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으로 생각

나를 설득하기 2 - 난 능력자가 아니다

희망으로 2022. 7. 20. 15:10

‘죽거나 나를 설득하거나 2’

우울증 탈출 비법? 이론? 그런 건 없습니다! 오직 나를 설득하여 하루 하루, 혹은 순간 순간 견디고 살아갈 뿐입니다. 우리들이 영원한 생명 영원한 자유를 얻는 그 마지막까지…
우리를 우울하게 하는 3가지 대상 중 우주와 만물, 세상과 타인은 바꾸기 쉽지 않습니다. 그나마 가능한 것은 세번째 대상인 나 자신, 내 마음을 변화시켜 삶을 받아들이는 길밖에 없습니다.
저는 온갖 상담과 철학적 가르침, 과학 의학이 완전한 비법이나 이론을 준다고 보지 않습니다. 제 경험도 그렇고 많은 실패자들의 통계가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뿐인 모두 다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상담, 숙제 해결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나를 설득하는 것은 각자에게 달렸습니다. 나의 경험과 생각이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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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설득하기 2 - 난 능력자가 아니다

어느 초상집에서 고인을 아는 사람들이 하나 둘 고인에 대한 기억과 자기가 느낀 것을 말했습니다. 그와 같은 직장에 다닌 상사는 그가 책임감은 강했지만 부하 직원들을 강력하게 통제하지는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의 부하 직원은 그가 종종 무섭게 야단을 치는 상사였지만 평직원들의 고충을 회사에 잘 전하고 해결해주지는 못했다고 기억했습니다. 동네 세탁소 주인은 그가 좀 까다롭게 세탁물을 지적했지만 험한 말은 하지 않는 예의바른 사람이라고 말했고, 그의 집 수도와 보일러를 고쳐준 수리업자는 그가 트집은 안잡았지만 수리비를 늦게 주는 매너없는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고향의 어린시절 친구는 그가 소심했다고 말하고 대학교 동창은 그가 불의를 못참고 선동적 리더였다고 기억했습니다. 사람들마다 조금씩 다른 평가를 말했고 어떤 것은 아예 반대처럼 보이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과연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디트리히 본회퍼 (Dietrich Bonhoeffer)는 ‘나는 누구인가?’ 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 사람들은 자주 나에게 말하기를/ 내가 감방에서 나올 때면 / 태연하고, 쾌활하고 그리고 확고하다는데 / 마치영주가 자신의 성(城)에서 나오는 것처럼
나는 누구인가?/ 사람들은 자주 나에게 말하기를/ 내가 나의 간수들과 이야기 할 때면/ 자유롭고, 친절하고 그리고 분명하다는데/ 마치 내가 명령을 하는 것처럼
나는 누구인가?/ 사람들은 또한 나에게 말하기를/ 내가 불행한 날들을 지낼 때면/ 침착하고 웃으며 그리고 자부심이 가득하다는데,/ 마치 승리에 익숙한 한 사람처럼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실제로 나인가?/ 아니면 내가 내 자신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이 / 바로 나인가?]

본회퍼 목사님 조차 자신을 아는지 의문이었는데 과연 나는 나를 잘 알기는 하는 걸까요? 남들이 말하는 내가 맞기는 한 걸까요? 확실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내가 나를 지나치게 능력있고 괜찮은 사람처럼 단정한 것이 틀릴 수도 있습니다. 또 반대로 내가 나를 형편없이 무지하고 쓸모없는 사람으로 알지만 그보다는 나을 수도 있고 남에게도 다르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알고 있는 나와 지금의 내가 달라서 오는 갈등 괴로움 우울함들이 정확하지 않은 오판일 수도 있습니다. 많은 스트레스 실패감 좌절감이 자기가 바라는 수준, 자기가 해야한다는 목표와 달라서 오는 것일 수 있다고 정신과 의사들이 말합니다. 난 왜 못하지? 난 왜 이모양일까? 라고 자책하며 괴로워서 더 망가지기도 합니다. 자기에게주는 압박감 부담으로 심한 우울증에 빠지거나 남들이 자기를 못 알아준다고 분노하고 미움에 빠지기도 한다니… 자신을 분명히 알기만 해도 많은 괴로움이 사라질겁니다.

골다공증 약을 먹고 종일 속이 울렁거리고 아파서 끙끙거리다가 또 배변 통증이 겹쳐서 화장실로 부라나게 달려가서 한바탕 씨름을 합니다. 시간이 닥쳐 채 손을 씻기 바쁘게 밥상을 차려야하고 그 밥상에 수저를 놓기도 전에 또 소변이 차서 한쪽으로 밥상을 밀어놓고 넬라톤이라는 소변빼기를 합니다. 이렇게 살기를 14년, 가끔 중년남자 ㅇㅇㅇ의 인생은 어디로 가고 여기는 어디? 나는 누구? 멍해집니다. 이렇게 살도록 운명지어진 것인지 그것이 내 죄인지 아내 죄 때문인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내내 살다가 생을 마감하게되면 어디에 나를 보상하라고 절규를 해야하나 잘 지내다가도 울컥 올라옵니다.

