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저것 끄적/날마다 한 생각

누구나 고난을 지고가지만 결과는 다릅니다.

희망으로 2011. 5. 12. 11:40

 

건강하고 넉넉할 때는 오히려 쉽게 나오던 감사와

누구에게도 조리있게 말하던 믿음의 고백들이

정작 필요한 시점의 수렁 속에서는 힘이 나지 않는 경험을 합니다.

때론 믿음의 확신이 모래성처럼 주저앉고 회의가 듭니다.

어느 날은 하루에도 그 변덕스러운 반복을 몇 번도 하게됩니다.

 

예전에 큰소리치던 제 모습을 아는 사람이 본다면

비웃을지도 모르고, 변절자 낙오자라고 손가락질 할지도 모릅니다.

그런 지적을 받아도 할말이 없습니다.


우리가 믿고 따라가는 이 길은 그렇게 역경과 고난을 이기고

심지어 죽음도 이기고 부활하신 승리의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겁없이 권하며 살아왔으니...

 

제 집사람도 잊을만 하면 불쑥 주기적으로 중얼거립니다.

내가 빨리 낫던지 아님 빨리 가야 당신이 살 수 있을 텐데,

너무 고생시켜서 미안해, 아이들에게도...‘,

인사치레인지 미안하다는 사과인지 헷갈리는 말입니다.


그러면 제가 펄쩍 뛰며 그런 소리 말라고 할 것 같지요?

물론 겉으로는 그럽니다. 그러나 속마음은 말릴 틈도 없이

이렇게 속삭입니다.

맞아, 그랬으면 좋겠어. 나도 힘들고 아이들도 힘들어!

나으면 더 좋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중에도 효자 효부들이 많고

하나님 소리 꺼내기 민망할만큼 희생적이고 남을 위해 사는

존경할만한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러니 수고와 헌신만으로 하늘나라 입성의 자격이 주어지거나

믿음 있는 이쁜 자녀로 칭찬 받지는 않을거라 생각합니다.

아무리 의롭고 착하게 살아도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곳으로 갈 소망을 가지지 않으면 결코 못 간다고 들었습니다.


그런점에서는 전 천국 갈 자격 있습니다.

이 고난이 끝나면 빨리 가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이니까요.

결코 행위나 고난의 크기 때문도 아니고 자랑스럽게 견딘 댓가가 아니고요.

 

사실 손톱 밑에 박힌 가시나 팔다리가 잘린 고통이나 같습니다.

객관적으로야 엄연히 다르지요. 하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이 그렇게 느끼면

그건 같아집니다.

 

이렇게 다른 비유를 말하면 좀더 쉬워질까요?

50평 아파트를 가진 사람이 부자촌에서 80100평 가진 이웃들 속에서

민망해하고 위축되어 살면서 좀 더 벌거나 큰 평수로 옮기지 못하는 불만을

안고 살아간다면 그는 가난한 사람입니다.

가난하니 그늘지고 불평을 얼굴에 달고 사는 불쌍한 사람이 분명합니다.


20평 사는 사람이 비바람 피하고 따뜻한 보금자리를 더 가난한 사람 때문에

미안해하며 고맙게 생각하며 사는 사람은 좁지도 불행하지도 않은 부자입니다.

늘 감사할 것이고 어깨를 펴고 밝은 얼굴로 살 것입니다.

어쩌면 남을 도울 수 있다고 주제 넘게 베풀지도 모릅니다.

 

병원 생활을 하도 여러곳을 다니며 별의별 사람을 만나다보니

겉으로는 1급 위의 특급장애인 사람이 넉넉한 사람도 보았습니다.

반대로 좀 불편하긴 해도 제발로 걷고 밥 먹고 대소변도 잘보면서도

내일 모레 세상떠날 사람보다 더 긴 한숨과 불평하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얼마나 화가 나는지 어떤 때는 욱! 하고 퍼붇고 싶은걸 참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그게 실상이고 진실인지도 모릅니다.

앞에 말한 사람은 신체1급과 심령 무급의 종합판정 건강한 사람이고,

뒤의 사람은 신체6급과 심령1급의 장애인일수 있습니다.

 

누구나 자기의 짐은 가장 무겁고 힘들게 느낍니다.

그러므로 객관적 우열이나 순서는 없습니다.

어떻게 자기진단을 내리고 자기가 승복하는냐에 달렸습니다.

 

물론 이렇게 말하더라도 절대적인 치료 대상으로의 등급도 있고

안전과 위험의 정도가 다른 것은 분명 별개로 있습니다.

생명의 위협을 받는 절대적빈곤의 위험을 마음 편하게 생각한다고

방치하거나 잘살아보라고 덕담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천국가는 기준에는 그것도 예외가 아닙니다.

건강한 사람은 갑자기 안 죽습니까?

온갖 자연피해와 사고로 날마다 비명횡사를 하는 뉴스를 본다면...

 

그래서 답은 없지만 고통중의 사람들이 회의와 기도, 두 세계를 오가며 견디시는

귀한(제게는 정말 귀중한 과정으로 보입니다) 모습이나,

그 아프고 힘든 싸움을 응원하시며 자신을 돌아보시는 분들의 모습이나

똑같이 천국에 보석을 만들고 계신 분들입니다.

무게의 차이도 공로의 차이도 없는 똑같은 자녀로!


다만 바라기는 기도는 응답의 결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의무나 믿음의 깊이로 하는 것만이 아니기를 제 스스로 다짐합니다.

기도는 기도하는 그 자체로 힘이 되고,

아버지께 수시로 호소하는 비명이 되어도 좋아하신다고 믿습니다.


때때로 자살하고픈 유혹을 다시 삼키며 사는 날에

무슨 모양을 따지고 신학의 정의를 깔고 할 여유가 있겠습니까?

제게는 그렇습니다.

 

어떤 부모가 자식이 피를 철철 흘리고 온몸이 멍이 들어가지고도,

조리 있게, 조용조용 폼나게 하는 설명을 듣고자 할까요?

어서 들쳐업고 병원부터 가겠지요.

 

아버지! 제가 오늘도 여기가 깨졌어요!

어서 호! 해주시고 어서 아무 일 없다는 듯 헤헤거리고 살게 해주세요!

지금 자고 있어요? 왜 대답을 안해주세요?

설마 저 주워 온 아들은 아니지요? 그럼 어서 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