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가는 길/예수님과 함께 가는 길

나의 가장 힘든 순간이 가장 안전할 때라

희망으로 2012. 12. 23. 17:02

<나의 가장 힘든 순간이 가장 안전할 때라>

채 청년도 되지 못한 10대의 초반 시절, 나는 서울의 한복판 충무로에 있는 신문사지국에서 먹고 살았다. 소위 직업배달, 당시 내가 배달하는 신문부수가 350부, 등짐처럼 줄로 묶어서 메면 엉덩이부분에서 어깨까지 등짝을 꽉 채우는 부피였다. 

새벽 2시 좀 넘어서부터 신문을 받아 광고지를 넣고 정리하고 챙기면 3시 반에서 4시, 이 때 부터 거의 오전 9시까지 그 350부를 전부 배달하는 직업적인 신문배달이었다. 방 두 군데서 거의 20명이 쪼그리고 칼잠을 자고 몇 명은 근처 집에서 아르바이트로 오는 학생들도 있었다. 

그렇게 신문을 배달하고는 어떤 이는 오전 반, 대부분은 오후반 검정고시나 재수 학원을 나가며 사는 생활 이었다. 그 시절 가장 부러웠던 기억은 다른 신문사 배달 직원들 이었다. 그들은 일주일에 하루는 꼬박 쉬는데 나는 한국일보사, 불행하게도 모든 아침신문이 쉬는 월요일날 아침에 일간스포츠라는 신문이 또 나왔기 때문에 유독 한국일보사만 년 중 하루인가 이틀밖에 쉬는 날이 없었다.   

그때 나는 광장시장, 동대문 평화시장 전체와 충무로 5가 지역을 맡아서 배달을 하고 종로에 있는 고려학원이라는 검정고시 전문학원을 나갔다. 그러나 너무 힘에 부치는 생활에서 공부하기란 각오만큼 결과가 나오지 않았고 정작 시험 날 아파서 펑크를 내고 말았다. 1년에 한 번밖에 없는 검정고시 시험을... 난 너무 지치고 좌절하여 결국 1년 가까이 애쓰고 살던 그 시절을 명예롭지 못하게 자살이라는 길을 선택했다. 당시 나는 교회도 몰랐고 예수는 더더욱 모르고 살던 때였다.

을지로에 있는 국립의료원에 내가 누워있다는 걸 안 것은 삼일 째 되는 날이었고, 너무도 창피해서 나는 도망을 쳐 나왔다. 환자복을 입은 채로, 그 뒤로 신문사 총무님의 집에서 안정을 취하면서 일주일을 지냈고, 고맙게도 나를 성실하게 보아준 그 총무님이 병원비도 다 지불해주었다. 당시 신문사지국의 관리방법에 따라 그 총무님이 내 지역의 신문을 다 배달하며 떼우고 계셨다. 우린 평상시 우린 죽어라 몸으로 일하고 일정 월급을 받는데 하는일도 없으면서 우리의 두 배, 세 배의 월급을 받는 총무 서너명을 비난하고 놀리고 했었다. 그런데 그 총무님의 도움으로 다시 살아나게 될 줄은 몰랐었다.

이 신문사 총무님의 이야기를 길게 기억하는 것은 그 뒤 내 인생의 고비마다 벽에 막힐 때마다 그 역할을 해주는 영원한 총무님을 말하고 싶어서이다. 

그 일이 있고나서 먹고 살기위해 급히 찾아 옮긴 직장에서 예수를 만났다. 그 일이 없었고 그런대로 풀려나갔다면 아마도 지금과는 또 다른 어떤 모습으로 인생길을 걸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어떤 길도 지금보다 다행한 선택은 아니었을 거다. 이유는 단지 하나, 하나님나라와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 뒤로도 세상을 혼자 헤쳐 나가는 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변변한 학력도, 유력한 빽줄도 없고, 돈은 더 없는 처지의 생활이란 마치 망망 바다에 한 조각 돗단배로 표류중인 상태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일자리도 뜨내기처럼 옮겨야 했고, 굶기를 수시로 하고, 행여 아프기라도 하는 때는 그야말로 고아원의 고아만도 못한 위태로운 시절이었다.

쌀이 떨어지고 이틀 사흘째 물만 마시고 일자리를 찾아 헤맬 때, 그 순간 내 곁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돈과 쌀만이 아니라 부모도 친구도 강아지 한 마리도... 그러나 천만 다행인 것은 예수님이 계셨다. 금식을 하면서 굶주린 상태에 돌을 떡으로 만들어먹으라는 사탄의 유혹에 단호하게 거부하시며 오히려 야단치셨던 주님의 말씀이,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그 굶주림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선택하신 예수님의 길이 처참할 수밖에 없는 내게 큰 위로를 주셨고 힘이 되었다.

