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저것 끄적/길을 가는 사람...

지금 이게 보복인가요? 축복인가요?

희망으로 2016. 7. 16. 10:12

<13, 지금 이게 보복인가요? 축복인가요?>

 

영화나 드라마에 가끔 보는 장면이 있습니다.

원수를 갚는 이의 마음이 들어간 대사.

 

죽지도 못하는 고통으로 오래 오래 괴롭혀주겠다!”

 

반대로 적이지만 존경하는 사이에서는 고통 없이 빨리 죽도록 해줍니다.

동료사이에서도 도저히 살아날 가능성이 없는 상황에서는 도와줍니다.

고통 없이 빨리 숨을 거둘 수 있도록.

 

종종 몰려오는 불행과 근심 앞에서 물어보게 됩니다.

 

하나님, 저 지금 보복을 받는 중인가요? 잘못 살아온 대가로...”

 

한 번에 죽지도 못하고 긴 시간을 죽고 싶은 마음을 견디게 하는 것이 그런 이유 같아서.

 

신앙인, 특히 교회를 다니면 받는 복에 대해 참 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열이면 일곱 여덟은 모두 성공이고 행복이고 해결입니다.

병도 낫고 돈도 벌고 사업 취직 결혼, 뭐 안되는 게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설교도 전도지도 표어도 그렇습니다.

당연히 죽을 때까지 더 가난해지고 더 좁아지고 더 억울하게 손해도 볼 수 있다는

그런 경우는 열에 둘 셋 보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니 그 기준으로 보면 예수를 믿고 보복인지 축복인지 헷갈리는 이 긴 날들을 사는 것은 어쩌면 참 바보스럽기도 합니다.

칭찬받도록 잘 살지는 못했음을 인정합니다. 그럼에도 내 가정에, 내 삶에 몰려와서 오래 가는 이 지독한 상황은 도무지 억울합니다. 더 나빠 보이는 사람도 안 당하고 잘 누리며 사는 걸 주위에서 볼 때는 더 그렇습니다.

(물론 더 반듯하게 사셨는데 더 심한 고통을 안고 사는 분들도 솔직히 봅니다. 이해 안 되는...)

 

그런데 왜 원망하면서도 붙들고, 손해를 보면서도 붙들고 살아가는 걸까요?

하나님을... 곰곰 생각해보니 오직 하나입니다.

 

행복하다가도 자고 나면 생기는 근심 걱정거리,

좀 기쁠만하면 수시로 닥치는 궂은일들, 자잘한 실패와 억울한 결과들,

그래서 도대체 인생은 가끔씩 슬픈 건지, 반대로 가끔씩 기쁜 건지 종잡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마지막 숨 거둘 때,

 

 

이제는 고향으로 간다! 슬픔도 고통도 없는 집으로 간다! 신난다!’

이런 희망이 있는 사람과,

 

나 못가! 이렇게 끝날 수 없어! 이 아까운 걸 놓고 어찌 가!’

하며 희망 없이 절규하는 사람 중 전자가 되고 싶어서입니다.

 

죽은 후에조차 이 외로움, 이 고통, 어쩌면 더 심할지 모를 나쁜 상태로 간다구요?

그럴 수 없지요. 끔찍합니다. 암만요! 절대 그렇게는 못합니다.

 

그런데... 그 기대가 도대체 근거가 있는지 물어보시면 저는 말합니다.

 

하나는 긴 고통에도 그 믿음으로 삶의 고난을 견딘 분들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좋은 일만 있다는 축복의 사례가 아니면서도 기어이 산 사람들을.

둘은 그들이 결국 믿고 바라던 영원한 평안의 나라로 갔음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을 기다리며 산다(로마서 819,22)’ 고 했습니다. 안 그러면 살아서 겪는 괴로움, 말도 안 되는 억울함을 왜 감당했겠습니까.

 

[나는 여러 번 갇혔고, 매도 수 없이 맞았으며, 죽을 고비도 여러 번 겪었습니다. 나는 39대씩 맞는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으며, 세 번이나 몽둥이로 맞았고, 한 번은 돌에 맞았으며, 세 번이나 파선을 당하였고, 밤낮 하루를 꼬박 바다에서 헤맨 일도 있습니다. 나는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 등등을 당했습니다. 또 수고하고 애쓰며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적도 여러 번 있고, 주리고 목마르며, 수 없이 굶고, 추위에 떨며 헐벗기도 하였습니다. - 고린도후서 1123-28]

 

아이고, 이러고 어떻게 살았는지... 딱합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야 어디 바울과 비교나 하겠습니까만 저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희귀병으로 아작 나버린 가정을 끌고 지나온 9년의 세월이 그랬습니다.

