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저것 끄적/길을 가는 사람...

어느 날의 기억 23

희망으로 2018. 3. 4. 15:23

<어느 날의 기억 23 - ‘편들기’>

몇 년을 글로만 만나다가 어느 날 사라져버린 채 두어 해가 가버리도록 생사도 모르고 지낸 친구가 있다. 어느 날 어떻게 연락이 와서 아내의 병원 검사를 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처음으로 만났다.

“왜 그렇게 갑자기 딱! 멈추고 사라진 거요?”
“그냥, 특별한 이유는 없고 글쓰기가 싫어져서...”
“그랬구나, 참 다행이다. 나는 몸이 많이 안 좋아졌거나 사고가 난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 그런 이유라서 참 좋다. 누가 미워서나, 뭔가 실패해서가 아닌 것이! 머물기 싫어서 일어나 가고, 가다가 더 가기 싫으면 머무는 것이 인생이지, 그게 자연스러운 선택 아닌가? 역시 친구답다!’ 하면서,

그런데 이 친구는 어릴 때부터 피를 토하는 병을 앓고 있었다.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작은 카페를 지키는 이 친구가 손수 내려주는 핸드드립 커피를 마시면서 마냥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두 시간이 넘어가자 휠체어를 탄 아내가 너무 힘들어 해서 거기서 끝나고 헤어졌다.

광고기획에 몸 담은 이 친구는 어느 교회의 집사로 있으면서 달력을 만들었다. 그 달력을 내게 선물로 주었다. 아이들과 어른이 같이 V를 손가락으로 만들어 별이 된 사진을 첫 장에 담았다. 그 사진을 보면서 이유 없이 가슴이 뭉클하고 눈물이 날 뻔해서 간신히 숨기고 넘어갔다.

사람의 첫 번째, 신앙인의 첫 번째, 그건 '기본'이라고 말하는 그 친구가 또 보고 싶어진다. 그 날 헤어지면서 나는 손만 내미는 그 친구를 끌어안았다. 남자끼리 끌어안고 내가 등에다 대고 말했다. '부디 오래 살아줘!' 라고...

편들기 – 사랑의 다른 말, 혼자가 아니라고 알려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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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가족과 살며 생기는 반짝이는 파편들 | 몇 년을 글로만 만나다가 어느 날 사라져버린 채 두어 해가 가버리도록 생사도 모르고 지낸 친구가 있다. 어느 날 어떻게 연락이 와서 아내의 병원 검사를 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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