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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목사님께 – ‘산둥수용소’를 읽고 보내는 편지.>

희망으로 2014. 11. 25. 10:22




<K목사님께 산둥수용소를 읽고 보내는 편지.>

 

잘 지내시지요?

 

계절이 깊어갈수록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의 온도와 비슷해갑니다.

잘 지내시냐고 묻기가 두려운 것은 너무 잘 지내는 분들 때문에

더 힘들어하는 분들이 생기는 현실이 자꾸 떠올라서입니다.

 

사람들이 울고 있어서 자신도 평안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자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기까지 한 분이 있었지요?

그러니 심령은 편해도 되지 않냐고도 못하겠습니다.

 

위현의 어느 수용소에서 2년 좀 넘는 시간을 보낸 수용자의 삶을 담은

산둥수용소책 읽기를 막 끝냈습니다.

 

K목사님, 사람들은 저마다 수용소에 갇힌 것 같습니다.

 

산둥수용소책에서는 하루아침에 그동안 이루거나 물려받았던 모든 삶의 소산물,

특히 부와 지위와 특권들이 모두 초기화되어버리는 일이 생겼지요.

기껏 가방 한두 개를 더 지고 갈 수는 있었지만 아무도 크게 다르지 않게

수용소로 입소하는 날이 닥친 것이지요.

우리가 살다가 만나는 불행, 고난이라는 모습이 이와 흡사하지요?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지고 상실되고 빈손의 원점으로 돌아가는 순간.

그러니 혹 불행을 만난 사람은 각자의 이름으로 된 수용소에 갇힌거지요.

 

오늘 내가 그 모든 것을 가져가면 네게 뭐가 남겠니?’

라고 하시던 하나님을 떠올립니다.

가득 채운 곳간을 보면서 의기양양하는 부자에게 하시던 그 충격적 경고.

바로 그 날이 닥친 것이지요.

저도 어느 날 불쑥 우리 가정에 비슷한 일이 생겨서 모든 것이 사라질 때

그 비슷한 참담함을 느꼈기에 어느 정도 공감이 되었습니다.

정말 우리가 일생을 걸려 쌓았다고 으쓱하는 축적들이 한낱 슬픔의 원인일 뿐입니다.

 

K목사님, 그러나 수용소는 어쩌면 세상보다 더 정직해지는 고백소가 아닐까요?

 

그렇게 획일적이고 제한된 공간이 아니었으면

그 수용된 사람들의 숨은 성품이 그렇게 확연하게 드러날 수 있었을까요?

굶주림이 두려워서 남의 음식을 도적질해서 숨기고,

내 아이, 내 가족의 일신을 위해 남을 더 고통스럽거나 말거나,

바깥에서 한데 잠을 자도록 하는 고집을 부리고,

더 약자에게 또 희생을 감수하라고 힘으로 행사를 하는 존재.

못 배운 사람보다 배운 사람이 더 교활하고,

비신앙인보다 신앙인, 선교사가 더 악한 논리를 서슴없이 펴는 곳.

어느 정도 체면과 포장이 가능한 세상에서는 드러나지 못할 모습들이었지요.

 

수용소가 어디 울타리 친 그곳만 이겠습니까?

전쟁이 끝난 후 미국으로 돌아간 저자는 가진 자들의 사랑 아닌 거룩한 냉정함에

넌더리를 내더군요.

영적 선물은 주어도 배고픈 사람에게 밥은 줄 수 없다는 논리를 앞세우는 신앙인들,

그리곤 자기들의 회의를 마친 후 그득한 진수성찬의 식당으로 만족하며 걸어가는 선교회...

저는 그 모습을 보면서 세상에서 감추어져서 더 악랄하게 진행되는 공포를 느꼈습니다.

차라리 수용소가 낫겠다.’ 는 생각을 금치 못했습니다.

방 하나를 양보할 수 없다고 교활한 노리를 펴던 변호사 선교사보다

성질을 내면서 거부하던 깡패 같은 무식쟁이가 낫다고 느끼던 저자처럼.

 

K목사님, 사람이 정말 짐승보다 나은 존재일까요? 아니, 선할까요?

