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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아버지가 있었어요...

희망으로 2020. 6. 14. 11:08

<저도 아버지가 있었어요...>

 

어릴 때 아버지는 꼬여버린 사업실패의 후유증으로 엄마를 무지 괴롭혔지요. 경주에서 할아버지의 명성으로 당시 인텔리인 인천경찰전문학교를 나와 6.25전쟁때는 장교로 근무하고 화랑무공훈장을 받아 국가유공자를 우리에게 남겨주신 경력과 추락된 말년의 삶은 너무 격차가 벌어져 아마 많이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자주 폭언과 잠 못자게 밤새도록 엄마를 괴롭히는 걸 못견뎌 엄마와 도망가려고 시골기차역에서 하루종일 앉았다가 결국 실행은 못하고 밤에 다시 집으로 귀가했던 기억은 제 평생가는 아버지에 대한 미운 감정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초등학교도 졸업시키지 못하고 붕 떠버린 제 학력때문에 늘 자책하던 아버지가 보기 딱해 무려 초,중,고를 모두 검정고시 독학으로 마치고 대학까지 입학해 아버지의 한을 풀어드렸지만 대장암에 걸려 우리 가족의 협심노력에도 불구하고 아파트 15층 옥상에서 몸을 던지신 그 해의 기억은 악몽이자 슬픔으로 자리잡았습니다. 도대체 아버지라는 자리와 책임은 어떤 모습이라야 하는가 회의도 들고 수용하기가 힘들었지요. 그런데... 내가 아버지의 나이에 가까워지고 몸의 질병들, 삶의 고단함, 가장이라는 책임감이 늘 내리누르니 자꾸만 그때는 몰랐던 아버지의 심정이 이해가 되기 시작합니다. 내가 아버지가 되어보니 아버지도 결코 완벽하지도 못하고 강하게만 살아지지 않는 연약한 늙은 남자일뿐이더라는 확인에 씁쓸하고 동시에 아버지 살아 생전에 이해해드리지 못한 미안함도 몰려옵니다. 

 

나는 아이들에게 미리 나의 감정, 한계를 털어놓아야겠다. 결심하고 스무살이 넘는 시기부터 솔직하게 보여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잃은 것은 무서운 아버지의 권위고 얻은 것은 ‘걱정맨’이라는 별명과 놀림과 조금의 이해? 가까운 관계의 친밀감입니다. 그리고 노력하는 제 모습을 인정하는 편입니다. 나라면 아버지 같이 못할거 같다는 돌려서 말하는 칭찬도 자식에게 들었습니다. 나는 살기가 편합니다. 굳이 숨기면서 부작용으로 폭발하는 모습을 안보여도 되고 이중성격으로 거리감이 생길 위험도 없어졌습니다. 아버지처럼은 안살겠다는 오랜 결심이 가져다 준 좋은 결과이면서 좀 더 능력있고 안정감 있는 가정을 제공하지 못한 미안함도 많습니다만...

 

아버지에 대한 여러 감회, 생각들이 종합으로는 죄와 결점 투성이의 약한 사람을 인정할 수있게 해주었습니다. 부모와 좋은 기억 안좋은 기억 등 숱한 상처나 추억을 가지고 그 부모의 입장에서 다시 자녀들과 생을 이어가는 분들이 궁금합니다. 다른 가정, 다른 신앙인들은 어떻게 마무리를 지어가실까 그런... 오랫만에 속에 담고 있던 긴 시간에 얽힌 기억 감정 생각들을 돌아보았습니다. 이야기를 꺼내주신 씨옵글님과 갈대님 덕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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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글 17개

 예쁜아줌마 (2020.06.04 오전 11:41:31)  PC

답변

완벽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이고 싶었던 것이겠죠?
아버지도 그저 한 사람인 것을 나이가 드니까 알겠더라구요...오늘따라 아버지 얘기들이 많으시니
저도 우리 시아버님이 그립네요..

   희망으로 (2020.06.04 오후 12:28:19)  P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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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요.
자식들의 아버지에 대한 환상,
아버지가 자식에 대한 책임과 권위...
잘풀리면 정말 좋은 관계로 아름답고
잘못 꼬이면 평생의 상처와 불행한 자책으로 슬픈 결말이 되지요.
다 연약한 사람의 삶인데...

 뷰티 (2020.06.04 오전 11:44:08)  P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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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버님을 칭찬합니다.
희망으로님 같은 귀한 아들을 두셨으니..
희망으로님 같은 아버지을 둔 자녀들도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힘듦이 없어서도 아니고 아프고 힘들지만 또 일어서고 애쓰는 모습을 통해
저에게 희망을 안겨주는 귀한 친구가 되어주셔서 넘 감사합니다.

   희망으로 (2020.06.04 오후 12:31:01)  P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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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제가 공부도 잘하고 아버지의 자랑이었나봅니다.
그런데 원치않게 망가져버린 자기의 말년과
휩쓸려 망쳐버린 자식인 저의 처지가 많이 괴로웠나봅니다.
그 시절에는 흔했던 가족들의 처참한 생존을 이어나가느라 더...
자부심이 클수록 추락하면 고통이 커진다는 걸 저도 많이 경험합니다.
덕분에 아버지의 아픈 마음을 한결 이해하게 되고요

 brokenreed (2020.06.04 오전 11:44:39)  andro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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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사님의 인생은 한편의 대하 드라마 같습니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아버지의 약함도 이해하시고 자녀들에게 더 좋은 아버지가 되시려는 모습이 귀합니다.
저는 좋은 아빠가 되려는 생각은 없구요.. 그냥 제 인생 살기도 벅찹니다 ㅎ
아이들에게 하는 말이라곤... 인생을 거룩하게 살려 하지 말고 즐겁고 행복하게 살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라는 것.. 덧붙여 아빠 돈은 아빠꺼니까 탐내지도 빌붙지도 말라는 것.. 뭐 그런 얘기만 강조 해줍니다

