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투병일기

14년이 지나도 어느날 아침에는 낯설다

희망으로 2022. 8. 22. 18:03



‘14년이 지나도…어느날 아침에는 낯설다’

모든 일어난 일들을 다 받아들이고 적응하고
이게 내 일상이라 익숙하게 지내다가도
어느날 아침에는 잠이 덜 깬 사람처럼 정신을 못차린다
무슨 마법처럼 잊고 지내던 14년 전으로 돌아 간다
가족들 모두 건강하고 아무도 아프지 않고
아내는 일어나 걸어다니며 아침밥을 준비하고…
‘뭐라고? 일어나지도 못하고 걷지도 못한다고? 아내가?’
내가 대소변을 돕고 밥도 준비하고 빨래도 다 하며 산다고?
…. 낯설다.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럴리가 없다.
그러다가 점점 잠이 멀리 달아나고 제 정신이 들면 인정한다
맞다! 내가 그러고 살고 있지. 오래도록 ㅠ

모든 것을 다 수용한 사람처럼 산다고 생각했는데
내 깊은 바닥 무의식 어딘가에는 인정하지 않는 고집이 있었고
5살 미운 아이나 십대 반항아 같은 떼쓰는 마음이 있었나보다
모든 외출과 자유가 금지 당하고 밥상을 차리고도
순식간에 들이닥치는 대소변의 위기가 발생하면 순서를 바꾸고
그렇게 사는 일상중에 미움이 질긴 여름풀뿌리처럼 스물스물 자랐다
아내가 어디 심하게 안아프고 침대에서 꼼짝않고 지내주면 고맙다
있는지 살았는지 무덤덤 시간이 길어지면 그게 당연한 듯 가벼워진다
잠이 덜 깬 상태에서 제 정신이 돌아오면 심정이 무거워지듯
조용히 지내다 손길이 필요한 상황이 생기면 또 무거워진다




욥의 친구들도 괴로웠을거다.
멀쩡하게 잘 지내던 친구의 일상이 졸지에 초상나고 파탄나고
온몸에 악창이 생겨 고통스러운 모습을 지켜보기가 편치 않았을 거다
외면하기도 편치 않고 해결해줄 힘도 없고
그 상황이 왜 왔는지도 모르고 어디로 어떻게 될지도 모르겠고…
그러니 쥐어짜고 해줄 말이 그것밖에 없었을 것이다.
‘너 혹시 너 모르는 죄를 숨기고 있어서 그런 거 아닐까?’
‘모두 고백하고 잘못을 빌면 다 용서받고 이 괴로움도 벗어날지 몰라!’
사실 그 역할, 그 말밖에 할 수 없는 친구들도 힘들었을거다
일면식도 없었고 욥이 죽든지 말든지 생까고 맘편했을 타인도 있는데
친구라는 올가미에 잡힌 그들의 입장이란 그랬다.
욥도 괴로웠을거다. 고통스러운 신음과 일그러진 얼굴, 병든 몸을
보이지 않을 방법도 없고 없는 일처럼 대범하게 숨길 수도 없을테니
한 번, 두 번이지 볼때마다 그 심정을 노출해야 한다는 미안함도.

아내가 안아프면 간병하는 내 얼굴이 다 밝아진다
그걸 알면서 아픈 증상이 올때마다 보여주고 불러야하는 아내는 괴로울거다
비슷한 상황으로 내가 편하게 지내면 내 주변 사람들도 마음이 편해진다
늘 웃고 지내면 좋은데… 그렇지 못해 괴롭거나 형편이 어려워지면
같이 덩달아 괴롭게 된다. 끝없이 들어주고 봐주고 뭔가 부담해야하는 입장
외면도 못하고 한방에 끝내줄 도움도 못주는 그 일정거리에 머문다는 것.
안다. 그래서 오래 참다가 때론 숨다가 못견디고 또 쏟아놓기를 반복한다
입을 닫으면 우울증이 시작되고 입을 열면 민폐가 시작된다
이 딜레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환자고 간병가족들의 고통이다.
연좌제 같은 이 고통의 족쇄로 이어진 가족, 이웃, 아는 사람들…



내게도 안보고 안듣는게 좋아 먼 거리로 등지고 사는 여럿이 있다
원망? 안한다. 나도 아픈 아내에게서 틈만나면 멀어지고 도망가는 꿈을 꾸고
어느날 아침에 잠에서 깨면 마치 백지로 초기화 된 사람처럼 낯설고 싶은데
누구를 탓하고 서운하다 말할까.
미안하면서 사라지지도 감추지도 못하는 내 신세가 안타까울 뿐…
종종 잠 덜깬 몽롱함 속에 낯선 아침이 꿈처럼 스쳐가며
잠깐이라도 가벼운 기분을 주는 그것도 눈물겨운 은총일 뿐!
그리고… 어느날에는 반드시 엔딩이 오겠지만
그날이 오기까지 길고 긴 시간을 내내 우리 사정을 품고 도움을 주고 있는
정말 고마운 사람들이 또 하나의 은총이다.
갚을 길 없는 빚을 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