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직도 마누라로 보여?'
간밤엔 많이 늦게 잠이 들었다. 이런저런 스트레스에 쌓인 아이와 통화를 길게 했다. 금방 닥칠 고등학교 진학의 불안함과, 성적유지가 지금처럼 될지 끙끙 매던 아이는 기어이 울음을 터뜨리고, 나는 달래다가 설득하다가 위로하다가....
그러다 한 시간 반이 훌쩍 넘어버렸다. 뒤끝을 타독거리고 잘 자라고 문자 주고 받다보니 밤 열두시, 그러고나선 정작 내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다 바깥으로 나갔다. 24시 편의점 파라솔에 앉아 이런 저런 생각에 빠져버렸다.
아이도 나처럼 논리적으로 정리가 되어도 감정까지 쉽게 다스려지지 않나보다. 뭘 그런 것까지 닮는지 참...
습관처럼 아침에 일찍 일어났지만 오늘은 주말! 아내의 다리를 마사지를 하다가 아침밥 받아놓고 다시 누웠다.
“잠이 쏟아진다. 나 좀 더 잘래!”
한시간정도 더 자고 일어나 밥 먹이고 약 먹이고, 세수 씻기며 얼굴을 좀 박박 닦았다. 하다보니 좀 힘이 많이 들어간 것 같다.
"나 감정 있어서 세게 한 거 아냐, 오해하지 마?"
"......"
"비누칠도 못하니까 좀 세게 문질러서 닦은 거야, 정말이야!"
"그렇게 말해놓고 담엔 진짜 화풀이로 세게 할려고 그러지?"
"어이구! 우리 너무 오래 살았다! 척! 하면 다 알아버리니~~"
정말 오래 같이 지냈다 24년을 살았으니, 얼굴만 보고도 속셈을 알고, 말의 표면을 포장해도 그 속의 의도를 서로 알아차릴 정도니...
"왜 그 드라마 같은 거 보면 넘어지거나 교통사고로 기억 상실증 걸려서 과거를 잊어버리는 거 있잖아, 그거 연구해서 마음먹는 대로 되면 좋겠다. 그지?"
그러면서 이마와 머리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요기를 톡! 치면 5년치, 여기 넓게 탁! 때리면 십년! 깊이를 조절하면 남편에 대한 기억만 사라지게 하거나~~ 야! 신나겠다! 그럴 수만 있으면! ㅎㅎ“
그렇게 상상은 진도가 자꾸 나갔다.
"그럼 바람피워서 미움 받는 남자들, 그 부분 그 세월만 싹 지우는거야, 그럼 마누라가 그럴 거 아냐, <당신은 바람 한번 안 피우고 정말 모범이야!> 라고~"
시험 삼아 이마를 톡! 쳤다. 바로 이어지는 아내의 한마디,
"누구...?? 내가 당신 마누라로 보여?"
헉.... 무섭다! 이건 잘 생각해보고 연구할 방법이다. 혹시 마음먹고 반대로 내게 수시로 뭔 짖을 할지도 모르니,
그냥 오래 살면 사는 대로 좋은 거 나쁜 거, 모든 기억을 끌어안고 용서해가며 살자! 괜히 이상한 방법을 연구하다가 신세 망치는 일 없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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