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행복은 진짜행복? 가짜행복?>
“와! ㅇㅇ이가 걷는 속도가 빨라졌던데!”
“맞아! 계단도 걸어 오르기 시작했어!”
“역시 나이가 어리니까 재활치료 효과가 빨라”
다들 이구동성으로 칭찬을 했다.
우리와 같은 병실에 있는 20대 초반 여자아이에 대한 감탄들이었다.
그러나 내 속감정은 아주 매몰찼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그놈의 지랄 성질이나 좀 덜 내면 좋겠다 에휴…’
그랬다. 그 아이가 종종 험한 욕을 하고 난동을 피운 미운 기억때문에 더 그랬다
나는 남이 잘되는 일에 시샘을 하는 성격은 아니지만 이 아이에겐 그랬다
뭐 평소 남들 잘되는 일에 내 일보다 더 기뻐하는 편도 아니었던 것 같다
별로 착하지못한 냉정하고 무심한 성격이라 늘 그랬다
남의 일은 남의 일이고 내가 잘되어야 기쁜 일이지 뭐… 그런 냉소적 태도?
“어떻게 다쳤어요?”
“뇌종양 수술을 했는데… 후유증으로 하반신이 마비되었어요”
“아, 그러셨구나…ㅠ”
아내가 느닷없이 옆 재활매트 테이블에서 치료를 준비하는 청년에게 던진 질문에 돌아 온 답이었다. 서른 안팎으로 보이는 그 젊은이는 참 말이 없지만 늘 밝고 안정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나는 아주 오랜 시간을 스치며 무심했다. 휠체어를 타고 늘 혼자 재활치료용 테이블을 먼지털이로 쓸고 애쓰는 것을 그냥 흘려보았다. 심지어 아내처럼 물어본 적도 없고 궁금해 한 적도 없었다.
“제 아내도 척수염증으로 사지마비가 왔었어요”
나도 한마디 해주며 그 젊은 나이에 뇌종양이라는 무서운 병에 걸리고 수술 후유증으로 휠체어로 사는 인생이 된 것이 맘이 아프고 딱했다. 교통사고나 산재사고는 그래도 어느정도 보상이라도 해주지만 개인 질병은 아무 보상이 없다. 그 점이 질병으로 인생을 망치는 사람들의 또다른 고통이고 무거운 후유증이다.
시샘하거나 냉소적 무심, 이 두가지 감정을 거의 하루차이로 연달아 겪으며 문득 난 참 몹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의 잘되는 일에도 기뻐하지 못하고 남의 슬픈 일에도 딱하게 여기지 못하는… 예수님은 우는 이웃과 함께 울고 웃는 이웃과 함께 기뻐하라! 했는데 난 그런 점에서는 기독교신앙인으로 자격미달이고 우리를 가르치고 기대하실 예수님께도 좀 미안하다.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 무엇이냐는 제자들의 질문에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행복에는 가짜행복과 진짜행복이 있다. 하루종일 굶다가 먹는 한끼의 배부름, 목말라 죽을 것 같다가 마시는 물 한모금, 가난에 찌들 때 생긴 돈, 죽을 뻔하다가 살아 난 요행 등 무엇인가 결핍을 전제로 한 행복은 가짜행복이다. 또다른 하나는 길을 가다 길가에 핀 너무도 예쁜 꽃을 발견하고 설레는 감정, 맑고 시원한 밤 친구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보던 밤하늘의 별에 대한 감정, 좋은 음악 책, 그림 등을 보며 느끼는 감동, 상대는 나를 모르지만 잘되기를 열심히 응원하는 심정, 그런 행복감은 진짜 행복이다.’ 라고. 그러면서 그는 덧붙였다. “이 진짜행복과 가짜행복을 구별할 줄 알면서 진짜행복을 늘려가는 인생을 사는 것이 행복해지는 비결이자 지혜다”
그 말을 듣고 곰곰 돌아보면서 나는 참 오랜 세월을 가짜행복을 반복하며 물들어 살아 온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심한 불행과 고난을 견뎌내면서 거의 습관처럼 되었다. ‘이 정도도 어디야? 더 심하지 않아서 행복하다!’ 그러면서 온갖 고비들을 넘기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런 태도나 생각이 물론 많은 도움이 되었고 미치지도 죽지도 않으면서 살아 남은 비결도 되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온통 가짜행복 감정과 시선으로 망가진 것 같다. ‘안굶어 죽으면 행복한줄 알아야지! 암만, 이 정도도 기적이야! 망하지 않고 살아 남았으니…’ 자꾸 스스로 적용하는 감사의 기준은 그렇게 낮아지다 문턱도 아예 없어지고, 죽지만 않으면 모든 것은 땡큐! 라고 세뇌하듯 반복했다. 문제는 나도 모르게 내 아내나 자녀, 가족만 아니라 가까운 지인들에게도 그런 기준으로 보고 적용하는 나를 느낄 때다.
