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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한잔 같은 글 - 삶으로 쓰는 시

희망으로 2012. 8. 3. 08:58

핍진성과 시()

 

아도노르는 아우슈비츠 이후에 시()를 쓴다는 것은 야만적이라고 하였습니다. 시가 더 이상 시로 성립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한탄입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도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더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더욱 파편화되고 인간의 영원한 터전이어야 할 지구는 더 이상 생명을 품을 수 없다는 고통에 찬 신음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삶이 팍팍해지고 박애의 정신은 선거 때나 정치판을 장식하는 미사여구가 되었습니다.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지구촌 전체의 빈부격차는 인간의 존엄이 사라졌다는 가장 명확한 증거입니다. 더 이상 시를 쓸 수 없는 시대란 희망이 사라진 세상입니다.

 

성경은 그러한 세상을 "어두움"(요1:5)이라는 한 단어에 담아내고 있습니다. 어두움 속에서는 무언가를 하려는 노력 자체가 부질없는 짓입니다. 어두움 속에서는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모든 행동들이 죽음을 향한 가속도를 더할 뿐입니다. 어두움 속에서 인간이 해야 할 일은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불살라 한 줄기 빛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시가 더 이상 시가 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시를 쓰려는 사람들의 몸부림입니다. 무력해 보이는 그 몸부림이 그러나 한 줄기 빛으로 드러날 때 어두움은 더 이상 자신의 위대한 마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어두움이 짙을수록 빛은 부각됩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시를 써야할 시기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어두움은 단순히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어두움이 가지는 가장 강력한 힘은 어두움이 연출하는 핍진성입니다. 핍진성이라는 말은 진짜는 아니되 진짜와 같음을 의미합니다. 어두움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진실이 아닙니다. 진실을 위장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 속에서 감추어진 진실을 찾는데 노력을 해야 합니다. 시인들이 시를 통해 하는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의 일상 속에 감추어진 진짜 모습을 화가들의 크로키처럼, 사진사들의 스냅사진처럼 그려내고 찍어내는 것입니다.  

 

시인들은 시를 써야 합니다. 시를 통해 감추어진 진실을 드러내야 합니다. 사람들은 시를 읽어야 합니다.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세상에서 세상의 어두운 모습을 드러내는 시를 쓰고 읽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세상이 주장하는 얌전하고 순한 사람, 멋지고 학식 있는 사람, 현실성 있는 유머러스한 사람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참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인간으로서 인간을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만남을 바로 시가 주선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은 삶으로 쓰는 시입니다.

 

삶으로 쓰는 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영화 "체리꽃 향기"에는 살아야 할지 죽어야 할지 모르고 배회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말투로 보아 그는 지식이 있는 사람입니다. 재산도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는 고독해 보입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그는 망설입니다. 망설임은 성실성의 증거이고 확신은 사기의 증거라는 말이 있습니다. 귀담아 들을만한 내용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강철 같은 확신은 오히려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습니다. 생 자체가 그러합니다. 인생은 모호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흔들리면서 사람들의 인생은 뿌리가 깊어지는 나무처럼 그렇게 튼실해집니다.  

 

영화 속 남자는 그런 흔들림 속에서 결정을 내리지 못합니다. 어쩌면 그는 그런 흔들림 자체가 지긋지긋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는 용기 있게 죽음을 택할만큼 모질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그는 누군가 자신의 죽음에 동행하기를 바라는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최소한 누군가 자신의 죽음에 입회해주기를 원합니다. 죽은 후에 누군가 자신의 시신 위에 꽃 한 송이라도 던져주기를 바라는 마음인지도 모릅니다. 죽음의 마력에 이끌려 가면서도 삶을 향해 맹렬히 촉수를 내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그의 말없는 요청에 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군가 그럴듯한 열정을 가진 사람을  찾아보지만 다가오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 한 노인이 다가와 그의 이야기에 공감하고 제안을 받아드립니다. 그러면서 노인은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들려줍니다.

 

"결혼한 직후 내게는 어려움이 산적해 있었습니다. 난 너무 지쳐 끝장을 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새벽동이 트기 전에 차에 밧줄을 실었어요. 난 자살하기로 굳게 마음먹었습니다. 난 미아네를 향해 출발했어요. 그때가 1960년이었습니다. 난 뽕나무 농장에 도착했는데 그곳에 도착할 때까지 해가 뜨지 않았어요. 난 나무에 밧줄을 던졌지만 걸리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던졌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난 나무 위로 올라가 밧줄을 동여맸습니다. 그때 내 손에 무언가 부드러운 게 만져졌어요. 체리였습니다. 탐스럽게 익은 체리였어요. 전 그걸 하나 먹었어요. 과즙이 가득한 체리였습니다. 그리곤 두 개, 세 개를 먹었어요. 그때 산등성이에서 태양이 떠오르더군요, 정말 장엄한 광경이었습니다. 그리곤 갑자기 학교에 가는 아이들의 소리가 들렸어요. 그 애들은 가다말고 서서 날 쳐다보더니 나무를 흔들어달라고 했어요. 체리가 떨어지자 애들이 주워 먹었어요. 전 행복감을 느꼈어요. 그리곤 체리를 주워 집으로 향했습니다. 아내는 그때까지 자고 있더군요. 잠에서 깨어나 그녀도 체리를 먹었어요. 아주 맛있게 먹더군요. 난 자살을 하러 떠났지만 체리를 갖고 집으로 돌아왔어요. 체리 덕분에 생명을 구한 거죠. 체리가 내 생명을 구했어요."

