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거나 나를 설득하거나 3’
우울증 탈출 비법? 이론? 그런 건 없습니다! 오직 나를 설득하여 하루 하루, 혹은 순간 순간 견디고 살아갈 뿐입니다. 우리들이 영원한 생명 영원한 자유를 얻는 그 마지막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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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설득하기 3 - 얻어 먹어도 죽지 않는다
깊은 우울증에 빠지게 되는 여러 원인중 가난이나 빚으로 인한 동기가 상당히 많습니다. 물론 그외에도 실연이나 실패, 대인관계 갈등, 혹은 질병으로 인한 고통 등도 있습니다만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고 넉넉하면 상당부분 견디거나 극복하기 쉬워집니다. 가진 것이 바닥나고 빚을 지고 몰리기 시작하면 다른 불행들이 연달아 덮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마치 당연한 풀코스의 순서처럼 자연스럽기 까지 합니다. 그러면 건강을 해치고 주변 사람과 다투고 범죄에 휘말리고 친구 가족 연인관계도 금이 갑니다. 그래서 가난과 빚진 상태를 우울증을 부르는 시초고 큰 원인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럼 과연 먹을 것이 떨어지면 죽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먹을 것이 떨어져도 굶어서 죽는 경우는 실재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수준은 얻어 먹을 수만 있어도 굶어 죽지는 않을 정도입니다. 죽지 않겠다는 의지만 있다면 주변에 먹을 것이 없다고 도움을 청하고 주민센터나 복지기관으로 달려가서 호소하면 길이 생깁니다. 정 막막하면 길거리로 나가 피켓이라도 들고 도움을 요청해도 굶어 죽지 않을만큼 먹을 것을 얻을 수는 있습니다. 그럼에도 가난하다는 이유로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경우는 굶어서 죽을까봐 두렵고 한편 그런 추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자존심 상해서 차라리 죽는 선택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엄격히 말하면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은 것이 아니라 자존심 구기지 않겠다고 스스로 선택한 죽음입니다. 체면을 지키려고 죽었다! 가 맞는 표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기 전에 지레 죽을 것 같아 자살을 합니다. 아니면 굶어 죽을까봐 도둑질을 하거나 남의 것을 빼앗으려 합니다. 빚을 지고 채권자에게 시달리거나 매를 맞을 수도 있지만 죽지는 않습니다. 빚 때문에 맞아 죽을 확률보다는 술 먹다가 시비로 다투다가 죽을 확률이 더 높습니다. 그럼에도 가난해서, 빚에 쪼들려서, 굶어 죽을까봐 온가족을 데리고 미리 동반자살을 한 뉴스를 종종 봅니다. 얼마전 완도의 바닷속으로 차를 탄채로 들어가 죽은 가족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 가난과 빚진 상황은 우리를 깊은 우울증의 수렁에 몰아가고 틀림없이 멀지 않아 죽을거라는 두려움을 계속 주기 때문입니다.
빚도 비슷합니다. 빚을 졌다고 채권자에게 멱살을 잡히고 매를 맞거나 압류당하고 심한 경우 교도소를 간다고 해도 그 자체로 죽지는 않습니다. 그것보다는 그런 저런 험악한 꼴을 당하기 싫고 그렇게 사는 것이 죽는 것 보다 더 괴롭게 느껴서 스스로 죽는 쪽을 선택하는 겁니다. 그러니 빚에 몰려서 허덕이다 죽었다! 는 말은 정확한 표현이 아닙니다. 구차한 시달림을 감당하기 싫어 스스로 죽었다! 가 맞습니다. 그 결심을 하기까지 깊은 우울증에 빠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과정입니다. 빚더미에 몰려 죽음을 선택하거나 그럼에도 죽지 않고 살 수 있다는 자기 설득으로 견디는 것은 가난한 경우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정말 죽고 싶지 않다면 길은 있습니다. 설사 쌀독이 비고 돈도 없고 빚더미에 몰려도 그 자체로 죽음을 당하지는 않습니다. 수모는 겪고 일상은 고단하고 배고픔을 참아야겠지만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는 음성 꽃동네의 시작 동기가 된 최귀동 할아버지는 ‘얻어먹을 힘만 있어도 남을 도울 수 있다’는 예를 보여주었습니다. 자신도 늙고 거동이 불편하면서도 구걸을 해서 다리밑에서 굶고 있는 다른 거지에게 먹게 해주었습니다. 이 정신이 음성의 꽃동네를 만들고 대규모 큰 봉사 단체로 이어졌습니다. 최귀동 할아버지보다 더 몸이 불편하고 아프다면 병으로 죽는 경우입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거나 빚에 시달려서 죽는 경우가 아니라. 실재 독거 생활자 중 굶어 죽은 뉴스가 나오는 경우 대부분 질병이 중복되거나 처음에는 자존심으로 얻어 먹으러 나가지 않다가 어느 정도 지나 기운이 떨어져 쓰러져서 나가고 싶어도 못나갈 지경이 된 채 굶어 죽는 상황이 대부분입니다.