   희망으로 (2020.06.04 오후 12:35:16)  P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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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젊을 때는 아버지를 이해 못했어요.
나는 나중에 결혼하면 아내에게 그렇게 안할거라는 각오와,
신앙을 가지면서는 더더욱 무신교의 아버지 철학, 삶의 가치가 싫었고요.
그런데 내가 원하는대로 안풀리고 이 지경이 되면서 알았지요.
남자가, 가장이 노력이나 희망대로 삶이 풀리지 않으면 어찌 되는지,
가장 싫었던 암투병의 파탄도 내가 ㅇ아파보니 그러고 싶다는 생각이 자주 들면서
결정적으로 아버지 심장 속 깊은 곳의 그늘, 외로움이 보여 많이 그립더군요.
좀 덜 미워하고 덜 냉냉하게 대하고 따뜻하게 이해해드리지 못하고...ㅠ

 sea of glass (2020.06.04 오전 11:50:35)  andro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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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른 집사님의 스토리를 듣는 호사를 누립니다.
비록 당시에는 말할 수 없이 아프고 힘들었던 일들에 대한
기억이시겠지만...

   희망으로 (2020.06.04 오후 1:09:48)  P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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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마흔 가까이 까지 이해보다는 상처와 원망으로
무시하는 편이었지요.
아버지의 노력과 어릴 때 나를 책임지고 키워주신 진심을.
그 고마움을 알 길 없으니...
돌아가시고 한참 지나면서 이해가 되기 시작했지요.
아무리 빨라도 종종 늦은 게 부모님에 대한 마음이라더니...

 새벽이슬 (2020.06.04 오전 11:50:53)  P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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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아버지 이야기기 시리즈로 나오네요.
집사님 아버지도 참 힘든 삶을 살다가 가셨네요.
그 시대는 다 그렇게 사셨으니 우짭니꺼?
이 시대에 태어난 우리는 늘 감사하며 살아야지요

요즘은 좀 평안하십니까?
제가 집사님의 평안을 위해서 늘 기도하고 있습니다.

   희망으로 (2020.06.04 오후 1:10:51)  P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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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기도해주시니
늘 감사합니다! ^^
요즘 아이들은 나중에 또 그러겠지요?
어릴 때는 부모님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

 물맷돌 (2020.06.04 오후 12:19:38)  P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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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박!~
장교에다 화랑무공훈장까지 받으셨다고요?....
그 이후의 삶 속에서 무척 힘드셨겠네요!~

밴드오브브라더스의 그 훌륭했던 이지중대 중대장이었던
윈터스도 민간인으로 돌아가서는 그렇게 빛을 못 보더군요!~
훌륭한 장교가 사회에서도 훌륭해야 한다는 압박감...
그로인해 받는 스트레스도 크셨지 싶습니다.

   희망으로 (2020.06.04 오후 1:20:57)  P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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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할아버지가 그 근처의 넓은 땅을 다 가지신 부자였고
말을 타고 포수 모자 같은 걸 쓰고 산림 관리를 하러 다니신 사진도 보았지요.
그런데 해방되고 전쟁나고 하면서 무슨 연유인지 그 많던 땅을 하나 둘 팔아치우시고
아버지 대에서 몰락하신 것 같아요.
그래도 워낙 아버지가 청년시절은 잘 나가셔서 남은 흔적들이 경력이었지요.
언젠가 아버지를 모시고 인천으로 보훈등록하러 가면서 알았습니다.
인천경찰전문학교를 나오셨고 동료들이 다 잘나가셨다는 것과
낙동강 전투에서 지휘자로 공을 세우고 화랑무공훈장을 받으셨다는 걸
사진과 모든 인맥, 기억을 없애버린 아버지의 쓰라린 그 심정은 몰랐지요 ㅠ
그 후유증을 엄마와 우리 형제들이 고스란히 치르며 지낸 어린 시절이 밉기만 했지
아버지 당사자는 얼마나 힘들었을까를 짐작도 못했습니다.
빛이 강하면 그늘도 엄청 진하다는 명암의 법칙을...

 닛시 (2020.06.04 오후 3:02:27)  andro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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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전투에 투입되셨다면 다부동 전적비에 명단이 있는지 확인해보세요
우리 아버지께서도 참전하셨는데 왜 빠졌나고 따져서 다른 부대에 넣어 주셨답니다. 화랑 동기시네요

   희망으로 (2020.06.04 오후 4:59:15)  P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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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제가 움직일 수 없는 형편이고
아버지의 발자취를 찾는 것도 한편 마음이 무거워져서...
하지만 나라에 공을 세운 유익했던 분이라는 자부심은 남겨주셨습니다.
국가유공자라는 신분이 자식들에게 좋은 유산이지요.

 예수님 사랑 쌍둥이자매 (2020.06.04 오후 4:34:48)  andro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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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내세요
아버지의 길은 외로웠나봅니다
이해하세요
아버지도 사랑받고 싶은 남자니깐요 ㅋㅋ

   희망으로 (2020.06.04 오후 5:01:01)  P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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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요! 그걸 이해하시네요.
그리 많지 않은 연륜에도 이해심이 따뜻하십니다!
이 댓글을 이제는 아버지가 된 제가 우리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네요.
아버지의 길은 외롭고, 아버지도 사랑받고싶은 남자라고~^^

 nada1026 (2020.06.04 오후 8:58:54)  android

답변

험한 시기를 사신분들!
뜻은 컸지만 사회가 뒷받침되지 못했던 시절이니...
애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