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쑥스럽고 슬프지만 고마운 기억>
그리 길지는 않지만 아주 짧지도 않은 지난 날 사는 동안 이런 기억이 있다. 전화 수화기를 들고 민망하게도 울음을 참다가 못 참고 새어나간 불상사가. 돌아보니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많지는 않았지만. 그것도 아내가 아프기 전에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경상도 남자에다가 모질게 이 악물고 14살부터 객지를 떠돌면서 냉정해진 이유도 있었을 거다.
그러나 그 기록은 아내가 아프면서 무너졌다.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몰아치는 급박한 사정은 발등의 불이었다. 나도 모르게 ‘앗! 뜨거워!’ 소리가 나오게 하는.
그 첫 번째는 KBS 사랑의리퀘스트 방송출연 건 이었다. 문제는 막내딸이었다. 초등학교6학년에 한참 예민하던 아이는 방송국이 요구하는 가족모두출연 조건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선택의 여유를 준 마지막 날, 서울 강남에서 충주까지 밤사이에 나는 아이를 설득하러 다녀와야 했다. 안되면 포기하고 연락을 주기로 하고... 그 날, 어쩌다 딸아이 담임선생님과 통화를 하게 되었다. 사정을 말하다가 나도 모르게 눈물이 터졌다. 막다른 담벼락이지만 아이를 무작정 탓할 수도 없고 쉽게 포기하자니 아내의 희망 동아줄이 물 건너가고... 그런 나를 이해하며 위로하는 선생님이 참고 있던 나의 빗장을 풀고 말았다. 한 번도 얼굴도 보지 못한 사이인데. 그리고 밤새 내려간 나에게 아이는 생글거리며 반겼다. 방송출연을 이미 정했다고 했다. 담임선생님이 조목조목 상황과 협조를 설득했더란다.
두 번째는 아내가 중환자실에서 일반실, 다시 중환자실로. 그러다가 병실에 월 대여료 80만원짜리 호홉기를 달고 숨 쉬던 무렵이었다. 마치 평균대 위에 올려진 아내가 비틀비틀 버티는데 나는 아무 도움도 줄 수 없이 바라만 보는 심정이었다. 자기가 늘 보던 성경암송 카드를 통째로 우리에게 주고 날마다 아침이면 문자를 보내고 언제나 전화만 하면 답을 주고 의논을 해주던 난치병환우회 간사였다. 원래 간호사 출신이기도하고 크리스찬이라 얼마나 든든했는지. 그런데 어느 날은 혼자 마음이 추슬러지지 않아 비상구 계단에 나가 앉아 그 간사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도무지 두려움을 감당 못하겠다고... 말을 마치기도 전에 꺽꺽 통곡이 쏟아졌다. 30분이 넘도록 그 긴 시간을 다 들어주었다. 그 시절을 곁에서 부축해주어 오늘까지 왔는지도 모른다.
세 번째는 막내아이가 응급실에 실려 가서 밤새 간호를 한 다음날이었다. 청주에는 아픈 아내가 혼자 누워 있고 충주 도립병원 응급실에는 막내아이가 밤새도록 의식도 없이 누워 있었다. 난 몸은 하나고... 아이를 돌볼 수 없어 청주 병원 병실로 데려와 둘을 같이 돌보려고 했지만 아이가 극구 거절했다. 대신 약속을 했다. 일주일 정도 갈릴리마을로 가서 휴식겸 심신을 추슬러 학교로 다시 복귀하겠다고. 그때, 자초지종을 말하지 않고는 느닷없이 아이를 맡길 수가 없었고 부득이 사정을 말하다 나는 서러움이 복받쳐 올랐다. 이게 무슨 운명인가 싶었다. 공연히 전화를 받아주던 행정간사는 졸지에 울음을 참으며 흐느끼는 내 목소리를 들어야 했다. 다행이 받아주고 잘 돌봐주어 그 고비를 넘겼다.
마지막 네 번째는 불과 며칠 전이었다. 아내와 내가 교대로 한사람씩 좌절할 때는 한사람이 버텨주고 기운을 차려 여기까지 올 수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최근에는 두 사람이 동시에 모두 좌절 상태에 빠져버렸다. 심장과 갑갑한 숨쉬기, 불안감을 내버려두면 큰 사고가 날것만 같았다. 병원 옥상으로 올라가 한 사람씩 이름을 보고 넘기고 또 넘기고. 이런 저런 이유로 주저하였다. 그러다 한 사람에게 멈추어 용기를 내어 누른 다이얼. 단 몇 마디 만에 참던 둑이 넘치고 터지는 울음이 살 것만 같았다. 안다고, 어떻게든 해보자는 말에 죽다가 살아나는 심정이었다. 그 뒤로 정신과 상담과 약처방도 받고 하나씩 대책을 세우고 다시 아내를 돌보기 시작했다. 정말 큰 고비를 넘겼다. 내 평생에 가장 위태로웠던 순간과 가장 힘들었던 무게를 내려놓는 통화였다.
“저 왔어요!”
어제 오후 병원으로 불쑥 나타난 사람은... 바로 세 번째 눈물의 통화를 받아준 사람이었다. 세상에! 먼 지방에서.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돌아오는 시간 전에 여기를 다녀간다고 택시, KTX로 왔고 다시 택시, KTX로 부리나케 돌아갔다.
“그때 나 울었던 거 알아요?”
“아뇨!”
아... 말하지 말걸! 괜히 물어봤다가 들통난거 같다. 듣는 사람은 무심했을 수도 있고 하는 나는 꾹꾹 참느라 생각보다 수화기 너머로 안 갔을 수도 있는데, 이제 자백을 한 꼴이 됐으니 뭐 어쩌랴!
‘그래도 정말정말 고마웠어요, 그때 얼마나 난감하고 손 내밀 데도 없고 힘들었는지 모르는데 잘 도와줘서!’
다시 생각해보니 살다가 남자도 우는 날이 있지만 내 경우는 모두 행운이었던 같다. 일이 잘풀리고 다시 회복하고 힘을 얻는 종류들이었다. 미워하고 저주하고 파탄이 나는 눈물의 전화는 한 번도 없었던 사실이. 살아계신 하나님은 언뜻 불쌍해 보이는 일에도 사랑을 숨겨 도우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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