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산들을 넘는 하루>
1.
단체 카톡에서 쉴 새 없이 딩동! 소리가 들렸다.
어서 오라는 메시지, 무얼 먹는 중이라는 메시지
누구는 자식 시집보낸 소식, 안 온 친구들 안부 묻는 메시지 등...
보다가 마음이 서러워 전화기를 덮고 조용히 빠져나왔다.
경주 초등학교 동창들이 해마다 한 번씩 1박2일로 모임을 가진다.
오래 전에는 몰라서 못 갔고, 나중에는 알았는데도 안 갔다.
나는 정식 졸업장을 못 받은 수료생이라는 자격지심 때문이었다.
6학년 1학기에 아버지가 서울로 데리고 가면서 공중에 붕 떠 버렸다.
그러다 친구들이 어찌어찌 연락처를 알아서 참석하라고 졸랐다.
나이 들면서 친구가 너무 보고 싶어 36년 만에 친구들 얼굴을 처음 보았다.
계룡산에서 같이 등산을 하고 수다도 떨고 저녁을 먹고 헤어지는데 눈물이 났다.
새 세상을 얻은 것 같이 기쁘고 뿌듯했다.
나도 몰랐던 내가 누구를 좋아했고 어떤 여자동창이 나를 좋아하기도 했단다.
이제 해마다 만나야지! 무슨 출세 욕심이 있다고 세상에 매달려 사나 하면서.
그런데... 다음 해 아내가 아프기 시작했다.
몸살감기도 아니고 차 사고로 팔 다리 부러진 정도도 아니고 난치병으로 사지마비...
병원을 순례하듯 떠돌면서 방송도 나오고 소식을 안 친구들이 모금도 해서 보내왔다.
1년, 3년 5년... 해가 가도 시간을 낼 수도 없고 고쳐지지 않는 난치병이다.
계속 힘내라 한 번 보자던 친구들도 지치는지 민망한지 슬슬 뜸해졌다.
내가 자꾸 연락하자니 부담과 불편을 주는 것 같아 나도 자제 했다.
이번 모임도 연락이 왔지만 이제는 내가 자진해서 불참한다.
나만 보면 무거워지는 친구들의 인사와 신나는 모임 분위기에 찬 물 붓는 것 같아서.
오랜만에 만나 다시 헤어지는 남북 이산가족처럼 되어버렸다.
웃고 행복한 친구들의 메시지가 멀어지고 등 돌리는 내 모습이 떠오른다.
그래도 나를 믿고 기다리며 바라보는 가족들이 있어서 끝내 스스로 다독이며
오늘 작은 산 하나를 넘는다.
2.
며칠 째 장마철처럼 부슬비가 내리고 있다.
쌓이는 스트레스와 온갖 찌부듯한 몸 상태를 풀기 위해 걷기 운동을 나선다.
비와도 가야지 하루 이틀도 아니고 날씨 따라 만만해주지 않는 고약한 삶이다.
아파트 담장에 붙여 친 조그만 포장천막에서 불빛이 새어나온다.
비가 부스스 내리는데도 아주머니가 장사를 나오셨나보다.
날마다 지나면서 가끔씩 들러 허기를 채우곤 하는 어묵과 호떡을 파는 곳.
엄마가 그러셨다.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장사를 하셨다.
나 어릴 때 동네 공터 한쪽에 파라솔을 나무 상자에 매달고 쪼그리고 앉아서.
아이들이 들락거리며 낄낄 웃는 속에 연탄 냄새 맡으며 달고나 장사를 하셨다.
고의는 아니었지만 아버지가 생활을 뒤엎어놓은 후 막막하던 생계를 책임지셨다.
초등학교도 졸업 못하고 붕 떠버린 어린 나는 뭘 돕기도 힘든 시기였다.
결국은 14살 어린 나이에 남대문시장에 점원으로 밥 하나 줄이러 갔지만.
