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주님의 날,
예정으론 오늘 큰아이와 함께 방을 구하러 다니느라
주일예배를 참석하기가 빠듯했는데,
늦잠으로 버스를 놓쳐 치과 치료를 못가는 딸아이 덕분(?)에
좀 일찍 온 아들과 어제 돌아다니며 간신히 방 문제를 해결하고
오늘 병원 7층 예배를 드렸습니다.
양쪽에 쉬고싶다는 큰아들, 막내딸을 앉히고 흐뭇하게~~
말씀시간에 목사님이 질문을 하나 했습니다.
'만약 여러분들에게 지금 기쁘고 나중에 슬픈 쪽과,
지금 좀 슬퍼도 나중에 기쁜 것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면
무엇을 고르겠습니까?' 라고,
많은 사람들이 두번째 선택을 했습니다.
지금은 좀 슬프도 나중에 기뻐기를 바란다고!
목사님은 그것이 지혜롭고 옳다고 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원숭이들에게 아침에 바나나3개를 주고 저녁에 4개를 주겠다고,
다들 소리를 지르고 항의하면서 난리를 쳤습니다.
그래서 그럼 아침에 4개를 주고 저녁에 3개를 주겠다고 바꾸니
모두들 신이나서 춤을 추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조삼모사-朝三暮四' 이야기입니다.
어쩌면 저녁까지 살아있을지 모르는 불확실성을 반영한다면
웃으며 놀리는 우리가 더 어리석을지 모르지만...
목사님은 지금 당장, 눈앞의 기쁨만 바라고 떼를 쓰는 것은
미숙한 어린이와 같은 신앙이고,
멀리 내다보고 슬픔을 참더라도 나중의 기쁨을 바라보며 견디는 것이
성숙하고 어른된 신앙이라 했습니다.
맞습니다. 그 취지를 이해합니다.
그러나 저는 자꾸만 이 이야기를 듣는 동안
또 다른 생각이 계속 떠나지를 않았습니다.
이 세상을 사는 동안은 오늘 슬프고 힘들어도 내일이나,
나중엔 반드시 기쁘고 평안할거라는 보장은 못한다는 생각...
그런 자세를 가지고 견디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제 짧은 경험으로도
반드시 그것은 수학의 정답이나 병역의무처럼 시간되면 끝나는 것이
아닐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랬다가 아닌 모양으로 세상에서 숨을 거두고 떠난다면?
우리는 속고 버림받은 결과가 되는것일까요?
스스로도, 주위로부터도 비난과 조롱을 감수해야하는 것일까요?
지금 나와 우리 가족들이 겪는 이 고통이,
(정도의 차이야 있어도 다른 이들도 별 다르지 않으리라 짐작하면서)
그런 셈법으로 평가받는 것은 어딘가 이상합니다.
어떤이도 조건부로 고난을 겪는 것은 아니고,
나중의 좋은 결과를 위해 댓가로 치르는 아픔이라고 말하기는
너무 야박한계산입니다.
요즘 예전 보지 못했던 해와달 쪽지 글들을 읽는 시간이
참 기쁘고 복된 선물처럼 느껴집니다.
정말 귀하고 보석같은 묵상의 글들이 흘러간 월간지처럼
창고에 묻혀있다는게 안타까울정도로 소중하게 보입니다.
오늘도 밤이 늦어서 읽어나가다가 우연도 이런 우연이 있나 싶었습니다.
낮에 목사님의 예배설교를 들으면서 두 사람을 생각했습니다.
다윗과 바울!
그러면서 계속 되풀이하다가 핸드폰 메모장에 늘 하던대로
잊어먹기전에 간략하게 남겼습니다.
물이 지나감 같이 묵상의 깨우침도 지나가고 전혀 다시 기억못하는
답답함을 여러번 경험한 후 메모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이렇게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 분의 말을 이해한다면
오늘도 기뻐하고 내일도 기뻐하고 날마다 기뻐해야 하지 않을까?
일년, 십년이 지난다고 지금 우리를 둘러싸는 무겁고 슬픈 일들이
그때라고 다 사라져서 기쁜일만 있으리라는 것은 너무 유치한 동화다.
다음 세상은 물론 그렇지만 이 땅에서 목숨을 가지고 가는 동안은...