문득 ‘욥, 까닭을 묻다 - 김기석’ 책에서 말한 욥의 아내가 생각납니다. 저자는 자신이 욥의 입장이 되기도하고 욥의 세친구 입장이 되기도 하면서 욥기를 읽었다 합니다. 그러면서 욥의 아내는 사라지거나 도망가지 않고 끝까지 욥과 함께 그 고난을 다 견디고 다시 자식들을 낳았을거로 추측을 했습니다. 재혼한 이야기도 없고 자식을 잃고 바로 욥을 떠난 것도 아닌게 그 후의 고생과 긴긴 시간을 같이 곁에서 지내야만 나올 대사,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라! 는 말을 했을거로 봅니다. 참고 참고 인내하면서 속은 미어 터지는데 겉으로는 하나님을 공경한다며 원망의 말 한마디 입도 벙긋 안하는 게 못마땅해서 욥에게 밖으로 터뜨리라고 했다는…

난 그 욥의 아내가 된 것 같습니다. 도망도 못가고 잘 견디지도 못하고 내 일상은 통째로 사라진 그 막막한 세월을 끝까지 살아내야하는 운명 같아서 그렇습니다. 상황을 바꿀 아무 힘도 인맥도 없이 깊은 우울증에 빠져 죽기 직전 같은 욥의 아내나 내 입장에서 소리라도 지르고 원망도 하면서라도 살아 남으려는 몸부림입니다. 신의 존재를 믿지 않으면 할 필요도 없고 하지도 못할 방법입니다. 입을 틀어막고 죽기 직전인 욥의 방식이 아니라 우울증에서 살아남는 욥의 아내 방법으로… “난 능력자가 아닙니다! 난 잘 견디는 전사도 아닙니다! 못살고 죽을 거 같습니다!” 소리를 지르며 견디는 길입니다.

우울증이 몰려오면 운동을 하라! 좋은 명언을 외우라! 걷고 여행하고 음악을 듣고 일을 하라! 책을 보고 남과 어울리고 햇빛을 쬐이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라! 남에게 고민을 털어놓고 기도하라! 등 수많은 방법과 조언들이 있습니다. 다 유익하고 실행할 가치가 있습니다. 나도 일상에서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방법들이 나를 완전히 우울증에서 건져내고 나를 몰아세우는 숱한 풍파들에서 평안을 보장해주리라 기대하지는 않습니다. 실재로 내 경우에 그랬습니다.

일상의 음식을 먹는다고 영생을 보장하는 불로초는 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날마다 음식을 먹는 것은 딱 그만큼의 수단과 유익을 보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고도 감당해야할 고통과 외로움과 우울증은 여전히 평생 우리의 발목을 잡고 늘어집니다. 누구에게는 크게 누구에게는 가볍게 다른 차이가 있지만. 그 잔인하게 여전히 남는 우울증들을 미리 알고도 살아갈 각오를 한다면 아마 최악의 절망으로 죽는 낭패는 면할 것입니다. 원래 인생은 그렇게 예정되고 시한부로 주어진 것이니까요!

나는 무엇이든 해낼 초능력자는 아닙니다! 이것이 붙잡아야할 우울증 감당하기의 첫 걸음입니다. “내 아이들이 부모의 욕망대로 천재가 아니듯 내 자신도 내 기대치를 이루어내는 능력자가 아니다! 숱한 괴로움 갈등 스트레스의 원인인 나 자신에 대한 무한한 기대치 과신 오만함을 내려놓고 포기하라! 나는 수퍼맨 능력자가 아니다! “ 라고 자신에게 반복해서 말하며 설득합니다.

이렇게 설득 작업을 하자는 것은 그만큼 자기 자신에게서 생겨나는 우울증이 크기 때문이고, 그렇기에 그만큼 줄일 가능성도 있기 때문입니다. 어림도 없는 초인적 자화상을 포기하면서 동시에 끝없이 부족한대로의 나를 인정하도록 설득하는 것은 그러면 거리감이 줄어 들고 우울증도 가벼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주 중요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할 수 있는 가장 큰 힘은 나의 가장 낮은 곳과 생의 먼 끝에 하나님이라는 신이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이 없는 상담과 철학, 명상과 과학 의학의 논리, 맹신은 모든 사람에게 초능력의 유전자와 죽음의 공포도 넘어서는 해답을 가지고 있기를 강요합니다. 하지만 그런 획일적인 전제는 불가능합니다. 인간은 모두 특별한 다름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하나님 안에서만, 그것도 완전한 탈출이 아닌 견딜 힘을 얻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