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걸어 온 사람 - 그 춥고 더운 날, 울고 웃으며>
‘딩동! 축하해요~’
딸아이에게서 그림 하나가 날아왔다. 직접 그렸다는 그림, 아내가 무지 매달리고 떼쓰고 짐짓 훌쩍이더니... 기어이 성공했다! 딸아이에게 결혼기념축하 그림편지 받아내기 미션? 흐흐. 그런데... 이번 그림은 영화 어벤져스의 팀이다! 악을 상대하며 지구의 평화를 지키는 초능력슈퍼맨, 슈퍼우먼 동료들!
“딸, 혹시... 이 다섯 명이 우리 가족을 패러디한 거?”
“응!”
“설마 했는데~ 히히, 그럼 망치든 토라가 누구야?”
“왼쪽 맨 끝이 토라, 아빠지! 그리고 엄마, 큰오빠, 둘째오빠, 오른쪽 끝이 나야! 크크”
“엥? 그럼 니가... 화가 나면 몸집이 열배로 커지는 헐크? 정말?”
“응”
참, 나... 큰 아들이 캡틴아메리카, 둘째가 스타크 까지는 그렇다치고, 이쁜 막내딸인 자기가 괴물 헐크라니...이런 참사가. 그래도 볼수록 재미있고 고맙다. 악의 집단 대신 불행을 상대로 버티는 다섯 가족. 충분히 초능력 울트라 슈퍼맨들 자격이 있다.
29주년 결혼기념일, 난 아내와 나의 공동생일이라고 늘 우겼다. 그날 우리는 새로 태어났고 우리 자녀들이 세상에 태어날 수 있는 축복의 날이 되었다. 진정한 우리 가족 모두의 생일날이다.
늦은 시간 잠든 아내의 얼굴을 보면서 참 고맙고 귀한 동료고 반쪽의 지체라고 느낀다. 같이 걸어 온 숱한 날들이 우리 사이에 기억되고 머물러있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 전 잠시 유행했던 말이나 노래 한소절만 말해도 아내는 바로 알아듣는다. 김병조의 ‘지구를 떠나거라아아~!’하면 바로 웃고, ‘아, 옛날이여!’ 이선희 노래도 바로 따라 한다.
이것이 같은 시절을 보낸 사람들이 공감하는 동지애다. 하물며 그보다 더한 기억들을 공유한다면? 결혼하고 우리는 스물 몇 번의 이사를 다녔다. 그때는 자기 집이 없으면 으레 월세 전세방을 전전하며 살았다. 그 짐들을 싸고 풀고, 다시 방 구하고 적응하고... 그 여러 번의 기억들을 이 세상에서 오직 한 사람, 아내만이 나와 동시에 담고 있다.
둘째아들은 돌 지나 두 살 언저리에 정말 많이 울었다. 이가 나느라 살을 뚫고 올라오는 시기에 꼭 자정부터 새벽 서너 시까지. 아이를 교대로 업고 골목과 공터를 나가서 꼬박 밤을 세기도 했다. 그 고통스러운 날들이라니. 안산에 살 때는 50년만의 더위에 견디지 못해 차에서 에어컨을 켜고 자기도 했다. 쉼터를 시골에 만들겠다고 무작정 충주로 옮겼을 때는 창고처럼 사용하던 얇은 블록벽 방에서 너무 추워 가스레인지를 켜고 자기도 했다. 방안의 모든 물이 꽁꽁 얼어붙는 혹한 공기였다. 그렇게 아내와 나는 춥고 더운 날들을 함께 보냈다.
아이들이 태어나고 부모와 형제들을 떠나보내는 감사와 고통도 같이 겪었고, 승진 합격의 기쁨과 낙방 실패의 쓰라림도 같이 겪었다. 그 기억 조각들을 한마디만 꺼내도 생생히 맞장구치며 주고받는 사람, 이 세상에서 아내뿐이다. 더러는 아이들도 같이 기억하지만 아주 적은 분량이고.
사람들에게 삶은 어제와 오늘이 모여서 이루어진다. 어제는 오로지 기억 속에서만 존재한다. 주체인 나와 혹은 곁에 있었던 남들의 부분기억에만. 그 기억이 모두 없다면? 우리는 어제라는 삶이 사라지고 만다. 기억 없는 삶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래서 사람들은 열심히 사진을 찍고 영화를 만들고 일기를 쓰고 추억과 소산물들을 안고 귀중히 여기는 거 아닐까?
공동으로 기억하며 수시로 확인이 가능한 것이 우리의 삶이 허공의 안개나 이슬이 아니었음을 증명한다. 보석보다 귀한 생명의 증명서이고 그 자체가 보석이다. 아내가 없으면 그 많은 지난날이 오직 나 하나에게만 존재하는 불완전한 존재가 된다. 같이 공유하지 못함으로 외로운 생명이 되고.
같은 기억을 같이 공유하는 자체가 생명이 되는 것은 사람, 부부사이에만 있는 게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 초막절을 지키는 것은 노예로 살던 애굽을 탈출하여 가나안에서 하나님과 산 시절을 상실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베드로 또한 단지 닭 울음 세 번에 통곡한 것이 아니었다. ‘예수를 모릅니다!’ 라던 자신의 부인과 함께 예수님과 동행했던 춥고 더운 3년의 날들, 바닷가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생선을 구워놓고 부르던 음성, 자기를 어부에서 불러내 제자로 삼아주셨던 그 예전의 기억을 모두 잃지 않고 떠올렸기에 그랬던 것이다. 다시 죽음도 마다하지 않고 따라갈 수 있었던 힘도 그 기억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결혼기념일. 그것은 그렇게 소중한 인생의 동반자, 절반인 배우자를 잊지 말라는 날이다. 같이 기억에 담아서 출발하는 새로운 삶의 시작 날이며 세상에서 꼭 지켜야 할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되새기는 날이다. 나의 긴 생명을 한 번에 훅 날려버릴 수도 있고 소중히 살려나갈 수도 있는 반쪽과 반쪽의 결합. 그 결합이 오늘도 이어짐을 축하하라는 날!
고마워! 딸, 앞으로도 우리 가족에게 닥칠 불행을 악을 물리치듯 이겨나가는 어벤져스 동료가 되자! 아내도 힘내시라! 질병에 굴복하지 말고, 최소한 같이 기억하며 같이 살아가는 은혜를 하나님께 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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