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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강제구인(?) - 다일무료천사병원장님의 방문

희망으로 2013. 10. 11. 08:57

<사랑의 강제 구인?>


“안정숙 집사님이시지요?”
“저희가 모셔가려고 왔습니다!”


근무복인 조끼를 입으신 두 남자분이 병실로 성큼 들어와서 인사를 하고선 대뜸 꺼내신 말씀이다. 집사람은 점심을 먹고 잠시 잠이 들었다가 깨서는 아직 정신이 들지 않아 멍한 상태인데 말을 못하고 듣기만 했다.





(앞줄의 가운데 분이 최일도목사님, 바로 왼쪽옆 남자분이 10일날 방문와주신 천사병원 원장님이신 방목사님)


“목사님, 지금은 안가도 됩니다. 전에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보낼 때는 정말 절벽 끝에 선 상태라 다급했지요.”
“최목사님이 많이 두 분을 걱정하시고 여러 번 말하십니다. 어떻게든 도와드렸으면 좋겠다고,”


그랬다. 2009년 8월 여름, 그때 편지를 보낸 때는 아내는 사경을 해메는 중인데 갈 곳이 없었다. 국내 다섯손가락 안에 들어간다는 강남의 큰 종합병원은 계속 재발되며 망가지는 아내를 응급조치만 해주면서 치료를 해줄 길은 없다고 등을 떠밀어 퇴원시키기만 급급했다.

  
“우리 여기서 나가야 하는데 다시 입원 들어가도 될까요?”
“...미안하지만 안 왔으면 좋겠어요. 치료해줄 길도 없는데 좀 부담이 되네요.”


먼저 있던 충주 병원에서는 난색을 표했다. 날이 갈수록 위급해지는 환자를 받기에는 지방의 작은 요양병원이 얼마나 무기력하겠는가,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니 갈 곳도 없었다. 집은 이미 빚으로 팔아서 정리해버렸고, 큰 병원도 작은 병원도 입원은 허락이 안 되고, 물론 돈만 여유 있다면야 중환자실에 눌러앉아 버티면 되겠지만 그럴 여유도 없으니. 아내와 나는 이제 조용히 임종이라도 하고 싶었고, 믿음은 파괴되지 않고 기도와 찬송이라도 하면서 세상을 떠나는게 소원이었다.

그래서 떠오른 것이 다일무료천사병원이었다. ‘밥퍼’목사님으로 이름이 많이 알려지신 최일도목사님이 주축이 되어 세우신 노숙자와 무연고 극빈층 환자들을 위한 무료치료병원이었다. 아주 오래 전 1991년 무렵 우리 신앙모임과 최일도목사님이 추구하시던 청량리 무료급식사역의 다일공동체 식구들은 형제공동체라고 하면서 지냈었다.


(1993년 안산에 마련된 우리 기도의 처소 '만남의집' 개원식에 오셔서 예배 설교를 해주신 최일도목사님)


(1991년, 청량리 옥상에서 3주년을 맞은 다일교회 생일날 양쪽 식구들이 함께찍은 사진, 우리 모임 목사님과 최일도목사님의 바로 뒷쪽에 아내와 큰아이도 보인다. 그 옆이 수녀이셨던 최일도목사님의 아내, 김연수사모님)


이후 우리는 십여 년이 지나면서 여러 이유로 각자 신앙의 길로 나갔고, 다일공동체는 매스컴과 많은 후원자들의 지원으로 급속도로 규모가 커지면서 사역을 담당했다. 1004명의 병원건립 후원자가 2004, 3004 후원을 넘어 만 천사도 넘었고 무료병원은 건립되고, 영성훈련센터와 베트남, 중국, 필리핀, 외에도 세계 곳곳에 다일공동체와 무료급식 분원을 세워나갔다.

  
“어쩌지요? 주신 내용을 최목사님께 전하고 의논했는데, 목사님은 어떻게든 방법을 알아보라시는데 지금 병원은 리모델링에 들어가서 업무가 중지되어 있어요.”
“할 수 없지요. 마음써주시고 회신을 주셔서 고맙네요.”


