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가는 길/예수님과 함께 가는 길

'감사를 넘어서 거룩으로' - 김병년목사님 동영상 요약

희망으로 2013. 2. 3. 18:40

<'감사를 넘어서 거룩으로' 중 기억에 남는 몇 군데 말씀, 오래 생각해보고 싶어 정리>


- 욥기 전체에는 ‘감사했다’ 라는 단어는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욥은 인내의 대명사다. 야고보서에는 욥의 인내를 배우라! 고 했다.


- 인내는 감사하면서 지나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따지면서 원망하면서 지나가는 것, 아무런 감정 없이 지나가는 것이 인내는 아니다. (욥을 통해 보면)


- 감사는 불행이나 고난자체를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그 과정의 섭리를 감사하는 것이다. 사건 자체를 감사하는 것은 인간성이 파괴된다. 종종 신앙은 영적 편견을 조장한다.

성경은 감사를 다루는 것보다 고난과 실패 탄식을 다루는 양이 훨씬 많다. 


- 감사는 불행이나 고난자체를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그 과정의 섭리를 감사하는 것이다. 사건 자체를 감사하는 것은 인간성이 파괴된다. 종종 신앙은 영적 편견을 조장한다.

성경은 고난과 실패 탄식을 다루는 양이 훨씬 많다. 


- 신체적인 병이 오면 슬픔과 탄식이 몰려온다. 하지만 그대로 하나님께 나가도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우리는 고난 그 자체도 끄떡없이 감사하고, 대수롭지 않은 듯 하나님께 나가는 사람만 하나님이 좋아하실 거라는 편견을 만든다. 하나님을 제한하는 이 편견은 우리를 건강하지 못하게 하고 참 평안을 얻는 방해물이 되기도 한다.


- 이스라엘 백성은 순종해서 기적을 본 것이 아니다. 감사해서 기적을 본 것은 아니었다. 광야생활, 출애굽이 대표적 사례다.


- 자식들은 감사하고 순종하기 때문에 밥 주고 옷 주고 학교 보낸 것은 아니다. 그랬다면 많은 자녀들이 굶고 헐벗고 생존을 보장하지 못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부모는 단지 낳았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한다. 


- 감사하기 때문에, 순종하기 때문에 기적이 일어나고, 하나님이 그런 모습만 좋아하고 높이 받아줄 것이라는 신앙기준을 자꾸 만들어 가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율법의 벽을 견고히 만드는 것과 같다.


– 행복한 사람은 감사하는 사람이고, 감사는 자족에서 오고, 자족은 내가 가진 소유로부터 온다?? 이것은 잘못된 논리다. 사람은 자기에게 없는 것을 구하는 마음이, 있는 것을 기뻐하는 경우보다 크다. 그래서 없는 것을 기도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 성경에서 거룩은 480번 정도 나오고 감사는 180번 정도 나온다. 시편에서만 70번 정도 나온다. 또 성적인 순결을 지키라는 말이 정의를 지키라는 말보다 훨씬 적게 나온다. 우상숭배를 지칭하는 음행 음란을 빼면 더 적다. 사회 정의를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이 훨씬 많이 나온다. 정의는 약한 자를 보호하라는 말이다. 정의를 이루면 성적순결은 그 안에서 저절로 이루어진다. 그럼에도 종교는 정의보다 성적순결을 더 강조하고 가르친다. 거룩을 가르치면 감사는 저절로 이루어지지만 우리 개신교는 감사를 먼저 가르치고, 감사를 더 높이 인정하는 풍토를 만들었다.


- 고난은, 길은 내가 걷는데 인도하는 분은 하나님인 경우다.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가는지 내가 알지 못하고 가는 경우가 고난이다. 끌려 다니는 경우다. 내가 길을 가고 내가 인도하며 내가 알고 가는 경우는 고난이라고 하지 않는다. 복이라고도 하고 기뻐하기도 하며 감사하기도 한다.


- 거룩은 물건을 채우거나 내 필요를 채운다고 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자족에서 오는 감사만 한다고 거룩해지지는 않는다. 성경에는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진다고 했다. 악인과 불신앙하는 사람들도 온갖 것을 누리고 기뻐하며 살지만 거룩해지지는 않는다.


- 감사에 머무르면 하나님 자체를 구하는 영적 성장을 할 수 없게 된다. 내 필요를 채울 때만 아니라 내 것을 가져가도 하나님 자체를 구하는 관계로 나가야 거룩해진다. 그것만이 흔들리지 않는 사이가 된다.


- 하나님의 자비와 성실이 매일 매일 새로운데 문제는 인간의 이기심도 매일 새롭다. 그래서 말씀과 기도로 날마다 눌러야 거룩함이 날마다 유지된다. 거룩함은 하나님 자체를 구하는 것,


- 삶은 반복되는 것을 감당하는 것이 많이 어렵다. 우리들의 기도는 흔히 이것을 채우고, 이것을 바꾸고, 이것을 완성시켜 달라는 것들로 일관하기도 한다. 질병도 고쳐달라고 하고 고난도 넘어가거나 해결해달라고만 기도하지만, 사실은 기도 제목은 바뀌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 모든 바깥의 문제가 다 사라지는 것에 사활을 걸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감당하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랑과 힘을 달라고 하면 세상은 변함없어도 승리할 수 있다. 신앙인이 불신앙인들과 다른 차별이 생길 수 있는 갈림길이다.


-  매일 매일 사랑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 제목을 바꾸면 하나님의 능력도 바뀐다. 모든 것을 채워만 주는 하나님에서 어떤 경우에도 변치 않는 자비의 하나님으로


-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창조도 하고 노아홍수로 쓸어버리기도 하고 포로로 몇 백년을 넘기기도 했지만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심지어 하나뿐인 아들을 보내도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냥 변하지도 않는 세상과 사람을 사랑하기로 작정하셨다. 

사람들도 자신을 빼고 모든 것을 바꾸어 달라는 기도에서 나를 바꾸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진정한 해결책일 수 있다. 그렇게 변하지 않는 나 자신을 바꾸지 않으시면서도 사랑하기로 작정하시는 하나님께 우리가 배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