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하려면 먼저 혼자가 되라>
“또? 아이구, 죽었다!”
아까 깨운 시간이 밤 1시45분, 아내의 소변을 빼주면서 속으로 그랬다. ‘그럼 이젠 잘하면 아침 6시까지는 잘 수도 있겠다!’ 그러며 흐뭇하게 다시 잠에 들었다. 그런데 또 깨우는 손에 일어나보니 시간이 밤 2시 50분, 겨우 1시간이 지났다.
‘오늘도 잠 다잤다. 새벽 2시, 3시, 그렇게 깼다가 누웠다가... 잠은 언제 자라고? 흐흐흐’
이 간격으로 잠 못이루고 괴로웠던 남편의 속타는 심정을 100% 리얼하게 아는 분이 한 분계신다. 뇌경색으로 9년째 자리에 누워 기저귀를 차고 볼일을 보시는 사모님을 돌보고 계시는 김병년목사님. 어느날은 그 기저귀 4번인가 5번을 갈다가 밤 다 새우고 새벽기도 인도하러가시며 ‘죽을 지경’이라고 비명을 지르셨다. 나는 그 글을 보고 ‘아이고, 난 그것도 부럽다! 그냥 기저귀만 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참 이상한 푸념을 늘어놓았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아내가 처음 발병했을 때 비교를 하면 이건 진짜 새 발의 피다. ‘조족지혈’, 그때 아내는 구역질과 통증으로 토하면서 꼬박 밤을 앉아서 세웠다. 처음에는 그때마다 일어나서 등을 두드리고 토한 걸 치웠다. 그런데 그렇게 계속 하는데 나는 그만 속된말로 뻗어버렸다. 안그럴 장사 있을까? 무려 13일을 계속 하는데, 그것도 낮에는 일하고 온 사람이...
나중에는 아예 길게 꾸러미로 된 종이컵 다발과 곽 티슈, 그리고 비닐봉투를 준비해주고 잘 수밖에 없었다. 정말 못된 남편이지만 일어날 수가 없었다. 눈은 시리다 못해 매웠고 아예 떠지지도 않았다. 몸은 비몽사몽 늘어진 오징어처럼 헤롱거리고, 아내는 아파서 반 주음이고 나는 잠을 못자서 반은 죽어가고 있었다. 사람이 이러다 죽는구나 실감이 났다.
그 예전, 참 아내가 속상했던 적이 있었다. 해마다 가을이면 풍치로 잇몸이 붓고 염증이 생겨 진통제를 줄달아 먹으며 버티고 일했다. 그러고나면 이가 하나씩 빠지곤 했다. 그런데 그 잠못들고 뒹굴던 밤시간에 아내는 곁에서 잘도 잤다. 초저녁에는 두 세 번 일어나주다가 밤이 깊으면 일어나지 못했고, 나도 깨우는걸 포기했었다. 깨운다고 무슨 방법이 있나? 아픈건 여전히 내 몸이고 손톱만큼도 나누어지거나 줄어들지 않는 통증이니...
그렇게 너무 아파 밤을 세우는 동안 사람은 부부아니라 부모자식이라도 철저히 마지막은 혼자 몸이구나 하는걸 뼈저리게 느꼈다.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는 마지막 자리. 물론 아주 남보다는 더 깨어서 있어도주고 마음 짐작하며 무거워서 공감도 해주지만 거기까지다. 그 이상은 들어가고 싶어도 들어갈 수 없는 각자의 장소, 각자 혼자만이 버티는 자리다.
우리는 많이 아끼거나 좋아하면 대신 당해줄 수 있는 종류들도 있다. 매를 대신 맞아주거나 재물을 대신 주거나 나누면서, 심하면 대신 죽어줄 수도 있다. 깊이 각오하고 결단하면 가능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못하는 것들이 있다. 몸의 깊은 통증, 그보다 열배 백배는 더 깊을 마음의 고통, 외로움, 슬픔 등이 바로 그것이다. 대신 죽어는 줄 수 있어도 같이 못가고 덜어주지는 못하는 그 무엇들...
그래서 우리는 그 자리, 그 시간에는 차라리 눈을 감고 하늘에 빈다. 사람에게서 도움을 포기하고, 그런 경험을 안해본 사람이 있을까? 그건 선택의 대상도 아니고 선택의 여지도 없다. 아무도 함께 해주지 못하는 그 시간과 그 자리를 넘겨본 사람은 안다. 왜 하늘과 하늘에 계신 분을 저절로 부르게 되는 지를.