지금은 필리핀다일공동체 원장님으로 가신 당시 다일천사병원의 책임자신 이 실장님의 회신이었다. 병원은 확장 신축공사에 들어가 있는 중이고 이후 거의 10개월이 더 걸렸다. 그래서 막막하던 참에 한 달 후 KBS1 사랑의리퀘스트 모금방송의 길이 열렸다. 그리고 그 끈을 잡고 국립암센터에 치료신청을 하고 입원이 되었다. 낭떠러지에 한발이 나간 상태에서 구제 된 상황이었다. 정말 줄 하나를 타고 천길 계곡을 지나가는 심정의 시절이었다.

  
“아, 그때 편지로 도움을 요청할 때는 정말 막막하고, 그럴 상태였지요. 최목사님이 지금 그때 기억에다가, 요근래 오마이뉴스에 연재하는 ‘간병일기’를 보시고 다시 생각나셔서 그런가 봅니다. 그 연재는 시간순서로 올리는 중이다보니 딱 그때 2009년 시기의 내용이 나가고 있어서...”
“많이 두 분을 걱정하고 계셔요. 그래서 모시고 가려고 왔지요.”
“괜찮습니다. 지금은 그때의 위급함을 좀 넘겼고, 이 병이 난치병이라 딱히 치료약이 없어서 꾸준히 투병은 해야하지만 재활치료는 아주 필수적이라 꼭 해야합니다.”
“우리 천사병원은 아시다시피 웰다잉, 임종의집입니다. 웰빙이 되어가고 있어 문제지만!”


자세한 설명에 와주신 다일작은천국 웰다잉 센터 원장님은 이해를 하셨다. 가서 보고를 드리고 의논을 다시 해보시겠다고 하셨다. 잊지 않고 정말 바쁜 사역중에도 신경써주신 최목사님이 고마웠다. 누가 그 오랜 세월, 10년이 넘도록 만나지도 보지도 못했던 사람을 이렇게 챙겨주려고 할까 싶었다.

  
“그런데 병원비랑 생활은 어떻게 하십니까? 누가 좀 도와주나요?”
“가장 꾸준하고 오래 도와주신 곳은 최용덕간사님이 운영하시는 ‘해와달‘의 갈릴리마을과 식구들이고요. 방송과 인터넷에서 모금도 두어 번 해주셨고, 그 외 환우회나 국가보조금 조금 나오는 것으로 아직 길에 나앉지 않고 잘 지냈습니다.”


그렇게 대답을 하고보니 정말 지난 세월이 아찔하기도 하고, 꼭 그만큼 투병과 생활, 두 가지를 다 용케도 끊어지지 않고 이어올 수 있도록 해준 분들이 한없이 고마웠다. 우리를 방문하신 기자 분들이나 관공서분들이 대부분 ‘어떻게 사느냐?’고 묻는 말이 이상한 게 아니라 당연한 것이라는 걸 다시 실감했다. 때론 그 줄이 언제 끊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초조한 적도 여러 번 있었지만,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던 2009년 8월의 상태)


(2013년 봄, 사진봉사를 온 분들이 아픈 아내를 어거지로 불러내서 찍어준 사진)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 크게 감사해야할 또 한 가지는, 그 도움을 청할 대와 비교하니 지금은 미꾸라지가 용이 된 것보다 많이 좋아진 아내의 행동범위다. 비록 주된 난치병은 여전히 불안한 관리대상이지만 움직이고 생활하는데 필요한 근육이나 신경이 회복된 것은 기적에 가깝다는걸 실감한다. 치료해주신 의사선생님도 스스로 기뻐하며 놀라실 정도니!

우리 스스로 의지하고 살아가는 줄도 잘라지고, 끊어지게 하셨지만 다른 손길과 새로운 살길을 주신 것은 분명 하나님의 무슨 계획이 있으실 거다. 그냥 자기 힘으로 자기가 벌어가며 건강하게 살도록 냅 두면 될 텐 데도 왜 그런 삶으로 유지되게 하시는 건지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다일무료천사병원 원장님을 직접 보내주신 최일도목사님과 방문해주신 원장목사님께도 참 고맙고, 이 날까지 버팀목이 되어준 여러 도움주신 분들, 특히 갈릴리마을의 최간사님과 식구들에겐 정말 엎드려 감사를 표하고 싶을 정도다. 그걸 다시 돌아보고 확인한 하루였다. 고마운 10월10일의 헤프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