심적으론 바울보다 저는 더 고통스러웠습니다. 제게는 바울만한 소신과 믿음이 없기에 작은 일에도 더 크게 흔들리고 더 힘들었다는 말입니다.

이 바울이 가장 힘들었을지 모를 시절이 있습니다. 어쩌면 나중의 전도여행 중에 겪은 시련보다 더 어렵고 더 외롭고 더 우울했을지도 모릅니다. 생활은 덜 고통스러워도 내면의 영혼이. 바로 다소에서 보낸 13년의 세월입니다.

 

(갈라디아서 2:1절에 근거해 보면 약 13년 동안 바울의 자신의 고향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2:1 - 14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앞날이 창창하고 로마시민권에 가마리엘 문하생으로 소신에 의해 초기 기독교인들을 잡으러 다니던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나면서 그의 인생은 유턴에 가깝게 회전을 합니다. 무지개 일곱 빛 길에서 장마철 잿빛 흐린 날로 바꾸어 걸어가듯. 예수의 제자들과 기독교인들은 의심하지요, 외면하지요. 헬라유대인들은 배신자라며 비난하고 심지어 생명의 위협을 가합니다. 많이 참담했을 겁니다.

 

이 길을 가게 했으면 문을 열어주셔야지 이게 뭡니까? 예수님...’

아마도 숱하게 이런 좌절감에 빠지고 하소연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장장 13년이나 무명처럼 잊혀진 사람이 되어 다소에서 사는 동안. 다시 바울을 불러낸 바나바와 안디옥 전도자로 출발하는 그 날 아침까지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또 다른 13년의 무겁고 괴로운 날을 보낸 사람이 있습니다.

침묵의 13년을 보낸 아브라함입니다.

 

창세기 16장의 끝인 16절은 이렇습니다.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였더라

 

그리고 다음 171절에서는 이렇게 이어집니다.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이스마엘을 낳은 후 13년 동안의 아브라함의 역사는 알 길이 없다. 진실로 침묵의 13년이다. 이 기간 동안,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의 교통을 끊었던 때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거두셨던 기간 이라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다.(A.W.Pink). - 김희보 신학교수의 아브라함의 시련중에서]

 

성경도 외면하고 아무 기록도 남기지 않은 이 13년의 세월에 대해서 숱하게 많은 해석과 설교들이 넘칩니다. 어떤 이는 나중에 천국 가서 아브라함을 만나 직접 물어보기 전에는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고 심정이라고까지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 직전과 이후는 알 수 있습니다. 16장은 하갈과 사라의 전쟁 같은 갈등의 시간이었습니다. 대를 이을 자식은 없고 나이는 점점 먹어가는 데 사라는 도통 임신이 안 됩니다. 조상과 이웃, 자신에게도 면목이 안서고 불안해지는 아브라함은 은근슬쩍 떠밀리며 하갈과 동참하고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누가 알아? 이것도 하늘이 내려주는 하나의 방법인지...’ 속으로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그 입장이라면 숱하게 인간적 기대와 의지로 집착했을 것입니다. 재미도 붙이고 대를 이을 듬직한 자랑거리로 이웃들에게 인사도 시키고. 늙고 병들면 이스마엘이 아들노릇 톡톡히 해서 노후가 보장된다고 안심도 했을지 모릅니다.

 

어쩌면 아브라함도 본처와 첩 사이의 갈등에 시달리고, 또 한편으로는 중요한 하나님의 메시지도 없는 허전함과 불안을 온갖 사소한 삶의 재미로 때우고 살았을지 모릅니다. 13년 동안 하늘에서 내려온 아무 명령의 흔적도 없고, 아브라함이 순종으로 실행한 무엇도 기록으로 남지 않았다는 것이 그런 짐작을 하게 합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13년이 지나 171절 시작부터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라고 경고하듯 말할 이유가 없었을 테니.

 

아브라함이 99세가 되고 사라는 아이를 잉태했습니다. 이삭을 놀리는 이스마엘을 내보내면서 아브라함은 다시 제 자리에 돌아왔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우선으로 그동안 쌓인 정에 힘들면서도 하갈과 이스마엘을 정리하였습니다. 오직 명령과 약속으로 살아가는 궤도에 다시 진입하면서 아브라함은 다시 보호를 받기 시작하였고 평안에 들 수 있게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어찌되었던지...잘 견뎠습니다. 힘들고 지루한 갈등의 시절 13년을.

 

또 다른 13년의 억울한 날들을 변치 않고 신뢰하나로 버틴 사람이 있습니다.

자유를 잃은 13년을 보낸 요셉입니다.

