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투병일기

간병일기 3433일 - '우리가 아는 사이인기요?'

희망으로 2017. 10. 1. 22:26






<‘우리가 아는 사이인가요?’>

 

아는 분의 공연을 보러 좀 먼거리를 다녀와서 아내가 몸살이 났다. 며칠째 밥도 물도 먹지 못하여 영양제와 수액만 맞으며 견뎠다. 오한과 진땀 범벅이 교대로 와서 잠을 설치다보니 돌보는 나도 슬슬 지친다. 아무 것도 아닌 말에도 예민하게 반응을 하며 짜증을 내는 횟수가 많아진다.

 

내가 싸우며 버티는 상대가 시간 일까? 아님, 사람일까?”

 

문득 이 고생이 처음 시작된 이유, 단지 몸이 아플 뿐이었던 것은 잊혀지고, 그로 인해 생겨난 고단함이 점점 부풀고 커지더니 삶을 통째로 비관하는 우울증에 빠져들게 한다. ‘처음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던 성경구절이 설마 이런 경우를 말한건 아니겠지?

 

아픈 아내를 10년 째 간병을 하면서 자주 경험하는 느낌이 있다. 도대체 이런 인내와 버티는 생활을 왜 하는지, 누구에게 유익이 있는지, 이 지루한 싸움의 끝에서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 지 통 모르겠다는...

 

물론 나만 그런 건 아니라는 현상을 여기저기서 자주 보기는 한다. 마치 비닐하우스 위로 차곡차곡 쌓이는 눈처럼 고난의 무게가 누적되어도 버티던 사람들이, 막판에는 정작 한줌 눈뭉치처럼 사소한 일에 목숨을 던져버린다. 이 말이 안되는 결말을 누가 이해할까? 그 마지막 사소한 일만 눈에 보이는 사람들에게는...

 

왜 그렇게 한숨을 많이 쉬어? 아빠 지금 얼굴이 무지 무거운거 알아? ㅠㅠ

 

먼 길을 가는 아이를 기차역에 데려주려고 가는 길에 나도 모르게 내뱉는 긴 한숨과 어두운 얼굴을 보며 막내 딸이 기어코 한마디 한다. 그런 사람 곁에 있으면 많이 기운 빠지고 싫다고.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된다. 이래서 나쁜 일은 더 나쁜 일을 불러들이는 악순환의 늪에 빠진다. 선순환과 악순환, 그 갈라지는 순간에 정말 정신 차리지 않으면 망한다. 일도 꼬이고 사람과의 관계도 꼬이고 줄줄이 실패하는 악순환의 쳇바퀴에 걸려서.

 

난 왜 사는 걸까? 이 지겹고 긴 허무한 생활을...”

 

아이를 내려주고 돌아오는 차안에서 머리속으로 온갖 궂은 일, 사소한 일, 좀 큰 일까지, 잘 안풀릴 경우 닥칠 나쁜 상황들이 화면처럼 흐른다. 생각은 이런 감정을 털어내고 푸른 하늘로 날개 치며 올라가야 한다고 애써보지만 감정은 바람과 다르게 내리막길로 추락한다.

 

-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이 바라시는대로 산다는 것을 말한다.’

 

문득 차에 켜진 라디오에서 들려온 누군가의 짧은 이 말이 가슴으로 쿵 박혔다. 무심코 듣던 기독교방송 설교중의 한 부분이 머리에서 반복해서 맴돌더니 심장이 뜨거워지고 뭔가 뭉클하게 한다. 구약성경에도 이와 비슷한 구절이 있다.

 

[그는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의 사정을 들어 주었다. 그래서 하는 일마다 잘 되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바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나 여호와의 말이다.<우리말성경 예레미아 2216>]

 

아무래도...그렇겠지? 그냥 보고 듣고 말만하고 지나가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니지? 보고 듣고 말하는 대로 살 때에 비로소 하나님과 아는 사이라고 할 수 있을 거야, 마음을 주고 받거나 사랑하는 사이!’ - 광수생각이 아닌 내 생각.

 

어느 날 천국 문 앞에서 실랑이가 벌어졌다. 분명 들어갈 자격이 있는데 안들여보내준다는 사람들과 들어갈 자격이 없어서 문을 열어주지 않겠다는 천국문지기의 주고받는 말. 예수는 그 상황을 단번에 이렇게 잘라말했다.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 - 누가복음 1324~26]

 

짧은 나들이로 생긴 몸살, 원치 않는 질병을 안고 사는 긴 불행, 이런 저런 고단함이 몰려오면 늘 생기는 원망은 그런거다. ‘도대체 하나님은 왜 이러시는거지? 지금 뭐하시는거야... 주무시나?’ 등등, 안좋은 상황 두가지가 마주치면 합이 둘이 되는 게 아니고 다섯이 된다. 거기에 사소한 일이 더해지면 현실은 셋이 되지만 감정은 열가지로 뻥튀기가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럴 때도 그러신다. “과하게 근심하지말고 나쁜 어둠으로 끌고가는 사탄에게 지지말라. 무릇 네 마음을 지켜라!” 라고.

모든 불행과 악이 근심에서 출발하고 비관과 불신이 파멸의 종착지에 데려가니 그러지 말라신다.

 

그 하나님의 마음과 권유를 받아들여 순간마다 추스리고 인내하며 버티고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정말로 알게되는 길이고 만나는 방법이라고 하신다. 그 진심을 외면하면서 안다는 것은 모두 사기고 거짓이라고 예수도 말한다. 하물며 사랑한다는 고백은 어림반푼 없는 헛소리란다. 심지어 주 앞에서 먹고 마시고, 가르침을 받아도 삶에 적용하지 않으면 행악하는 자들아!’라고 듣게 된다고 지적하셨다.

 

그래서...죽을 힘으로 버텨본다. 근심에 몰려 깽판치고 도망가버리고 싶은 순간에도 하루만 더, 이번만 더...’ 하며 넘겨본다. 더 가지고 싶은 욕심, 내 편한대로 해버리고 싶은 충동도 누르고 포기한다. 내 생각과 다르거나 때론 이유없이도 보기 싫어지는 사람을 향한 미움이 목까지 올라올 때도 침과 함께 꿀꺽 삼켜 내린다.

 

이러면 뭐가 달라질까? 정말로?”

 

경험으로 얻은 결론은... 조금씩 달라진다. 나와 너, 가족과 이웃사이에 갈등이 줄어들고 조금씩 미소가 나오기도 했다. 더 이상 과장된 감정이 서로를 상처내지 않으면서 다시 삶의 의욕이 조금씩 생기고 유지된다. 자존심과 감사와 희망이 회복된 사람의 얼굴이 바로 평안이고 하나님이 살아계신 증거가 아닐까? 알고보니 하나님은 주무시지도 외면도 안하셨다. 다만 내가 귀막고 마음 닫고 외면했을 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 요한복음 1423, 24]

안다면서 듣지 않는 것, 사랑한다면서 흘려버리고 지키지 않는 것. 그 길의 끝에는 슬픔과 괴로움, 죽음만이 있을지 모른다. 나만이 아니라 주무시는 하나님의 죽음도... 나도 살고 하나님도 다시 살아나시는 길. 그것은 아는 것을 순간마다 붙잡고 버티며 살아낼 때 가능해진다. 쉽지는 않지만...

 

(맞고 있는 주사제가 끝나면 이어서 맞을 주사제가 놓여 있다...미리 와서 기다리는 다음 괴로움? ㅠ) 


* 2008.5.9 ~ 2017.10.2 맑은고을 병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