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병일기 3131일 - 바람의 방향을 바꾸시는 이유는?> 귀찮아서, 은근히 두려워서 미루고 미루던 건강검진을 다녀왔다. 아내가 다니는 폐경기클리닉에서 담당 의사선생님이 유방암검진을 꼭 해야 된다고 했다. 그 지시를 4개월이나 미루던 것도 마음에 걸렸다. 나는 전날부터 금식도하고 아내를 챙기고 가야 하는 게 싫어 투덜거리는 귀차니즘으로 버티다 버티다... 마치고 돌아 온 사흘 뒤에 건강검진 결과가 나왔다며 찾아가란다. 많이 불안했던 아내는 정작 문제가 없는 것으로 나왔는데, 내 결과지에서 문제가 생겼다. - ‘바로 조치 요함 - 간장 질환’ 그리고 ‘당뇨 계속 추적요망’ “...그럴 줄 알았다 에휴...” 건강검진 때마다 늘 걸리던 간수치가 이번에도 비켜가지 못하나보다. 그런데 전보다 더 심한 판정이 나왔다. 안 그래도 위내시경에서 진단된 위염 때문에 약을 보름치나 타와서 먹는 중인데...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쉬고 어깨가 쳐지며 좀 우울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원래 안 좋은 일은 연달아서 겹친다던가? 결과를 받아 든 날 오후에 내가 사용하던 전기제품에서 불이 나고 말았다. 아내가 화장실에서 날마다 씨름할 때 사용하는 미니선풍기가 충전 중에 폭발했다. 펑! 하면서 불길이 허리까지 올라 병실 사람들이 놀라 소화기를 가져와서 껐다. 간호사가 치료실로 뛰어와 큰일 났다며 다급히 불렀다. 병실로 허겁지겁 뛰어 와보니...엉망이 되어있고 바닥에 뿌려진 소화기 분말이랑 프라스틱 탄 냄새가 진동한다. 추운 날에도 불구하고 창문을 계속 열어놓아야 했고 간호사랑 직원이 오고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회의가 열리고 간호사 선생님들이 병실마다 전기 매트 전기 제픔 다 빼라고 지시하고 다닌다. 이 추워지는 겨울앞에서 졸지에 병동에서 민폐를 끼친 죽을 죄인이 되었다. 하지만 뭐, 그럴 수 있다. 건강검진 결과도 당장 죽을 정도의 병은 아니고, 오랜 수면부족과 긴장 스트레스에 시달렸으니, 그럴 만 하다. 불도 다른 경우와 비교해보면 삼성 갤럭시7 스마트폰도 배터리 폭발로 수거하고 단종 했지 않았나? 그 큰 기업의 제품도 그랬다. 그렇다고 사용자에게 죄인이라고 하지 않는다. 피해자라고 할망정. 같은 리튬이온 배터리를 사용하는 미니 선풍기, 그것도 중국산 싼 제품을 쓰다보면 그럴 수도 있다. 전적으로 내가 죄까지 지은 건 아니고... 그런데... 머릿속 계산과 다르게 감정이 심상치 않다. 사소하다고 밀어붙이는 일도 두 가지가 겹치니 상승작용을 하나보다. 전기세만 누진제가 있는 게 아니라 불행에 따라오는 좌절감도 누진제가 있었나? 아마 그래서 사람들은 뉴스에서 삶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는 이들에게 그러나보다. ‘돈? 건강? 가족간의 다툼? 뭐 그 정도 일에 목숨을 포기하는지... 참,’ 이라고. 우리는 드러난 한 가지나 두 가지 정도의 이유만 듣고 쉽게 단정을 하고 혀를 차지만, 어저면 정작 그 본인들에게는 사소한 열 가지 스무 가지의 힘든 일과, 그로 인한 쌓인 좌절감이 넓은 하늘이 내려 앉은 것처럼 양 어개를 누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통 알 수가 없고... 나도 별 다르지 않나보다. 무심코 입안에서 중얼거려지는 비관적 단어, ‘아, 우울하다. 이렇게도 버티며 꼭 살아야 하나?’ 외로움도 밀려오고 원망도 솟아나고 대형세탁기속의 비누거품처럼 커진다. 그런 나를 아내는 옆에서 다독인다. ‘시간이 좀 필요해요. 시간이 좀 지나면 괜찮아질 거에요!’ 종일 죄인처럼 풀 죽은 얼굴과 쳐진 어깨로 간간히 숨을 몰아쉬며 보내는데... 딸아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게 온 거 아니고 엄마에게 왔지만. 이어폰 한쪽을 뺏어서 아내와 통화하는 사이 사이 끼어들어서 이런 저런 안부와 밝은 목소리를 듣다보니 좀 나아진다. 불이 났다고 하소연하며 엉엉 엄살도 피웠다. 건강검진 결과는 비밀로 했다. 공연히 멀리 있으면서 뭘 할 수도 없는데 신경만 쓸까봐. 예상 못한... 신기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슬픈 바람의 떠미는 힘이 잠잠해지더니 슬그머니 방향이 바뀐다. 배가 고파지기 시작했고 차 한 잔을 마시고 귤 하나도 까먹었다. 좀 전까지 바닥에 내던져지고 망신당해서 구겨진 마음들이 조금씩 펴지는 느낌이다. 