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만큼 감당한다?>
아이가 멀리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몇 시간을 시외버스를 타고 가야하고,
몇 번이나 밥을 사먹고 잠도 자고 돌아와야 하는 여행.
“아빠, 돈이 좀 필요해,”
“얼마나 주면 될까?”
“음... 아빠가 나 사랑하는 만큼!”
이런 대화는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비슷한 상황마다 내 사랑의 크기를 시험합니다.
때로는 돈의 액수로, 때로는 고단할 수도 있는 몸 노동으로,
그것은 틀린 말은 아닙니다.
사람은 누군가를 사랑할 때 참을 수 있는 크기만큼,
무엇인가를 주거나 포기할 수 있는 만큼 상대를 소중히 여기는 것 이 맞습니다.
“더 이상은 줄 수 없어!, 더 이상은 참지 않을 거야!”
거기까지, 그만큼까지만 상대를 사랑하는 것 맞습니다.
어머니들은 자기의 심장이 필요하다는 아들의 부탁에 허락하고도
뛰어가다 넘어질까 봐 걱정했다는 이야기처럼 끝이 없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감수하는 고난의 정도에 따라,
우리에 대한 그 사람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측정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있습니다.
어쩌면 억울하고 너무 고통스러울 죽음 앞에서 충분히 피할 수 있고,
오히려 상대를 박살낼 수도 있는 힘을 가지고도 고스란히 당하기로 작정합니다.
모욕을 당하고 살점이 찢겨 나가고 피가 터지는 아픔을 이를 악물고 견딥니다.
‘그래봐야 너를 알아주지도 않아, 바뀌는 건 고사하고 비웃을 걸?’
그런 속삭이는 사탄의 고자질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렇게 죽어가는 아들을 바라보면서도 꾹꾹 참고 있는 아버지도 있습니다.
그런 짓을 하는 세상을 불바다를 만들 힘도 있고,
물로 쓸어버릴 능력도 가졌지만 참습니다.
이전에 그렇게 실력행사를 해 본 적도 있었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고 마음만 아팠던 기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고통을 참으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하나뿐인 아들의 죽음을 바라만보는 고통을 감수하면서
자기가 가진 사람을 향한 사랑을 보여주고 증거 하기로,
집 나간 아들을 찾아내 마땅할 징벌을 주는 길보다
문 앞에서 날마다 기다리기로 작정한 아비가 되기로 합니다.
그 분이 예수님이고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고난과 슬픔에 왜 아무 것도 하지 않냐고 따지고 싶을 때 많습니다.
진짜로 계시기는 하고 사랑하기는 하느냐 빈정대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지켜보면서 이겨내기를 기다리는 고통은
돌로 떡을 만들고 죽은 이를 살려내는 선택보다 열배, 백배는 더 힘든 일입니다.
더 큰 사랑이 아니면 불가능한 선택입니다.
우리의 잘못 하나 하나마다 맞아 죽었을지도 모르는 진노를 생각해보십시오.
일일이 자식 입장을 이해해주는 것이 아니라
부모 입장의 분노와 기대가 먼저인 경우에 닥칠 상황을 말입니다.
병들거나 망하고 있거나, 참을 수 없는 슬픔의 강을 건널 때도
그것을 지켜보며 통곡하는데도 묵묵히 기다려주고 곁에 동행만 하는
무소부재 불가능이 없는 분의 큰 사랑도 가끔은 짐작해드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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