그러니 주위여건이 좋아져서, 골치아픈 문제들이 해결되어서,
그래서 기뻐할수 있는게 아니라면 지금이나 나중이나 별 다를게 없으니
오늘 기뻐하지 못하는 자가 내일은 어떻게 기뻐하며,
늙어서는 어떻게 기뻐할 수 있을까,
사울에게 죽음의 위협을 받으며 도망다니던 다윗,
감옥에 갇혀 언제 죽게될지도 모르는 상황의 바울,
그들이 그 상황에서 감사하고 찬양하며 기도하던 것은
그들의 환경이 좋아져서도 아니고 위험이 사라져서도 아니었다.
나중에 아무 걱정없는 왕궁에서 다윗이 더 감사하고 더 가까이 갔던가?
바울이 감옥에 갇히지 않았을 때 더 찬양하고 평안했던가?
대답은 아니던가 최소한 변함이 없었다는 내 판단,
그래서 '항상 기뻐하라!' 라고 했던걸까?
지금은 참고 나중에!라고 하지 않고...
그렇게 메모를 했는데,
1992년 2월호 해와달 쪽지에 같은 고백의 글이 실려 있었습니다.
그 전율, 놀람이라니...
꼭 20년전 같은 달에!
"...(앞 생략,)
저는 바울과 실라가 어찌하여 그 옥속에서 평화를 누리고 기쁨을 누릴 수 있었는가를 생각하며-- 문 득 제 속에 물결쳐 흐르는 평안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변함 없이 제 속에 함께 계시는 예수 그리스 도, 나의 주님으로 인한 평안이었습니다. 저는 조용히 무릎을 꿇고 앉아 두손을 높이 들고 지금 나와 함께 계시는 주님께 다윗이 그 토굴에서 지어불렀던 시편 57편을 노래했습니다. "주의 인자는 커서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넓은 궁창에 이르나니..." 비로소 저는 주님께서 주시는 평강이 어떤 것인지 조금씩 맛보아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내 안에 살아계시는 그 주님께 늘 나의 관심과 시선을 고정시킬때 비로소 얻어지는 주님의 선물입니다. 그분의 온전하심과 신실하심을 묵상할때 저는 '죽음의 음산한 골짜기' (시23:4)를 걸어갈찌라도 두려 워하지 않는다던 다윗의 그 평화와 안심을 이해할 수 있읍니다.
(뒷 부분 생략)..."
* 전체글보기 - http://www.hae-dal.com/old/19920207.html
아하~ 이래서 성경은 2000년전이나 지금이나 모두에게 같은 목소리,
같은 내용으로 전달이 되는구나!
참 귀한 체험을 그냥 넘어가기 아쉬워서 몸은 좀 고단하지만
바로 글로 남겨봅니다. 또 잊어버릴테니...
너무 힘들게 일이 겹쳐서 몰려오면 나도 모르게 이를 악뭅니다.
'지치지말자, 잘 견디자, 나중엔 좋아지겠지...'그러면서,
하지만 정말 훈련을 할 수만 있다면 달라지고 싶습니다.
오늘 이 고단함, 이 버거운 문제들을 다 쌓아놓고도,
무엇으로 기뻐할까? 어느 정도로 기뻐할까?
그렇게 지금부터, 날마다 기쁜일을 찾아내고 기꺼이 인정하는
그런 복을 받고 싶습니다.
그냥 하루씩의 단위로 말입니다.
그런 의미라면 진정 하루살이가 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항상 기뻐하고 쉬지않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믿음의 '하루살이'!
이건 불가능한 감상적인 바람이 아니라 약속의 말입니다.
'근심중에도 기뻐할일을 주신다'고 성경에 분명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부터, 날마다도 가능할것입니다.
그렇게 살지 못한다면 약속이 어겨진게 아니라
나의 생활습관이 너무 멀리 떠내려왔기 때문일것입니다.
아님 보이는 사람의 힘이 더 믿어지는 내 얄팍한 어리석음 때문일 뿐입니다.
'하늘가는 길 > 예수님과 함께 가는 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말은 꽃입니다. 삶이라는 뿌리에서 자라는! (0) | 2012.03.09 |
---|---|
기분좋게 당하는 굴복? (0) | 2012.03.03 |
이별, 그 아픔을 견디는 길! (0) | 2012.02.13 |
언제나 선택은 우리의 몫 (0) | 2012.02.06 |
하루살이 인생, 대책이 없다... (0) | 2012.01.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