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투병일기

안락사의 길을 스스로 선택한 다발성난치병 가족들...

희망으로 2010. 8. 13. 22:27

누가 이들에게 쉬운 말로 돌을 던질수 있을까?

과연 겪어보지도,

단 한번도 의사로부터 아무 방법이 없다는 선고를 들은 적도 없고,

전신마비 상태로 도움을 받거나 간병을 해본 적도 없으면서

'생명의 존엄성' '남은자들을 위해' 운운 하지말라!

그길이 얼마나 힘들고 무서운 시간들인지 모르면서...

누군들 다 죽지만 고통을 동반해서 야금야금 온 가족을 찌그려가는

죽음의 여행은 그리 쉽지도 미담의 소재도 아니다.

다만 싸움일뿐! 그것도 지는것이 결정된 싸움... 

기적이 있다면 낫는길도 있지만

수용하고 남은 시간을 덜 파괴되면서 보낼수 있게 되는 기적도 필요하다.

내가 경험한 시간들을 돌아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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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락사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떠밀려서 이루어진 강요의 성격을 지니게 되는 것은 개인주의 문화가 죽음 앞에서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결과이다. 죽음의 과정이 길면 길수록 그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남은 삶과 죽음을 옆에서 돌봐줄 손길이 절실히 필요해진다. 그러나 가족관계마저도 개인주의에 의해 흐트러져버린 서구에서 죽음이란 이제 혼자서 겪어야만 하는 일이 되어버렸다. 어떤 사람에게 갑자기 말기암 진단이 내려지자 친구들과 애인이 일시에 떠나버리거나 자식들이 연락을 끊는 일은 흔한 일이 되었고, 거동이 불편한 노인이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요양소에서 간호사들의 기계적인 처치를 받으며 죽어가는 것도 일상적인 일이 되었다. 말기암과 같은 중병을 앓는 사람, 요양소에 들어간 노인들은 모두 혼자 고독하게 죽어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 된 것이다. 이때 이들에게 남은 삶이 얼마나 의미있는 것일까? 자신의 삶과 죽음에 대해 이런저런 대화를 통해 정리하면서 위안받을 기회도 박탈당한 채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에 의해 마치 물건처럼 취급당하다가 죽어가는 것을 상상해보라. 그럴 바에는 무의미하게 몇년 더 사는 것보다 편안하고 위엄있는 안락사를 선택하는 것이 불가피하지 않을까? 물론 이 선택은 떠밀려서 이루어진 강제적 성격을 지니기 때문에, 상황이 달라지면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유럽에서 호스피스에게 맡겨진 시한부 환자들은 모두 안락사보다는 자연사를 선호한다고 한다. 물론 호스피스에서도 환자들은 가끔 이제 더이상 살기 싫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건 일시적인 기분의 표출이지 호스피스 봉사자들의 따뜻한 보살핌 아래에서는 아무도 진정으로 안락사를 원하지는 않는다. 너무 고통스러울 때는 고통을 줄여주는 처치를 받고, 죽음에 대한 공포로 견디기 어려울 때면 호스피스 봉사자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조금씩 죽음을 맞이하는 법을 배워가다가 자연사하는 것이다. 네덜란드에서는 국민의 90%, 독일에서는 70% 가까이 안락사에 찬성한다지만, 이는 이들이 나중에 혼자 고통스럽게 죽어가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병상에 꼼짝못하고 누워서 호흡기계와 약물의 도움으로 생명을 연장받게 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은 안락사를 합법화함으로써 아무도 자신을 돌보지 않는 끔찍한 상황, 온갖 기계에 둘러싸여 강제로 생명이 연장되는 상황을 면해보려는 것이다.

네덜란드의 서른다섯살 난 어느 여인은 다발성 경화증(multiple sclerosis)에 걸린 후 열한살 난 딸과 남편을 남겨두고 프랭크 시나트라의 「마이 웨이」를 들으며 안락사했다고 한다. 그녀는 아직 꽤 오래 더 살 수도 있었지만 요양소에서 구차한 목숨을 연명하기보다 '위엄있게' 죽는 쪽을 택했다. 남편도 물론 아내의 안락사에 찬성이었는데, 그는 “내 아내는 다시 건강해질 수 없고 시간이 흐를수록 마비가 심해지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한 삶은 신이 뜻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로 아내의 안락사를 정당화했다. 그녀는 자신의 병이 좀더 진행되면 남편이 아이와 함께 떠나버리고 자신은 요양소로 보내지는 수순을 예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삶이란 자기실현이 가능할 때, 스스로 자기 길을 결정해가며 살 때에만 의미있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그녀에게 요양소에서 혼자 죽음을 기다리며 사는 삶, 밖으로부터 결정지어진 삶, 자기실현이 불가능한 삶은 당연히 무의미할 터이니, 남은 것은 안락사밖에 없었으리라.

안락사를 선택하는 것과 공학적 치료기술이 중환자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상황이 무슨 상관이 있을까? 병원의 중환자실에 처음 가본 사람이라면 그곳에서 인간과 기계가 공존하는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인간은 호흡조절기, 영양제 공급기, 심장박동 측정기, 심전도 측정기 등의 기계에 둘러싸여 생명을 연장받는다. 여기서 기계와 인간은 일체가 되어서 움직인다. 아니 기계가 정지하면 인간도 정지하기 때문에, 인간이 기계의 통제를 받으며 움직인다는 말이 정확하리라. 건강한 사람 가운데 누가 자신이 더이상 살아가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을 때 그러한 기계의 도움을 받아서 생명을 연장받기를 원하겠는가? 이들은 차라리 기계에 둘러싸여서 조금 더 살 바에는 그렇게 되기 전에 죽음을 택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중환자 담당의사들은 기계에 의존한 집중적인 치료가 환자를 회복시키는 경우도 있다고 말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것은 끔찍한 고문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기계로 생명연장을 하는 것보다 '자비로운 살인'을 통해서 죽는 것을 더 편안하고 위엄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기계를 통한 생명연장은 흔히 환자가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환자의 선택이 배제된 채 이루어진다. 그러나 환자에게 의식이 있고 스스로 자신의 상태를 자각하고 있는 경우라면 환자가 기계를 거부할 수도 있지 않을까? 또는 보호자가 여러 사정을 고려해서 기계사용 중단을 요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환자는 거부하지만 보호자는 계속 치료할 것을 주장하거나 환자는 원하지만 보호자가 치료 중단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들 모두 기계를 거부하는 것이 죽음을 앞당긴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해도 말이다. 여기서 환자, 의사, 보호자들 사이에 갈등과 딜레마가 발생한다. 이러한 갈등과 딜레마야말로 고도로 발달한 공학적 의료기술, 인간의 과도한 기술의존이 사회적으로 어떤 문제를 초래할 수 있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기술에 의존하면 좀더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다. 그러나 기술을 거부하고 죽었을 경우 단순한 자연사로 인정되는 것일까? 환자로부터 며칠 또는 몇달의 삶을 빼앗은 것이기 때문에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을 저질렀다는 혐의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환자는 기계를 달고서라도 좀더 살고 싶은데 보호자는 여러 사정 때문에 기계사용을 중단시키려 한다거나, 보호자가 환자의 사정도 고려하지 않은 채 무조건 기계를 통해서 생명을 연장시키려 한다면? 의사도 비슷한 딜레마를 겪는다. 보호자나 환자의 요구를 받아들여서 소생의 희망이 없는데도 기계를 계속 들이대는 것이 옳은지 자연사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바람직한지 갈피를 잡기가 어렵다. 이렇게 단지 기술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로 인해 심각한 갈등이 발생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