그런데… 정말 그런 기준, 그런 감정이 행복한 것이 맞을까? 내 문제가 아니면 관심도 멀어지고 누가 웃는지 우는지 살펴볼 그럴 여유도 없어졌다. 많은 사람들에게 입만 열면 하는 말이 ‘죽을뻔 했는데 살아난’ 이야기였다. 죽을 병에서 안 죽고 살아가니 기적, 굶고 망할 형편에서 안 망하고 버티니 복! 이라는… 온통 내가 중심이고 내가 전부다. 결핍 충족된 이야기로.
기독교 신앙에서 간증이란게 대부분 그런 종류다. 그래서 그 이야기들이 신의 존재입증이 되고 믿음의 대가로 사랑받았다고 조명되고... 교회는 점점 그런 간증으로 넘쳐나고 심지어 그 사례가 늘어나는 것이 교회나 신앙의 목적이나 목표가 되기도 한다. 더 나가 은근히 무슨 은행의 좋은 상품처럼 그런 사례를 겪기를권하기까지 한다. 참 신앙의 본질은 그런 것이 아닌데…
하나님도 성공신화나 결핍극복 행복만을 강조하지는 않았다. 서로 돌보고 함께 하늘나라를 이루라는 본질을 늘 강조했지 않나? 웃는자와 웃고 우는자와 함께 울라는 것은 다른 사람의 형편을 무심하게 보지말라는 말이 아닌가? 예수님은 남을 구덩이에 빠트리면 그 사람은 더 심한 벌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 연자맷돌을 목에 달아 바다에 빠트린다고도 했던가? 바울은 심지어 다른 사람이 천국가게 할수있다면 자신은 지옥을 가더라도 감수하겠다고 했다.
[롬 9:1- 나의 겨레 이스라엘 사람들이여! 나의 동족 유대인들이여!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나아가기를 내가 얼마나 원하고 있는지 여러분은 모를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들 때문에 밤낮 마음이 무겁고 슬픔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습니다. 만일 나의 영원한 파멸이 여러분에게 구원을 가져올 수 있다면 나는 차라리 그 편을 택할 것입니다.]
나는 이전에 기독교방송 새롭게하소서에 출연하여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러니 그대 쓰러지지 말아’라는 제목의 간병일기 책도 출간했다. 그러고보니 나도 간증이라는 형식으로 나 자신의 극복사례가 마치 감사 이유고 행복이었다는 논리로 참 많이 말했다. 많은 이들이 그 이야기에 위로가 되고 힘을 얻기도 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랬을지 모른다. 나도 늘 그런 사례를 찾아가며 듣고 보고 용기를 얻기도 했고 기대했다. 나도 그렇게 해달라고 조르며 기도도 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나 자신에게 다시 물어보면서 이제는 좀 다른 행복을 더 빌고 싶어졌다. 나만 바라보며 나의 형편이 온통 감사나 원망, 불행과 행복의 기준이 되는 생활에서 좀 옮겨가고 싶다고. 남들의 기쁨과 슬픔, 아픔과 성공도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 오고 응원할 수 있게 해달라고 빌고 싶다. 길가의 꽃과 밤하늘의 별들, 좋은 음악과 그림에 감동하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느낄 수 있게 해달라고… 다른 이들이 모두 잘풀린다면 내가 지금은 좀 힘들더라도 차분하게, 너무 요란하게 소리 지르지 않고 살 수 있기를…
“하나님, 저를 진짜행복을 느끼며 살게 도와주세요!
있는 그대로 보고 느끼고, 남들과도 함께 살아 가는 진짜행복을 점점 늘려가게 해주세요. 아멘!”
*사진설명 - 권정생 선생님이 종을 치던 곳에 세워진 글.
다른 사람, 자연까지 떠올리며 추운 날도 장갑도 끼지 않으셨다는…
2021.06.10
'이것저것 끄적 > 길을 가는 사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때 그곳, 사본들(타임 스페이스 버전) (0) | 2021.07.26 |
---|---|
이 초라한 나도 쓸모가 있다니! (0) | 2021.07.26 |
37년하고도 364일, 그 전날 밤까지도 그랬다 (0) | 2021.07.26 |
짐... (0) | 2021.07.26 |
다시 보는 실화극장 - '그러니 그대 쓰러지지 말아; (0) | 2021.07.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