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강이 흐른다.
‘옛날에 서서
우러러보던 하늘은
아직도 푸르기만 하다마는.
아 꽃과 같던 삶과
꽃일 수 없는 삶과의
갈등(葛藤) 사잇길에 쩔룩거리며 섰다.‘
문둥이 시인 한하운의 시 – ‘삶’ 중의 한 부분입니다.
꽃과 같던 예전의 삶과 돌멩이 맞으며 사람을 피해
황톳길 천리를 걷고 걸어가던 꽃일 수 없는 지금의 심정이
마치 건널 수 없는 강처럼 느껴진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한 사람 속에서 과거와 지금,
혹은 건강할 때와 병들었을 때의 갈등입니다.
마침내 이 갈등은 성한 사람과 성하지 못한 사람과의
강 같은 갈등이 되어버립니다.
가수 나미씨가 부른 ‘빙글빙글’이라는 노랫말에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그저 바람만 보고 있지 그저 속만 태우고 있지
늘 가깝지도 않고 멀지도 않은 우리 두 사람
그리워지는 길목에 서서 마음만 흠뻑 젖어가네
어떻게 하나 우리 만남은 빙글빙글 돌고
여울져 가는 저 세월 속에
좋아하는 우리 사이 멀어질까 두려워~‘
그러나 이 노랫말은 참 다행입니다. 제 생각에는,
가까이 갈수록 과연 행복하고 오랫동안 지속이 보장될까요?
멀어지면 반드시 불행하고 미워지는 걸까요?
사실은 우리 사는 것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만남은 빙글빙글 돌고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것이
어쩌면 그리워지는 길목에 늘 서 있게 하고,
멀어질까 두려워는 하지만 멀어지지 않는 비결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면 사람과 사람사이는 얼마쯤 거리를 두어야할까요?
예전에 제가 5미터를 떨어져 살아야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이고
평화가 유지된다고 했더니 어느분은 1.5미터라고 해주셨습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너무 멀면 말이 서로 안들리고
얼굴의 표정을 보는게 좀 힘들어질 수도 있으니!
논어 양화편에서 공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소인과 여자는 대하기 어렵다.
가까이하면 불손하고 멀리하면 원망한다’ 라고...
지금 시대에 이런 말 하면 여자와 소인은 무척 화가 날 것이고
교육과 헌법의 차원에서 집중 포화를 받을 게 뻔합니다.
무슨 고리타분한 소리냐고,
그러나 여자나 소인을 굳이 생물학적 분류나 학식의 계급이 아닌
스스로 반성의 차원에서 보면 맞는 말입니다.
사람에게 인정하기는 자존심도 상하고 힘들지만,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돌아보면 제가 바로 소인이고 여자입니다.
위 말의 내용에 비추어보면 말입니다.
그리고 이건 물귀신 작전이 아니고 냉정히 평가해보면
나만이 아니라 주위의 많은 사람이 그렇습니다.
요 며칠 무척 속이 부글부글 끓고 소위 울화통이 터지며
‘사람이 보기 싫다!’ 혼자 절규를 하며 보냈습니다.
저도 사람이면서... 당연히 저도 제가 싫지요.
꽃처럼 살고 싶은 바람과 도저히 꽃일 수 없는 갈등의 사이에서...
병원의 오랜 안면이 있는 사람이나 새로 막 온 사람이나
남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거나 자기만 중심적인 사람이 있어서
대놓고 말은 안하고 삭히려니 무지 힘이 듭니다.
애꿎은 아내나 모처럼 병원에 와 있는 딸래미에게만 퍼부어댑니다.
저는 거의 티비를 안봅니다.
그런데 뻑하면 드라마나 뉴스나 무슨 프로그램이던
머리 염색했다고 ‘미친년’ 아님 ‘지랄...’ ‘저 저 나쁜 년!’
마술하는 사람 나와서 국제대회 1등 상탄 이야기하는데
‘공부 못하는 것들이 주접을 떨고 배우려고 하는거’ 라는 막말을 합니다.
한 두 번이 아니고 하도 들어서 참았던 화도 같이 터집니다.
공동으로 보는 시간, 공동장소에서 듣기 좋은 말도 아닌걸
너무 심하게 해댑니다. 몇 번이나 안테나를 가위로 짤라버리거나
뒷면의 부속을 부셔버릴려다가 아내가 말려서 그만두었습니다.
새로 온 사람은 이 더운 날에 자기는 춥다고 에어컨을 계속 끄거나
온도를 높이라고 해대서 땀을 뻘뻘흘리며 힘들게 참습니다.
9인실에 천장에 딱 한 대 있는 에어컨이 바로 아래 있는 사람에게
온도를 맞추면 멀리 구석에 있는 사람과 창가에 있는 우리는 찜통이됩니다.
긴 팔을 입거나 티를 하나 더 입어주면 좋겠는데...
어느 사람은 쉴 새 없이 짜증난 소리로 간병인과 씨름을 하고,
어느 사람은 부분적으로 아픈 통증을 내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쏟다시피 하소연하고 요란하게 합니다.
듣기도 좋지 않은 말을 내내하면 전체 기운이 푹 가라앉습니다.
예전 병원에 한쪽 팔 다리가 불편한 한 아주머니가
얼마나 ‘죽어야지, 이렇게 살면 뭐해,’ 온갖 짜증과 한숨을 퍼부으며
병실 사람들을 전부 우울하게 만들고 의욕을 상실하게 하는지
그 사람만 자리를 비우면 다들 분통을 터뜨리곤 했습니다.
암적인 존재라고...
