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투병일기

간병일기 3113일 - 완벽한 아줌마 증후군

희망으로 2016. 11. 16. 09:44





<간병일기 3113- 완벽한 아줌마 증후군>

 

병실이 동쪽 방향이라 아침 시간이면 햇살이 눈부시게 들어온다.

딱 얼굴의 위치로. 눈이 부셔서 블라인드를 늘 내린다.

오늘도 어김없이 내리다가...

뭔가 눈에 들어왔다.

창문틀에 놓아둔 둘째가 가지고 온 선인장 작은 화분이 물이 말랐다.

블라인드를 절반쯤 내리다가 멈춘 채 놓아두고...

 

물을 채워줄 그릇을 뒤지는데...

침대 아래 여기 저기 옹기종기 쌓아둔 그릇들이 엉망으로 흐트러져있다.

주로 투명한 죽그릇이 대부분이고 몇 개인가 보내주신 반찬 먹고 남은 락엔락 용기들.

그거 정리부터 해야겠다고 손을 대었다.

그러다 작은 설거지통에 수저랑 과일칼 씻어둔것이 그대로 있는걸 보았다.

아내가 누운 침대 아래로 허리숙이고 그릇 정리하다가 말고...

 

1인용 미니 냉장고 위에 놓인 수저통에 과일칼과 수저랑 넣다보니

어제 식사때 나온 우유가 그대로 놓여 있다.

'오래두면 상할지도 모르는데...'

냉장고를 열고 우유를 넣으려다보니 자리가 없다.

아주 작은 미니 냉장고라 김치 담은 그릇 요쿠르트 몇 개

상하면 안되는 몇 가지 약 대신 먹는 밀기울과 효소 등으로

틈을 만들고 비집어 넣다보니 버릴 반찬이 두어개 있다.

문 열어두고 복도 뒤 비상구에 있는 쓰레기분리장으로...

 

'내가 지금 뭘 하려고 하던 중이었지?'

갑자기 머리속이 깨끗히 비었다. 아무 생각이 안 난다.

그러다 열린 냉장고 문을 보고 어지러진 그릇들이 눈에 들어온다.

'...'

갑자기 웃음이 났다. 누워 있는 아내를 마구 두드리고 꼬집고 치면서 말했다.

"킥킥킥! 내가 완전히 아줌마 다 되었어!

이거 하다 저거 하다 뭘 하는지도 잊어 먹고!"

 

예전에 종종 비웃었던 기억이 났다.

아침나절에 뭘 시작하다가 끝에가면 엉뚱한 일을 붙들고 해가 지고 있는

아줌마들의 건망증? 꼬리를 물고 빠져가는 삼천포 여행길?

그런데...내가 아내를 대신해서 살림살이를 하다보니 알겠다.

안해도 죽지 않지만 해도 표도 안나면서 무지 불편해지는 집안 살림살이의 특성이.

손을 꼽을 수 없는 무지 여러 종류의 일들이 늘어져있고 시간은 한정되고.

 

미안도하고 고맙기도 했던 지난 날 아내아줌마가 돌봐준 날들.

웃으며 아내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자리에 앉아 반쯤 마시다 말고 둔

식어버린 커피를 마시는데...

눈앞에 망치에 맞은 듯 띵 하게 하는 풍경이 보였다

반쯤 내려지다가 만 블라인드와 그 아래 보이는 무엇.

창틀의 물이 말라버린 작은 선인장 화분이 처음 상태 그대로...

 

(...혹시, 내 인생도 처음 출발할 때 가려던 목적지가 잊혀진 채,

지금 어딘가 계획에도 없던 곳을 둥둥 떠다니고 있는 건 아닐까?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