내일 모레쯤 큰일이라도 닥칠 것 같던 두려움이 어쩌면 한 달 석 달 쯤 미루어질 것 같이 안심이 된다. ‘간수치 회복을 위해 운동을 좀 더 해야지! 커피도 3잔에서 하루 1잔만 마셔야지!’ 짧은 그 사이에 객관적인 사실의 변화나, 획기적인 해결법이 나타난 것이 있었나? 오진이라고 다시 연락이 왔다거나 누가 건드려서 불이 나 내 책임이 아니라던가? 그런 거 전혀 없었다.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았는데 내 속에서 변화가 시작되었다. 의욕이 조금씩 꿈틀거리고 ‘고맙습니다!’ ‘맞습니다!’ 라는 말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돌아보니...지나온 날들에 늘 그랬다. 내가 가진 것이 많을 때 나는 아무에게도 아쉬운 말도 표정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을 싫어하고 좋아하고를 순전히 내 취향으로만 정하고 도도했다. 그것이 고상한 자존심이라는 민망한 기준도 속에 세우면서. 그 민망함은 내가 아내의 병치레로 다 털리고 가난해지면서 끝났다. 더 이상은 그럴 수도 없기도 했지만 진심으로 고마웠다. 귀한 것을 알게 되었다. 여유가 많고 건강한 사람은 무엇을 사거나 어디를 가는 것이 무지 행복하거나 감사하기까지는 않다. 당연하니까. 하지만 그럴 수가 없어지면서 작은 물건 하나에도 행복하고 조금만 시간이 주어지거나 형편이 되어 어디를 갈 수 있게 되면 감사하기까지 했다. 이건 당해봐야만 알게 되는건가? 그래서 하나님은 천국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가난하게 하셨나보다. 부자는 천국가기가 너무 어렵다는 걸 아시는 분이니까. 어디 가난만 그럴까? 건강도 재능도, 또 높은 자리 강한 힘도 그랬다. 낮은 마음, 연약한자를 들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신다고 했던가? 죽은 부자가 땅에 사는 자식에게 자기처럼 살아서 지옥오지 않게 착하게 잘 살라고 나사로를 통해 전해주려고 애썼지만 그게 어디 듣는다고 고쳐질까? 그러니 가난하고 연약하지만, 고난도 달게 훈련하게 하는 참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려는 것이 틀림없다. 날마다 흔들리며 살아 있는 날 수만큼 안 살고 싶다를 투덜거리기도 하는 못난 우리를 이토록 견디며 기다리며 안고 가신다. 터지는 속을 꾹꾹 참으시며 주시는 그 사랑이 얼마나 고마운지... 그 통로로, 도구로 주신 가족과 소박한 이웃들의 마음씀씀이 또한 감사할 수밖에.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그 인자하심이 길이 다하였는가, 그 허락을 영구히 폐하셨는가, 하나님이 은혜 베푸심을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 긍휼을 막으셨는가 하였나이다. - 시편 77:7~9] 처음에는 어려움을 마주칠 때마다 나도 저절로 위의 성구같이 그런 물음이 나왔다. [또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연약함이라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 곧 여호와의 옛적 기사를 기억하여 그 행하신 일을 진술하리이다. 또 주의 모든 일을 묵상하며 주의 행사를 깊이 생각하리이다 - 시편 77:10-12] 하지만 시편 저자가 묵상 끝에 도착한 고백처럼 나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염치와 과거를 기억하는 한. 그래서... 나 또한 사도바울의 고백에 아멘을 한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약해지는 것을 만족하게 여기며, 모욕과 빈곤과 박해와 곤궁을 달게 받습니다. 그것은 내가 약해졌을 때 오히려 나는 강하기 때문입니다. - 공동번역 고린도후서 12장 10절] 시 한 편을 가만히 속으로 읽어 본다. 이 마음을 일찌감치 알았던 시인 송명희님의 시 ‘내가 연약할수록’. 내가 연약할수록 주님의 강한 능력 나타나고 내가 비천할수록 주님의 아름다운 영광이 임하며 내가 없을수록 주님의 풍부함으로 부어주신다 내가 넘어지면 주님이 일으키시고 내가 슬플 때 주님은 기쁜 노래를 주시며 내가 잃어버릴 때에 주님이 찾게 하신다. 아멘. (2008.5.9. ~ 2016.12.4. 맑은고을 어느 병실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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