아내가 중환자실에 들어가 있을 때마다, 혹은 그렇지 않아도 통증과 두려움으로 밤을 세울 때마다 나는 내가 대신 해 줄 수 없는 그 무력하고 떨어진 거리를 실감해야 했다. 아내 혼자서 그 강을 건너고 그 고통의 산을 넘어야 한다는 것도 짐작했다. 아내의 영혼이 아마도 부지런히 하늘을 향해 부르짖고 울고 매달렸으리라. 그렇게 부부라는 이름으로, 서로 사랑한다며 내가 대신 죽어줄 수도 있다는 각오도 아무 소용이 없는 각자만의 자리를 뼈저리게 느끼는 순간이 있었다.
성경에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질투의 하나님이다’라고, 그리고 수차례 ‘너희는 내게 부르짖어라!’ 라고, 하나님은 우리가 정녕 사람끼리, 혹은 다른 어떤 대상에게서 완전한 도움이나 해결책을 얻는 것을 반대하셨다. 주지도 않을 뿐만아니라 싫어하시고 화를 낸다고 하셨다. 어떻게보면 참 이기적이고 고약한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그 혼자만의 자리를 경험하면서 점점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가 이 서럽고 두려워 몸이 떨리는 마지막 혼자만의 자리, 본질적으로 외로운 홀로 있는 존재가 아니라면 정말 사랑이 가능할까? 사랑은 고사하고 이해는 할까? 사람 서로를?
만약 누군가가 누군가의 고통, 몸의 고통이든 영혼의 고통이든 그 끝까지를 함께 나눠주고 위로해주어 벗어나게 해줄 능력이 있다면 우리는 그 힘을 선하게만 사용할까? 죽는날까지 변함없이 유지는 할까? 그런 생각이 들면 별안간 불안이 엄습한다. 완전한 영생을 가지지도 않은 사람이 그런 남에 대한 능력이 있다면 그보다 무서운 무기가 있을까 하는 두려움,
사용 여부를 수시로 변덕스럽게 자기의 이익이나 감정에 따라 바꾼다면? 아마 여러사람이 수시로 죽을 지경에 빠질게다. 안그러고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소유하고 가두고 폭력 행사하기를 수시로 하는 불완전한 존재인데...
나는 감사한다. 내게 그런 능력이 없고, 남에게 나를 조종할 그런 능력이 없다는 점을. 그리고 우리를 절대적인 혼자의 자리에 머물게하고 경험하게 하신 이유를! 그래서 나는 나의 그 처절한 외로움의 자리를 고백함으로 아내도, 심지어 우리의 소생인 자녀들조차 그런 자기만의 홀로 겪는 고독이 있음을 인정한다. 얼마나 힘들까? 얼마나 외로울까? 그리고 얼마나 그걸 견디느라 치열하게 하늘에 매달릴까? 하는 동질감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이해한다고 말하려면 우선 철저히 혼자가 되어 고생해보라는 말을 하고 싶다. 그렇게 스스로 그 자리 그 시간을 경험하지도 않은 채로 누군가에게 다가간다는 것은 눈감고 야구방망이를 휘두르는 것과 같다. 뭘 알지도 못하면서 남의 아픔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
‘나만이 너희의 하나님’이라는 하나님이 열심히 우리를 본질적으로 고독하게 창조하시고, 그리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간곡히 호소하시는 것은 그래서 모순이 아니고 하나의 길에 있는 타당한 말씀이다. 우리는 아무도 태어나서 죽음까지 철저히 혼자인 것과 아무도 남을 대신해줄 수 없는 하나님만을 향한 존재들이라는 시인이 없고는 남을 사랑할 수 없다는 진실앞에서...
그 무능하고 무기력한 경험과 고백으로 나는 원인모를 불안과 두려움에서 자유를 얻으려고 한다. 아무도 나의 생명을 좌우하지 못하며 끌려다니지도 않는다는 확신을 주기 때문에. 그래서 내가 사랑하는 이를 위해 무엇을 해줘야한다는 무리한 목표와 당연히 계속되는 실패나 좌절감에서 해방될 것이기 때문에! 또한 받을 것을 기대하는 착각과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을 것이니!
사랑하려면 먼저 혼자가 되라. 철저히 외롭고 서러운 분리를 인정하면서! 그리고 다가가라 사랑하는 이를 향해, ‘나와 같은 사람아! 너를 이해한다!’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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