아내가 심하게 아프고 이 병원 저 병원 떠돌다가 희귀난치병 진단을 받고 병원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집도 팔고 가진 모든 재산을 털어 먹었습니다. 아내의 증상이 더 심해져 그나마 버티던 일자리도 완전히 접고 수입이 없는 상태에서 처음 몇달은 밤마다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이제 빚도 더 낼 수 없으니 가진 거 다 쓰면 길거리로 나가 앉을 것이고 환자나 보호자나 별 차이없이 대책없는 굶주림과 험악한 환경에 몰려 죽을 것이 너무 뻔했습니다. 예상이란 가진 것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그러니 밀려오는 배고픔과 빚쟁이들의 독촉으로 죽음의 문턱을 들락거릴 예상이 너무 끔찍하고 불안해 잠을 못잤습니다.
그러나 14년이나 지난 오늘까지 죽지 않고 살아 가고 있습니다. 로또는 맞은 적 없고 집구석 어딘가에서 금덩어리가 툭 튀어 나온 것도 아니었습니다. 젊은 시절 나는 내가 땀흘려 일해서 평생 당당하게 먹고살지 빈둥거리고 놀면서 남의 돈 축내고 살지는 않을거라 장담했습니다. 그건 너무 쪽팔리고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 그럴바엔 죽고 말거라고 큰소리 쳤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자녀들까지도 나중에 도움 받지 않는 대상에 포함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나를 위해서도 아니고 길이 있는데 게을러서 그런 것도 아닌 처지가 되어 그 체면을 버렸습니다. 알만한 분들에게 내 처지를 말했고 형제 친척 친구들도 조금씩 도움을 주었습니다. 난 단지 고개숙여 감사하고 또 연결시켜주는 단체들의 도움도 받기 위해 기꺼이 신청서와 서류도 작성했습니다. 죽을 것인가? 아님 나를 설득해서 살아남을 것인가? 두 길 중 선택을 한 것입니다.
세상도 그렇지만 우리나라의 인정이나 제도, 수준도 그 정도는 됩니다.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심한 우울증이 몰려와 죽는 쪽을 선택하고 싶은 충동에 시달리지만 내 자신의 자존심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나와 가족이 살기 위해 도움받고 얻어 먹는 길을 선택해야합니다. 그러니 혹 극단적 죽음을 선택하더라도 가난해서 굶어 죽었거나 빚에 몰려 죽었다는 표현은 맞는 말이 아닙니다. 구차하게 살지 않고 자존심 망가지기 싫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것이라는 제목이 맞습니다.
하나님 없는 사람들에게도 이런 생존의 길은 열려 있습니다. 우울증이 깊어져도 생명을 소중히 여긴다면 가능합니다. 좀 비참하고 서글픈 일상을 각오하면서 선택하는 길이지만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바라며 생존을 선택하는 사람의 경우는 그런 차원보다 좀 더 평안하고 그저 생존 이상으로 사는 차이가 있습니다. 겉 생활은 비슷해보이거나 혹은 더 열악할지라도 마음의 상태는 훨씬 건강한 수준으로 그 선택을 합니다. 나도 이전 굶주림과 빚독촉의 마지막 단계까지 몰리기 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사실입니다. 공중의 새도 먹이고 들판의 백합화도 키우시는 하나님이 먹을 것을 염려하지말라 약속하신 말씀을 그저 경전 책속의 흔한 글자로 무심히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진짜 생존의 기로에 서게 되고 죽느냐, 아니면 얻어 먹더라도 살아남느냐 선택을 하고 나니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엘리야에게 보낸 까마귀는 비교도 안될만큼 많은 까마귀를 하루 이틀도 아니고 십몇년을 보내주시고 사람의 계산에는 보이지 않던 길도 열어주시는 체험을 직접 하게 되었습니다. 그 지경이 되지 않으면 설사 까마귀가 와도 무심했을지 모르는데 막다른 벼랑에 서니 생생하게 확인하고 감사로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없는 자기 설득도 살아 남는 길이 맞지만 하나님 있는 자기 설득과 인내의 삶은 훨씬 큰 평안과 따뜻한 위로로 살아 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죽음에 이르게 하는 깊은 우울증에 내몰릴 때 자신을 향하여 하는 또 하나의 주문은 그렇습니다. ‘얻어 먹어도 죽지 않는다! 빚에 몰려도 죽지 않는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설득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자존심과 체면을 위해 죽겠다는 선택만 하지 않는다면 비록 우울증을 안고 사는 고단한 삶일지라도 결코 죽음에 이르지는 않습니다. 오지 않은 불안과 공포는 오지 않는 허상일 뿐이며 자주 평안히 잠에 들 수도 있게 됩니다. 제 경험으로는 그렇습니다. 비록 그런 선택을 해도 가난을 벗어나 부유해지지도 않고 빚이 사라지지도 않는 여전한 형편이지만 조금은 편하게 일상을 계속 하게 됩니다. 그 속에서 하늘이 주는 생각도 못한 위로와 희망이 잭과 콩나물의 씨앗처럼 싹트기도 합니다. 생을 마치는 날 마주할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자유를 그리워하게 됩니다. 기다려집니다. 그럼 종일 울지 않고도 살 수 있습니다.
우울증에서 벗어나고 싶으면 나를 향해 조용히 설득해보십시오. ‘얻어먹어도 죽지 않는다! 빚이 있어도 죽지 않는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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