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저것 끄적/길을 가는 사람...

내 안부가 아닌 남의 안부를 묻다가

희망으로 2021. 7. 25. 18:32

 

 

<내 안부가 아닌 남의 안부를 묻다가...>

 

컵에 담긴 반 잔의 물을 놓고 생각과 씨름을 반복한다.

‘반밖에 안 남았네...’와 ‘아직 반이나 남았네!’ 를 오가며.

겨울왕국으로 점점 들어가는 시기와

코로나 전염병으로 인한 일상파괴 만남 불가능의 시기가

하루 종일 떠나지 않고 온갖 그늘을 덮는다. 

몸 아픈 사람에게 마음 아픈 병까지 덧 입히는 이 잔혹한 세상...

20일 가까이 약을 추가로 받아 먹어도 도무지 회복이 안되는

아내의 목 통증과 가라앉은 기운 때문에 걱정을 지나 화가 난다.

‘이 놈의 세상... 어디까지 사람을 괴롭히려고 이러나 ㅠㅠ’

내게 주어진 생명이 절반이나 지난 건지 절반이나 남은 건지

비관과 기대를 교대로 오가는 동안 머리가 아프고 지친다.

 

꼭 1년전 성탄절 즈음에 안부를 물었던 분이 카톡을 보내왔다.

어떻게 지내는지, 힘내라며 선물 봉투도 보내주셨다.

감사 인사를 드리고 넘어 가다가... 그 분의 교회가 자꾸 떠올랐다.

새 장소를 얻어 교회가 이사를 했는데 코로나가 들이닥쳤다.

마음이 걸렸다. 이 시국에 교인들은 남아날까? 

세든 건물 살림과 운영에 지장은 없을까? 

결국 안부를 다시 물었다. 전면 비대면 예배로 들어갔고

1주일에 한번은 아무때나 교회 예배당을 다녀가기를 권하시고 계셨다.

아... 그렇게라도 예배당과 성전에 앉아 드리는 기도의 생활을 유지하라고.

그렇게 내 문제 아닌 도움주시는 분의 안부, 교회의 안부를 묻는 동안

내 걱정, 내 슬픔, 내 불안이 나도 모르게 밀려나고 싹 잊혀졌다. 

애쓰고 서로 챙기며 사는 분들의 삶이 일상이 내 맘에 들어오니까 그랬다.

그 와중에 우리 가정의 안부를 묻고 보태는 그분들도 그랬으면 좋겠다.

 

“자기 안부를 묻고

자기 희망에 기대서 살기에는

세상이 너무 쉽지 않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온갖 위험과 사고의 기회가 사방에 늘려 있고

각종 경쟁과 실패의 순간들이 줄을 서서 몰려오는 삶인데

성장하고 나이 먹어 철드는 만큼 기다려주지 못하는 사랑하는 사람들

그들과의 추억은 그리움이 되고 이별로 인한 부재는 또 아픔이 된다.

크게 평가하여 절반은 성공하고 절반은 실패한다고 치자

절반은 나를 두고 먼저 떠나고 절반은 나를 보내고 남는다 치자

‘필히 죽으리라!’ 죽음은 창조자의 철퇴처럼 선포된 약속이자 명령이다.

태어나고 늙고 병들며 사라지는 ‘생로병사’에서 누가 자유로울까? ㅠ

 

이 필연의 법칙이 돌아가는 땅의 세상에서 아무도 평화롭지 못하다.

각종 철학과 예술과 종교를 들이밀어 생명을 아름답다거나

짧게 살아도 가치가 있다 유익하다 영원히 남는다 셈 쳐보지만

인생은 소멸하고 잊혀지는 법칙은 숨쉬는 것만큼 당연한 것이다.

자기 안전과 자기 성공, 자기 강건함을 들여다보는 한 사람들은

늘 불안하고 늘 실패의 쓰디쓴 기억과 병드는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왜? 모두가 그렇고 당연히 그러라고 정해진 인간의 코스니까...

 

하루 건너 기쁜 일과 하루 건너 슬픈 일이 닥친다면

자기를 들여다보며 사는 방식은 슬픈 날과 슬픈 날을 중심으로 사는 것과 같다.

기쁜 날과 기쁜 날 사이로 하루씩 견딜만 하다고 사는 지혜로운 비결은 

바로 내가 아닌 너, 남의 안전과 남의 희망을 도우며 빌며 살 때 가능하다.

자신을 위해 밥을 얻으러 다니는 사람은 배는 채워도 구차하고 서글퍼진다.

그러나 자녀나 부모, 친구를 위해 밥을 얻어올 때는 기쁘고 흐뭇해진다.

자기의 배고픔도 잊고 자존심도 뒤로 미룰만큼 안심하는 법이다.

구차해도 참을 수 있고 마음 놓고 잠을 이룰 수 있다.

사람이 행복해지고 사는 날이 수치스럽지 않는 원리다.

 

예수님은 사는 동안 자신의 배고픔과 외로움과 두려움을 가지고

씨름하며 살지 않았다. 늘 남과 다른 사람의 복을 위해 관심을 쏟았다.

딱 한 번, 십자가에 매달리기 전 자신의 고통과 외로움을 겟세마네에서 

하늘의 아버지에게 호소했지만 그것마져 맡겨버렸다.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세요!’ 라고...

그리고 그는 죽음을 이기고 영원히 남을 위해 살았던 사람이 되었다.

자신을 향해 바라보며 그늘지고 두려워하는 패배에서 벗어나

영원히 사람들의 비상호출 구조요청 단어가 되었다.

‘주님!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를 살려주소서!’ 라는 S.O.S 부호로!

 

사도 바울도 그 법칙을 알아차린 걸까?

다른 사람의 천국 입성을 위해서라면 자기 목숨이 지옥 바닥에 떨어져도

기꺼이 선택하겠노라고 고백했다.

[나는 내 형제, 곧 육신을 따라 된 내 동족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다 할지라도 좋겠습니다. 

- 로마서 9장3절]

바울은 무엇이 우리의 연약한 마음과 인생을 굳세게 해주는지 알았다.

 

내 자신을 바라보면... 내 지금의 처지와, 뻔하게 곧 마주칠 마지막을

예상하노라면 끔찍하고 슬프기 그지 없다. 왜 안그럴까? 

고통과 근심의 바다같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으니...

‘평생을 수고하고 땀흘려 일하고... 늙어서 필시 죽으리라’

아담의 원죄로 생긴 이 주문이 정해진 세상을 살아가지만

예수님이 본을 보인 삶의 길을 택하고 따라서 산다면 견딜만 해진다.

 

“남의 안부를 묻고

남의 꿈을 도와 성공하기를 빌며 사는 것은

세상이 방해하지 못하는 평화를 가져 온다.”

 

2020.1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