 

그 이야기를 듣고 죽으려고 하던 남자는 삶을 향해 돌아섰습니다. 노인의 이야기의 무언가가 그의 심경에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그의 마음이 치유되었습니다. 노인은 삶을 강변하지 않았습니다. 야단을 치지도, 말리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심드렁하게 빛 바랜 사진첩을 들여다보듯이 혼자 중얼거리며 말했습니다. 자신의 삶을 미화하지도, 극화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의 이야기에는 어둠을 뚫고 울려퍼지는 새벽종소리처럼 무언가 생동감이 넘치는 아름다움이 들어 있습니다. 나무에 달려 있던 체리는 그의 삶을 구했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맛보는 체리, 그것은 죽음을 앞두고 있는 사람이 갖는 일상에 대한 그리움이었습니다. 체리는 삶이 보내는 미소였고, 아이들과의 소통의 매개체였으며, 아내와 더불어 살아가야 할 시간을 생생하게 만들어준 육체의 보양식이었습니다.

 

일상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일상은 때론 지겹고 가끔씩 지옥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누구나 거기에서 벗어나고픈 욕구를 느낍니다. 때론 그것이 지나쳐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3.5명의 사람들이 한강 다리를 이용합니다. 그 숫자는 살든 죽든 뛰어내린 사람들의 숫자입니다. 뛰어내릴 마음을 먹고 다리 위를 배회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을 것입니다. 일상은 우리를 넘어뜨리는 걸림돌일 수도 있지만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디딤돌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 속에서 주고받는 사소한 눈짓과 몸짓은 삶과 죽음 사이에서 명멸하는 불빛입니다. 그 불빛들이 모여 생을 이룹니다. 그래서 죽음의 언저리에 이른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은 일상에 대한 그리움입니다. 길가에 핀 들꽃 한 송이, 창가로 스며드는 희미한 달그림자조차 강력한 생에의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애틋한 생명의 덩어리입니다. 하물며 부모노릇, 아내(남편)노릇, 인간노릇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제서야 사람들은 삶이 일상으로 그리는 이야기임을 깨닫습니다. 영화 속 노인의 이야기는 죽음을 꼭 붙잡기로 결심한 남자에게 한 편의 시가 되었습니다. 영화 "체리꽃 향기"는 우리의 일상이 삶으로 쓰는 시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열정을 가진 기술자

 

그렇다면 아우슈비츠 이후 시를 쓴다는 것은 야만적이라는 아도노르의 말은 수정되어야 합니다. 아우슈비츠를 겪고도 시를 쓰지 못한다는 것은 더욱 야만적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를 바라보며 우리는 같은 이야기를 반복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아우슈비츠처럼 철조망은 없어도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의 자리로 몰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는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죽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외로움과 모멸감 속에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지 모릅니다.

 

로또 복권에 당첨된지 5년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의 이야기가 보도되었습니다. 그 기사를 접하고도 로또 복권에 목을 매는 사람들의 숫자는 줄어들지 않습니다. 미혼모가 낳아 할머니에게 맡겨진 10개월 된 아이가 지병으로 갑자기 숨을 거둔 할머니 곁에서 아사했고, 냄새가 진동하여 그들의 주검을 확인하게 되었다는 보도도 있었습니다. 희망 탐사라는 티브이 프로에서 보여주는 아프리카의 모습은 오늘의 현실이 아우슈비츠와 다르지 않음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울타리가 없어진 아우슈비츠의 망령이 온 세상을 떠돌고 있습니다.

 

시인들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아니 우리 모두가 시인이 되어야 합니다. 어두움의 핍진성을 순간적이라도 밝혀 실재를 드러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본시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사명이요 정체성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시가 되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영화 속 '체리'와 같은 사랑이라는 달콤함으로 죽음의 세상에 생명을 일깨우는 시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일상의 삶으로 시를 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5:14a)는 주님의 말씀이 새삼스럽습니다.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교훈 하나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가진 기술적 역량 때문에, 고객에게 훌륭하다는 소리를 듣는 전문가는 드물다. 전문가의 반대말은 비전문가가 아니라 기술자이다. 전문성은 능력이 아니라 대부분 태도에 달려 있다. 진정한 전문가는 열정을 가진 기술자이다. 사람들은 당신이 얼마나 열정이 있는지 알기 전에는 당신이 얼마나 아는지에 관심이 없다." -데이비드 마이스터- 

 

데이비드 마이스터의 이 말은 그리스도인들이 왜 세상의 빛이 되지 못하고 시가 되지 못하는가를 명징하게 보여줍니다. 우리는 사랑의 전문가가 아니라 열정을 가진 기술자가 되어야 합니다. 열정을 가진 사랑의 기술자는 일상의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일상의 삶을 사랑으로 채우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열정을 가진 사랑의 기술자가 되어 기짜 사랑이 판을 치는 이 어두운 이 세상에 진짜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일상의 삶으로 시를 쓰는 시인들이 될 때 복음은 빛이 되어 세상의 어두움을 몰아낼 것입니다. 형제와 자매들이여 시인이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