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속에서는 숲이 보이지 않는다>
산속에서 헤맬 때는 숲 전체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길을 잃고 방황한다.
멀리 밖에서 숲 전체가 보이는 사람은 그런다
“거기서 왼쪽으로 조금 더 가서 내려오면 돼!
얼마 더 가면 마을이 나타날거야!” 라고.
어느쪽으로 얼마 정도 후에는 벗어날 수 있다는 걸
숲 전체를 보는 사람은 말할 수 있다.
그 안에서 헤매는 사람에게는 도무지 안보이지만...
다윗이 밧세바를 탐내고 죄의 숲 안으로 들어갔을 때
산 전체를 볼 수 없었다.
자기가 지금 어디쯤에 있고 계속 그 방향으로 가면
앞으로 얼마나 더 깊은 곳으로 가게 되어
자칫 조난을 당해 죽을지도 모르는데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자꾸 깊이 들어가다가 겨우 살아났다.
나단이라는 조력자가 숲을 보여주는 덕분에.
아내의 발병 첫 해 겨울, 새해가 되었지만 상황은 더 나빠졌다.
겨울방학 중인 초등학교 마지막 학기인 막내 딸아이를
강원도 정동진 깊은 산 속 기도원에 데려와
엄마 곁을 지키게 하고 나는 직장을 가야했다.
기도원에 내야할 방값 밦갑 외에도 최소한의 생활비는
여전히 필요했고 강원도 기도원과 충주 직장을 오갈 차의
기름값과 통행료도 바닥이 날만큼 지갑은 비어 있었다.
“아빠! 엄마가 넘어져 얼굴이 다쳤어 ㅠ”
어느 날 아이는 울상이 되어 고개를 숙이고 울먹였다.
아내는 환청에 시달리며 사지가 마비되기 시작한 몸을 끌고
기도원 옆 산에 만들어진 작은 움막으로 날마다 갔다.
하루에 500번씩 ‘주여!’를 외치고 찬송과 기도로 싸우는 중이었다.
그러다 불편한 다리를 잘못 딛어 경사진 길에서 자빠졌다고...
우는 아이와 팔과 이마에 상처를 입은 아내를 바라보며
겉으로는 괜찮다 다행이다를 말하면서도 속은 절망감이 몰려왔다.
병원을 떠도느라 돌볼 수도 없고 곁을 지켜주지 못할 어린 딸은 어떻게 하며
몸도 가누지 못하고 점점 심해지는 아내는 또 어떻게 하고
일하고 돈을 벌어야 유지될 생활은 또 어떻게 끌고 갈 것인지
나 혼자서 그 모두를 감당해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앞은 캄캄하고 체력은 기진맥진한데 서러움은 파도처럼 몰려왔다.
새벽에 기도원 성전으로 가서 두어시간을 울다 잠들었다 반복하며
간신히 차를 끌고 주말에 다시 만날 약속만 남기고 장거리 출근을 해야 했다.
그때 1월은 새해 첫달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최악이고 마지막 달 같았다.
산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느라 숲 전체가 보이지 않는 위험한 상태였다.
다윗은 처음 잘못된 길을 들어가 밧세바와 정을 통한 후
부하이자 밧세바의 남편인 우리야장군을 죽일 생각까지는 아니었다.
그냥 휴가를 주어 밧세바와 동침케 한 후 아이를 가진 것처럼 속이면
될 것 같아 잔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일은 점저 꼬여 강직한 우리야장군은 그 예상을 빗나갔고
다윗은 초조해져 점점 깊은 산 속으로 길을 잃고 깊이 들어가고 있었다.
기어이 최전방으로 내몰아 우리야를 죽게 하는 무리수를 벌였다.
그리고도 감각이 마비된 다윗은 밧세바와 동침하며
하나님의 길에서 이탈하여 죄의 산에서 미아가 되어 버렸다.
나단이 가난한 이웃집 양을 잡는 악하고 치사한 부자 이야기를 하고
분노하는 다윗에게 ‘당신이 그 사람입니다!’ 라고 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자신의 눈으로 숲 전체를 보지 못하던 다윗에게 나단이 숲을 보여줬다.
