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주일 오후, 예배드리러 4층에서 7층으로 올라가는 길에 누군가 같은 병실 사람에게 말했다.
“같이 예배드리러 갈래요?”
“전 불교예요! 조상님 믿으면 불교 아닌가요?”
‘그런가? 나도 헷갈린다. 조상을 믿는다는 게 부처님하고 연결이 되나?’ 하면서...
그런데 동시에 ‘참 안되었다. 왜 그런데 매달릴까? 그러니 자꾸 절망감으로 미끄러지면서 살게 되지’ 하는 측은함이 몰려왔다.
조상님들이 자기의 화복을 좌우한다거나, 깨달음을 추구하는 부처를 믿거나, 돈이나 권력, 힘을 믿는 사람들이 불쌍하다. 다음 소망이 없다는 사실이... 성공하여도, 혹은 망하여도 죽음의 날이 가까워올수록 얼마나 허망하고 아깝고 분하며 몸부림을 칠까? 우리는 죽음의 순간이오면 더 좋은 나라로 가기 때문에 기뻐하며 평안할 수 있다. 물론 하나님 계심을 참으로 믿는다면!
병원 생활을 하다보면 예전의 건강하고 풍족했던 생활과 비교를 하면서 한탄하고 절망하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본다. 모든 것이 비극이고 남은 것은 불행과 고통뿐인 내리막이라고 단정을 하면서 말이다. 건강하고 활발한 세상살이를 하면서도 회의와 외로움, 허무로 심하게 시달리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하물며 심신이 망가지고 재정적 형편도 바닥이 난 병상생활에 몰리면 더 할 나위 없다.
그런데 그 속에서도 두 갈래로 나누어지는 신비한 현상을 보게 된다. 오히려 성품이 깊어지고 생명과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을 더해가는 부류들과, 사정없이 불안하며 발악을 하며 망가지기만 하는 부류로, 짐작하겠지만 다음 세상을 믿는 신앙인과, 자신들이 가지거나 다음 세상을 주관하지 못하는 존재를 믿는 사람들로 나뉜다.
그런데 돌아보니 나도 아내도 예전에 건강하고 고난이 없을 때는 간절하지 않았다. 그만큼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이나 기대도 적었었다. 그저 도덕적 율법, 이론적 고상함, 품격 있는 교제 등 어쩌면 세상의 가치관보다 조금 더 폼이 나는 정도였는지 모른다.
정작 알고 있는 진리에 생명이 들어가게 된 것은 아내가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중한 병이 들면서 모든 것이 뒤집어진 고난의 순간부터였다. 아픔이, 육신의 좌절과 포기들이 인내를 키우고, 새로운 것을 간구하면서 눈을 뜨게 되었다. 고난과 절망적 상황은 새 생명을 주기 위한 비움이었던 같다.
그렇게 경험을 하면서 보니 소망이 없는 자의 마지막이 불쌍하다. 그런데 그 엄청난 차이가 꼭 이 세상을 떠나는 그날부터 발생하는 걸까?
아니다. 그 소망으로 이기고 참으며 감사할 수 있으니 사실은 지금 이 순간, 오늘부터 차이가 난다. 표정부터 마음상태, 말과 행동에서 모두 다르다. 복은 다음세상과 그 주인을 믿는 지금부터 작동한다.
그러니 복이다. 감지덕지 은총이고 선물이다. 하나님께 영광! 하나님께 감사!
주일날 예배시간에 펼친 성경에서 예전 아내가 형광펜으로 줄을 그어놓았던 곳이 우연히 펴졌다. 아내에게 보여주면서 말했다.
“오늘 하나님이 숨어서 우리에게 이 말씀을 주시네!”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루겠고 결코 거짓되지 않으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 하박국 2장2-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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