그 뒤에 고향 경주로 불명예스럽게 내려가신 후에도 엄마는 계속 되었다.
시장 한 구석에 자리를 펴고 온갖 손질한 채소와 나물들을 파셨다.
어떤 때는 과일, 어떤 때는 생선도 다듬어서 파시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나가셔서 명절에도 집에 가면 데리러 시내를 가야 했다.
등하교하는 콩나물시루 같은 버스에 끼어서 출퇴근을 하셨다.
노점 좌판 장사도 직장이라서가 아니었다.
나중에 엄마에게 들은 바로는 집에서 아버지 등쌀에 견디는 게 더 힘들어서였다.
부슬비 속에 문을 연 포장속의 저 아주머니는 또 무슨 마음으로 나오셨을까?
남은 재고 때문일까? 혹시 집이 더 불편해서는 아닐까? 별 생각이 든다.
돈 욕심도 취미생활도 아닌 생존의 전투를 하는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
궂은 날씨가 놓아주지 않고 등을 떠밀어 내몬다. 가족들의 생계를 들이밀면서.
그래도 일을 하는 동안에 잡념이 사라지고 평안해지더라는 엄마의 말이 생각난다.
보이지 않는 하늘의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나보다, 모두에게 그러기를 빌며
또 하나의 작은 산을 넘는다.
3.
TV를 보던 아내가 파안대소를 했다.
무슨 개그 프로그램인지 토크프로그램인지 그랬다.
참 잘 웃는다는 옆 침상의 간병인 아주머니 말에 아내는 그만 눈물 홍수가 터졌다.
환하게 웃는 모습을 처음 보는데 무지 좋아 보인다고 자주 웃으라는 말에...
한 번 훌쩍이더니 그만 봇물이 터진 듯 멈추지를 못한다.
왜 그러는지 물었더니... 돌아가신 엄마가 너무 생각이 나서 그런다고 했다.
살아계실 때 장모님이 너는 갑자기 크게 잘 웃는다! 고 했던 기억이 났고
다시는 그 음성을 들을 수 없는 엄마가 떠올라 서러움이 몰려온다고 했다.
몇 달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아직도 가슴속 어딘가에는 메꾸어 지지 않은 블랙홀 구멍이 있나보다.
마음이 안쓰러우면서도 이러다 또 호흡곤란이 와서 쓰러질까봐 불안하다.
간신히 조금씩 줄이는 우울증 약을 다시 먹여야 겠다 결심하면서 속이 상한다.
환자니까, 오래 아파서 맘이 약해져서 그러는 거야, 하면서도...
이따가 야간 자율학습 끝나는 딸을 데리러 나갔다와야 하는데 걱정이다.
자리를 비우고 나도 없는 사이에 비상이 걸리면 어쩌나 싶어서.
걱정이 짜증이 되고 원망이 되면서 잘 넘어온 작은 산들을 엎어버리고 싶어진다.
맨날 넘으면 뭐하나 산 넘어 산, 물 건너 물인 인생에...
괜찮다고 많이 심하지 않다고 아내는 거듭 나를 안심시킨다.
우황청심환을 하나 먹이고 아이를 데리러 갈까 했더니 참을 수 있다고 한다.
구멍 뚫린 가슴이지만 그 사이에 새 살이 꽤 돋아나와 작아졌나보다.
다행이다. 세월은 아픔도 가져오고 상처도 줄 세우지만 회복도 가져 오나보다.
별 일이 없는 날에는 24시간이 길지 않고 신나는 날은 짧기만 하더니
별 일이 있는 날에는 참 길기도 하다. 누가 시나리오를 짜는 건지.
부디 그 속에 별 사탕도 있고 건빵도 몇 개 들어 있는 종합선물이기를 빌면서
오늘 닥치고 아직 남은 또 하나의 작은 산을 넘는다.
(곁에 뒤에 투명 옷을 입고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분이 같이 걷고 있다.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며 너를 눈동자같이 지키겠다고 만인 앞에 약속하신 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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