그제서야 자기가 지금 어디쯤에 와있고 더 헤매이면 어떻게 될지
전체가 보였고 회개와 유턴으로 살아날 길로 갈 수 있었다.
나는 완전히 캄캄한 산속에 버려진 듯한 상황에서 나갈 길이 안보였고
몸과 마음은 지칠대로 지쳤고 조난상태에서 희망도 안생겼다.
그 탈진된 낙오자에게 성경은 정말 딱 하나뿐인 불빛으로 다가왔다.
사실 성경은 숲 전체를 언제나 보여주고 말해주고 있었지만
너무 지치거나 너무 자기 편안에 빠져 지낼 때는 그 사실이 안보였다.
그때 어렴풋이라도 주저앉지 않고 기운을 내어 길을 찾게한 구절이
창세기 1장 1절이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니라’ 는 말씀.
나의 생명도 우리 가족의 생명도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라는
실감이30년 신앙생활에 가장 믿어지는 신기한 은총이었다.
마치 다윗이 나단에게 ‘당신이 그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보이던
숲 전체의 시야처럼 내게도 불안과 공포의 어둠이 조금은 걷어졌다.
그래서 어쩌면 살 것 같았고 하나님이 책임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제야 겨우 숨을 쉴 정도로 위안이 되었다.
막내딸을 다시 학교로 보내고 그 자리를 둘째 아들을 불러 교대시켰다.
물론 그 뒤로도 언덕과 우거진 나무를 헤치고 길 아닌 길을 지나며
고통스러운 고비를 수도 없이 넘겨야 했지만 이전보다는 나았다.
십여년도 더 지난 지금 아내는 그때의 고비와는 다른 벽을 넘고 있다.
급성은 벗어났지만 계속 내리막을 내려가는 투병으로 약해지고 있다.
생명의 불꽃이 마치 양초가 줄어들듯 약해져가고 있다.
점점 회복 기운이 줄어들어 한번 걸리는 감기도 두어달씩 간다.
담당 의사선생님도 회진을 할때마다 난색을 하신다.
종일 침대에 누운채로 재활치료실도 갈 기운이 없어 치료사 선생님이
침대로 와서 해주는 딱 한번의 치료가 전부인채로 하루를 보낸다.
그 와중에도 먹고 치러야하는 배변과 머리 감는 일이 큰 일이 되었다.
그 일을 치르고 녹초가 되어 이삼일을 또 퍼져버린다.
꼬리가 꼬리를 무는 악순환의 날들이 점점 일상이 되어가는 슬픔...
그러나 이전에 그랬던 경우처럼 우리의 조난은 조난으로 끝나지 않을거다.
전체 숲을 보여주는 성경과 약속이 항상 우리를 두려움에서 깨워주고
십년전 그 당시 막막했던 아이들 걱정과 생존의 문제를 덜어주셨던 것처럼.
또 다른 낯선 산 속을 헤매기는 하지만 지금 이 1월, 새해의 첫달도
이전에 넘었던 것처럼 넘게 해주실 것이다.
산 속에서는 숲을 못보지만 우리에게는 어디로 얼마나 가면
이 미로를 벗어나 넓고 푸른 초장을 만나게 될지 알려주는
나단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니까!
잠시만 방심하면 나무들 사이에 가두고 빛을 가리워버리는 우울증과
당장의 눈앞 길에 갇혀버리는 두려움만 조심하면 된다.
조난에 대한 두려움과 조급함은 길을 잃은 사람들을 더 위험하게 한다.
그 상황을 잊지않고 조심하기만 하면 반드시 구조를 받을 것이다.
“본부 나와라! 여기는 50에서 60번 산 속 1월 위치에 있다!
어느 방향으로 가면 얼마 뒤에 푸른 초장을 만날 수 있나? 오바!”
* 사진1 - 눈이 쏟아진 정동진 산 속 기도원, 저 본당에서 기도후 충주로 출근했다.
기도원 뒤쪽 산기슭에 작은 기도실이 여럿 있었고 아내는 날마다 그곳으로 출근했다.
* 사진2 - 종종 기도원 예배당에 쓰러졌던 아내, 다칠 때도 그랬을거다.
2021.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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