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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의 수준이 답변의 수준을 정합니다

희망으로 2020. 6. 14. 11:10

<질문의 수준이 답변의 수준을 정합니다>

 

어떤 경상도할머니 두 분이 구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보소, 하나님이 이왕 주실라카몬 10원을 주시지, 와 9원밖에 안주시능교?" 

다른 할머니가 말씀하신다. 

"아이고, 아직도 모르시능교? 하나님께서 주시기는 10원을 주셨는데, 

십일조로 1원을 도로 받아가셨다 아잉교," 

 

이재철 목사님이 '사도행전속으로' 책에서 

질문의 수준이 답변의 수준을 정한다! 며 하신 이야기입니다. 

그 할머니에게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길을 진지하게 대답해드린들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하실수 있을런지 의문이라며... 

또 하나의 경우는 빌립이 만난 에디오피아 내시의 질문입니다. 

광야를 수레를 타고 가던 내시를 보고 

빌립이 달려가서 보니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읽는 것을 깨닫느냐?고 묻는 빌립에게, 

에디오피아 내시는 지도해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알겠느냐!며 

얼른 수레에 태우고 질문을 합니다. 

 

"이사야가 고난을 당하리라고 예언한 사람이 누구를 가리키느냐, 

이샤야선지자 자신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이냐?" 

 

내시의 이 질문은 오랫동안 관심을 가지고 살면서 풀지못하고

성경을 읽고 예루살렘까지 갔다가도 기대를 채우지 못한 채

이방인의 벽에 막혀 소득없이 돌아오는 길에 나온 질문입니다.   

그러니 빌립의 대답 또한 이사야로부터 예수님까지, 

하나님의 사랑과 복음에 대하여 진지하고 길었습니다.

에디오피아 내시는 답답하던 것이 밝아져 얼마나 기쁜지

길 가의 웅덩이를 보고 세례를 받기를 청할 정도였습니다. 

질문의 수준이 답변의 수준을 결정할 뿐아니라 

신앙의 수준까지 결정하는 좋은 경우입니다. 

 

무엇을 늘 생각하며 무엇을 질문하며 사는가가 

우리의 수준을 결정합니다. 

그것은 더 나가 지금의 삶 뿐만 아니라 다음 생까지 결정합니다. 

인격의 수준은 자주 사용하는 500개의 단어 중 

어떤 것을 많이 사용하는지에 달렸다고 합니다. 

신앙의 수준은 기도나 찬양이라는 형태를 통한 질문이 

어떤 내용을 늘 담고 사느냐에 달렸습니다. 

오늘 나의 질문은? 

오늘 나의 요청은? 

그 속에는 답변으로 돌아올 수준과 미래까지 이미 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