겪으며
한 바퀴를 돌아 제자리로 오니
내 인생은 주님의 것임을
쥐꼬리만큼 조금씩 인정합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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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첫 번째 소원은...” 이틀에 걸친 국립암센터 병원 검사와 진료를 마치고 내려오는 길 차 안에서 그렇게 말을 꺼냈습니다. 많이 힘들었습니다. 출퇴근 하듯 숙소와 병원을 오갔고, 수납하고 진료 시간을 기다리고 하는 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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