전혀 배고프지 않고 먹을 것이 남아돌 때는 결코 그렇게 가까이 다가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예수님의 선택과 모습이 새겨지다시피 내게 다가왔다.  그 순간에는 예수님이 나의 전부였다. 먹을 것은 어느 순간에는 사라질 불안한 해결책이지만 그는 사라지지 않는 힘이었다. 또 반대로 먹을 것이 쌓여있어도 늘 평안치 않고 불안하며 사는 게 사람인데 오히려 처참한 순간에 나는 큰 선물을 받은 것이다. 가장 안전하고 평안한 것으로,

어린 나이에 혼자서 십여년을 넘게 서울의 생존전쟁터에서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자주 외롭고 쓸쓸하며 두려웠는지 모른다. 명절이나 연말, 도는 꽃피는 봄, 비 쏟아지는 여름날, 단풍잎이 쌓이는 가을밤, 눈 오는 겨울, 어느 한 순간도 홀로 지내는 객지생활의 고단함을 파고 들지 않는 것이 없었다. 어느 날은 밤새 고독을 달래지 못하고 엉엉울다가 산으로 미친 듯 올라갔다. 달빛아래 몸부림치며 딩굴다가 문득 보니 남의 무덤 너른 풀밭이라 놀라기도 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예수님은 내 곁에 오셨다.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던지 죽던지 뜻대로 하소서” 그 찬송을 수없이 부르는 사이 주님은 나의 외로움 한가운데 머물러 나를 달래셨다. 부모도 형제도, 같은 교회의 성도들도 모두 잠들고 아무도 와줄 수 없는 그 순간의 깊은 외로운 자리에 예수님은 와주시고 머물러 주신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분주하고 외롭지 않은 상태에서도 예수님 이름을 부르기도하고 감사해요! 라고 말도 하지만 솔직히 예수님을 잊어도 그럭저럭 지낸다. 뭐 자주 그러기도하고, 하지만 절절한 외로움의 그 순간에는 아무도 곁에 없고, 오직 예수님만이 나의 전부였다. 그것도 있거나 말거나 별 문제없는 상태가 아니라 죽는냐 사는냐가 달린 절대절명의 대상으로! 

아마도 평상시 나를 둘러 싼 모든 사람들도, 일도, 재산도 모두 언젠가 나를 떠날 것이다. 설사 떠나지 않는다 해도 변함없이 내게 힘만 되지는 않고 나를 괴롭히는 원인이 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없는 그 순간 내 곁에 머물러주신 예수님의 그 관계는 영원히 변하지도 않고 떠나지도 않으실 것을 안다. 그 깊은 외로움이 없었다면 어떻게 내가 그 진실을 이해하고 소중한 것을 따라갈 수 있을까? 

그 외에도 억을할 때, 슬프고 못견딜 때, 아프고 난감할 때, 모든 최악이라고 스스로 좌절하였던 순간마다 예수님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말씀으로 내 곁에 계셨다. 언제나 나의 전부인 존재로! 그러니 나의 가장 힘든 순간들이야 말로 나의 가장 큰 선물들을 받은 대박의 순간이었다. 그리고 가장 안전한 순간이었다. 오직 그의 이름을 부르며 죽자 살자 매달리는 것 밖에 다른 것을 할 수가 없으니...

이제 마지막 남은 한 번의 반전은 예수 없이 사는 사람들이 가장 고통스럽고 두려울 순간, 곧 임종의 순간이다. 그 순간 나는 가장 큰 위로와 소망으로 기뻐할 것이다. 분명히 대박이 날것이다. 눈물과 고통, 이별과 외로움이 영원히 없는 새 세상으로 들어가는 순간이 될테니 말이다.      

내일이면 그 분이 오신 날을 기뻐하는 성탄이브고 다음날이면 환영의 노래를 온 땅에서 불러댈 것이다. 나는 일년 내내 그 분으로 말미암아 힘들고 좌절의 순간마다 오히려 전화위복 시켜주시는 예수님을 만나고 감사의 노래를 부를 것이다. 

오늘도 오시는 주님! 비록 만나기 직전에는 견딜 수 없도록 힘들어지는 게 정말 피하고 싶지만, 그럼에도 그럴수록 더 깊이까지 들어오셔서 오직 유일한 전부가 되어주시는 당신이 고맙습니다. 그리고 환영합니다! 

나의 가장 힘든 순간을 가장 안전하고 평안케 해주시는 분, 임마누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