 

짐승보다 못한 인간?

그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지요. 이전에는,

그런데 수용소(바깥세상도 별 다름없거나 더 심할 수도)에서 펼치는 인간들의 반응을 보면서

저는 그런 생각이 가능하기도 하겠구나, 서서히 평가이동을 시작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단순 하라. 오늘 먹을 것만 가지고 이웃과 나누어라.

필요이상을 가지면서 남을 어렵게 하지 말라. 그것이 사람에게는 까마득하다는...

오히려 짐승세계에서 더 가능성이 높을지 모른다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건 저만 느끼는 게 아니라 저자도 말하더군요.

삶이 가진 딜레마라면서,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덕성이 사람이 가진 지독한 이기심으로 불가능에 가깝다고...

 

창조의 날에 하나님은 사람에게 뭇 짐승들의 이름을 짓는 권리를 주셨지요.

그리고 다스리고 일부는 먹기도 하라고 하셨지요.

그러나 노아의 홍수 다음에 다시 계약을 할 때 그 자리는 3자 계약이었지요.

하나님, 사람, 짐승 그렇게.

처음 창조 때 하나님과 아담만 하던 계약과 달리

그 자리에는 짐승도 분명 하나의 계약자로 참석했습니다.

더 이상 인간의 아래가 아닌 하나님 아래의 관리를 받는 계약자로.

짐승이 무슨 잘한 일로 승격된 것이 아니라면 인간이 하락한 것이지요.

함부로 짐승을 대하고 인간답지 못한 점, 하나님께 계약을 지키지 못한 점 등 때문에.

그것은 인간의 탐욕과 폭력적인 살상, 안식의 명령을 지키지 않은 이유였지요.

 

K목사님, 그래도 희망이 있을까요? 있다면 어디에 있을까요...

 

그래도 전쟁이 끝나고 다시 자유를 얻으면 아름다운 회복이 오리라 꿈꾸었지요.

미래를 기다리는 그 꿈은 언제나 현실의 고난을 견디고 살아내는 힘이 되니까요.

그러나 그렇게 고대하던 종전과 귀환은 그 꿈과는 달랐지요.

더 큰 모순의 세계, 악한 탐욕을 포장과 교묘함으로 숨긴 세상일 뿐이었지요.

세상에 가장 필요한 것은 도덕적 사랑이지만 인간에게는 그 자질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모순의 아픔만 확인시키는 세상이지요.

종교는 더 이상 아낌없는 사랑보다는 경건을 위주로 한 영적 거룩함만을 내세우고,

아무도 희생이나 양보를 순수하게 하기 보다는 필요와 명분을 위해 하는 거지요.

 

새로운 세상이 눈앞에 펼쳐지리라는 부풀었던 희망은 결국 다른 각오만 남기더군요.

인생은 자격도 능력도 없고, 세상은 한없는 자비와 사랑을 끝없이 필요로 하고,

가능한 삶의 방식이 무엇일까?

필요한 도덕적 삶을 추구하되 그 동력과 구체적 힘을 하나님께 맡겨서 얻는다는,

하나님을 통해서만 인간의 하나인 자신들을 믿을 수 있고 그나마 소중해질 수 있다는...

 

그가 끝으로 매달리고 깊이 공감하던 성경의 구절을 저도 속으로 외우고 외우면서

이 모순의 인간들이 살아가야 하는 모순의 세상을 그나마 걸어가려고 합니다.

 

내가 하늘에 올라갈찌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려갈찌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시편 1398-9)

 

덧붙이는 생각 : 다 읽고 책을 덮고 나니 이상한 그리움이 자꾸 따라옵니다.

차라리 산둥수용소가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참 별 생각이지요?

자유가 없고, 모든 물자가 모자라며, 마지막 시기에는 배고픔에 허덕이면서도...

그 아귀다툼, 적나라한 인간의 이기심 탐욕이 유리창 안에서 벌어지듯 드러나는 곳.

그럼에도 그곳이 그리워지는 이유는 아마도 이 바깥세상은 너무 심한 가면과,

너무 심한 궤변들이 버젓이 날마다 자행되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선을 가장하고 숨겨진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