 

꿈 이야기 하나를 말했다가 망했습니다.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구덩이에 빠지고 상인들에게 팔려서 노예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 꿈을 꾼 때가 BC1729년경, 요셉의 17세 때 였습니다.

 

쌓인 편애에 괘씸죄가 추가되어 형들은 요셉을 죽이려다가 구덩이에서 끌어 올립니다.

형들은 미운 요셉을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은 20개에 팔았습니다.

이집트 왕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으로 팔려 갔습니다.

처음에는 요셉 때문에 보디발의 집이 복을 받았습니다. (39:5)

 

보디발이 요셉을 신임하여 재산 관리를 요셉에게 다 맡겼습니다.

세상일이 흔히 그러듯 좋은 일에도 궂은일은 늘 따르는 법인가 봅니다.

나라면 꼼짝없이 당했을 것 같은 보디발의 부인의 유혹을 요셉은 물리칩니다.

재산과 욕정이 탐나서보다 누명을 쓰고 죽을지 모를 두려움 때문에 넘어갈 것 같은 유혹을.

결국 요셉은 바른 행동을 선택한 결과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39:7-20)

 

세상에 이런 억울하고 뭐 같은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ㅠㅠ

 

옥중에서 꿈을 해몽해주고 풀려날 기대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술 만드는 관원은 복직이 되어 바로 왕의 술을 진상하는 일을 하게 되었으니까요.

하지만 참 쉽게 풀리는 법이 없는 인생들입니다.

요셉의 공을 2년간 잊고 있다가 바로왕의 꿈을 해몽 할 사람이 없자 그제서야 바로

왕에게 요셉을 천거 하였고 다시 길이 열리게 됩니다.

 

흉년을 잘 해결한 요셉에게 왕은 인장 반지를 빼어 주고

애굽의 총리로 임명 하였습니다.

17세에 꿈을 꾸고 30세에 그 꿈이 이뤄진 것입니다.(41:46)

13년이라는 긴 시간을 엎치락뒤치락 씨름 끝에 찾아온 가족과의 재회였습니다.

 

나에게도, 우리 가족에게도 13년의 세월만 참아내면 웃는 날이 올까요?

도무지 알 수가 없지만 기대를 해봅니다.

 

또 있습니다. 성경속의 고난의 세월, 13년을 참고 견딘 사람이.

바로 다윗왕입니다.

 

BC1020년 전

사무엘은 양치기 소년 다윗에게 기름을 머리에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웠습니다.

사울을 하나님께서 버리시고 대신 이스라엘의 2대 왕으로 다윗을 세웠습니다.

 

사울왕은 하나님을 거스른 자기의 잘못은 반성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울왕은 기름 부음 받은 다윗을 13년간 지독히도 괴롭힙니다.

 

적장 골리앗을 쓰러뜨려 국민의 영웅이 된 다윗을 사울 왕은 시기합니다.

사울왕은 다윗을 여러 번 죽이려 했으나,

요나단과 사울 왕의 딸인 아내의 도움과 하나님의 가호로 살아났습니다.

 

다윗은 아둘람 굴에 숨기도 하고, 피난 중에서도 기름 부음 받은 5년 후에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승리 합니다. 다윗을 괴롭히던 사울과 절친한 다윗의 친구 요나단은 블레셋의 침공으로 인한 전투에서 전사 하고 말았습니다.

 

동굴과 밤이슬을 맞으며 노숙풍잔 하면서 보낸 13년은 참 힘든 여정이었습니다.

한 때는 사울왕을 죽일 기회도 왔지만 그러지도 못하는 순종의 길을 걸었습니다.

 

목숨이 위태한 역경도 많았으나 하나님과 함께한 13년이었습니다.

후에는 이스라엘 2대 왕으로 등극해서 40년을 왕좌에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나라로, 강대국으로 만들어 태평성대를 누렸습니다.

 

13년의 세월이 지나면 모두가 해결이 되기야 하겠습니까만

9년차인 우리가정의 고통도 부디 덜어지고 햇빛 한 줌 비추기를 빌어봅니다.

참 딱하게도 13년이 지나면... 또 새로운 13년이 시작된다는 예감이 떠오릅니다.

인생이 무슨 드라마도 아닌데 시즌1, 시즌2, 하면서 13년 단위로 고난이 오는 것처럼.

 

그래도 이 상황들이 보복이 결코 아님을,

영원한 집과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축복의 직전임을 새겨봅니다.

더 큰 해방과 은총의 감사를 주시려는 단계임을 새깁니다.

안 그러면... 살 수가 없는 하루하루가 그저 목을 조일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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