이렇게 사람들은 자기 위주로, 자기들 기준으로만
이제 서로 아는 사이니 허물없이! 뭐 이럽니다.
정말 아는 사이일수록 허물없으면 안 되겠다 싶은 생각이
굴뚝같이 간절하게 듭니다.
제발 거리 좀 두고 조금은 어렵게 지내고 싶습니다.
저도 누군가에게 감정이 예민하고 특히 정의의 이름으로!
뭐 이런 욱! 하는 심정으로 올바른 소리 잘하는 편이었습니다.
그러니 뭐 남의 이야기이기만 하겠습니까?
오십보 백보, 도토리 키재기! 그렇겠지요.
저도 여자고 소인입니다. 그런면에서,
가깝다고 느껴지면 불손하고,
멀리 하는 사람에겐 원망하며 복수를 해대는...
특히 아내와 아들들, 딸래미에게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남들에게는 평판과 이성적 제어로 조금은 조절하면서도
정작 가족에겐 제어가 잘 안되었습니다.
데미무어가 출연한 ‘L0L’ 이라는 영화에서
이혼한 엄마로 나오는 데미무어는 딸과의 관계에 힘들어합니다.
아이의 일기장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가 18살이나 된 딸 아이가
이성친구와 신체적 관계를 가지게 되고,
오해가 생겨 잠시 밀고땅기는 중에 방황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걸 야단쳤다가 대판 싸우고 이혼한 아빠에게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등
마음고생을 하면서 새 남자 친구에게 털어놓는 이야기입니다.
참 많은 것들을 이해하고 친구처럼도 지내면서도 더 가까이도,
멀리도 가지 못하며 안타까워 합니다.
“애들에게 늘 죄책감이죠,
방목해도 죄 짖는 기분이고, 야단치면 더 미안하지요”
더 가까이 갔다가 갈등이 생기고,
딸아이가 집을 나간 후 둘은 또 서로를 보고싶고 미안해서 울다가
다시 만납니다. 가깝지도 멀지도 못하는 그 사이...
많은 부모들이 그럴 겁니다.
하물며 이혼한 엄마의 위치는 더 어려울 겁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던, 사람과 사물 사이던,
적당히 안보이고 적당히 안 들려야 대부분 그 관계가
아름답고 평화롭게 유지됩니다.
성경에서도 아브라함과 사라, 하갈의 관계에서 그런 모습을 봅니다.
자식이 없는 아브라함에게 사라는 미안하여 하갈을 권합니다.
아브라함에게 하갈과 동침하여 자식을 낳기를 권유합니다.
사라가 하갈을 이를 갈며 미워하거나 아주 못생긴 사람으로 보았다면
그렇게 동침을 하도록 추천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갈이 동침하여 임신을 하고서는 그 주인을 멸시하였습니다.
감사히 여기던 하갈이 무언가 오버를 하면서
안주인인 사라에게 불손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너무 가까이 한 결과로 생긴 사람속의 본능이 발동한 것입니다.
사라가 다시 아브라함이 허락을 받아 하갈을 학대하자
울며 도망가게 됩니다. 하나님이 돌아가서 복종하라고 하기전까지
하갈은 스스로 용서를 구하지도 않고 태도를 바꾸지도 않았습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에는 강이 흐릅니다.
도저히 건너가지도 건너오지도 못하는 강이...
누구도 완전히 건너와서 하나가 될 수 없는 절대 고독의 그 강을
아무도 안온다고 괴로워하는 사람은 우울하여 마침내 스스로를 죽입니다.
본래 건너올 수 없는 강이고 혼자만의 섬인데도 말입니다.
많은 불행한 자살로 생명을 마감한 사람들이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남에게로 건너갈 수 있다고,
사람은 같을 수 있다고 지독히도 이기적으로 믿는 사람들은
왕이나 종교지도자의 이름으로, 혹은 부모라는 명분으로
남을 강압적으로 괴롭히거나 죽였습니다.
고치겠다고, 혹은 말 안 듣는다고...
그 능력도 하나님밖에 없고 그 권리도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최후의 자리는 무인도입니다. 강으로 둘러쌓인...
사람과 사람은 모두 다릅니다.
아무리 가까운 부모 자식이나 부부 사이라도,
저도 아내를 많이 사랑하지만 우리는 많이 다릅니다.
남자 여자라는 생물학적인 차이 외에도 아내는 O형이고 저는 AB형입니다.
저는 나가 돌아다니기를 좋아하고 아내는 정적인 사람입니다.
저는 집에 들어와서는 손도 안대는 게으름뱅이지만
아내는 쓸고 닦고 요리하고 빨래하고 늘 부지런한 사람입니다.
저는 욱!하고선 다음엔 또 변덕이지만 아내는 차분하고,
결코 그릇된 반복은 용서하지 않는 타입이라서
아이들은 엄마를 더 무서워 합니다.
그래서 희망이 있습니다.
만약 아내와 내가 똑같았으면 우린 어쩌면 벌써 망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내가 절망할 때 나도 절망했을 것이고,
아내가 슬퍼서 견디지 못할 때 나도 식음을 전폐하고 쓰러지고,
아내가 분노로 폭발할 때 나도 폭발해버릴테니...
그래서 가끔은 사람과 사람 사이로 흐르는 강이 아쉽고
끝내 이해할 수 없고 이해 받지 못하여 오는 짜증이 싫기도 하지만
그래서 오직 하늘만 보고 하나님만 온전히 기대하고 믿습니다.
다만 사랑을 주거나 받는 정도로 너무 외롭지 않게 살아야지 그럽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강이 흐릅니다.
그 강은 불행한 강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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