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저것 끄적/길을 가는 사람...

세상은 동시상영 중이고, 저는... 희망의 증거가 아닙니다!

희망으로 2016. 5. 5. 00:03
<세상은 동시상영 중이고, 저는... 희망의 증거가 아닙니다!>

“아아악!”
“이크!.....미안해! 어떻게 해? 피가 나, 에휴...”

날카로운 가위의 끝이 아내의 꼬리뼈 부분의 살을 갈라버렸다.
피부창상을 치료하느라 엉덩이 부분에 새살을 돋게 하는 듀오덤을 계속 갈아붙이던 중, 살에 붙은 테이프를 자른다는 게 그만 살을 같이 베어버린 것이다.
빨갛게 흐르는 피, 많은 양은 아니지만 그 갈라진 살이 다시 붙을 긴 시간이 떠올라 괴로워졌다. 다치는 건 순식간이지만 피부창상이 진행중인 꼬리뼈 부위에 벌어진 살은 아주 더디게 붙기에...

‘머저리같이, 그것도 하나 조심해서 못하다니... 콱 죽어버려라!’

머리를 침대에 쿵쿵 들이박고 아내의 손을 쥐어다 내 머리통을 마구 때리면서 나는 자책으로 중얼거렸다.
혹 사람들은 ‘뭐 그 정도 사소한 실수에 죽을 생각을 하고 그래?’ 할지 모른다.
그런데... 정말 진지하게 죽고 싶은 생각이 몰려왔고 잠시지만 솔깃하게 머물다 떠났다.
내 행동에 놀란 아내가 ‘바보 같이 왜 그래? 실수한거 가지고...’ 하며 달래주는 말과 함께.

물론 나도 남의 일이었다면, 예전의 어느 날이었다면 아마도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거나 나무랐을 거다.
그것도 잘난 척 훈계조로 생명의 소중함이 어쩌고, 실수는 누구나 하는 거고 어떻고 해가면서.

하지만 사람의 어떤 행동은 바로 앞에서 벌어진 동기 하나만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경우도 참 많다.
그 하나 때문에 일어난 결정적 원인이 아니고, 오래 쌓여온 다른 숨은 이유와 감정들 때문일 경우가 더 많다.
어쩌면 어느 분의 염려대로 지금의 내 상태가 바늘 하나 톡대면 펑! 터질 정도로 팽팽한 풍선 같은가보다.
그리고... 방금 사소한 실수라는 바늘에 찔린 위험한 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안타깝게도 세상 여기저기는 그렇게 터지기 직전의 위태한 풍선들이 작은 가시들을 요행히 피해가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다가 못 피하고 찔린 작은 가시 하나에 기어코 뻥뻥 터져버리기도 한다. 인정머리없이 해대는 ‘나약해빠져서...’라는 비난의 수군거림과 함께,

‘실수로 낸 상처 하나로 죽을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답은... 가능하다.’


‘야야! 마 퍼뜩 털어뿌리라! 세상의 반은 여자고 세상의 반은 남자 아이가? 또 좋은 상대를  만날낀데 뭘!’

실연의 고통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친구들이 우스개로 위로하며 가끔 이렇게 말한다.
맞는 말이다. 세상의 반은 여자고 나머지 반은 남자니까 세상 끝난 거 아니다.
세상의 반인 게 그것 말고도 있다. 세상에는 낮과 밤이 있다. 밝은 때와 어두울 때.

그 중의 절반인 어둠이 있다, 사람들은 어둠을 종종 좋지 않은 대상으로 말하기도 하지만 우리는 모두 세상의 절반, 시간의 절반인 그 속에서도 살아간다. 누구는 그 어둠에 숨어 나쁜 일을 하고, 누구는 어둠에 깃들어 쉬며 새 힘을 얻는다.

삶에도 밤낮이 있고 밝은 날과 어두운 날이 있다. 자연의 어둠처럼 삶의 어두운 날도 어떤 사람에게는 절망하는 이유가 되고, 어떤 사람들은 훈련으로 삼아 더 단련되기도 한다. 또 그 힘들었던 순간이 오히려 남을 이해하는 경험이 되어 사랑을 베풀며 더 감사하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문제는 어둠 자체에 있지 않고, 답은 사람에게 달렸는지도 모른다. 같은 물을 마셔도 소는 우유를 만들고 독사는 독을 만드는 것처럼.

사실 세상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늘 그렇게 동시 상영 중이었다. 한쪽에서는 떠난 이를 울며 보내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새로 온 생명을 웃으며 맞이하면서 인류는 유지 되었다. 생명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삶도 그랬다. 살면서 만나는 어둠과 밝음, 고난과 행운, 사랑과 미움, 눈물과 웃음 등, 그리고 우리는 늘 그 둘 사이를 오가며 지낸다. 그 사이에서 좌절하기도 하고 희망에 겨워 방방 뛰기도 하며 살아간다.

‘하늘에는 천국과 지옥이 있듯, 땅에서도 밝은 날과 어두운 날이 있다.’


“참 궁금해, 왜 어떤 사람들은 착하게 사는 것도 아니고 몸 건강을 돌보지도 않으면서 사는데 안 아프고 재미나게 잘만 돌아다니며 살지?”

"그런가?"

“당신은 남에게 해로운 일이나 피눈물 나게 한 적도 없고, 건강 해칠 술을 하나 담배를 피우나, 심지어 고기, 단거, 인스턴트도 즐겨하지 않고, 그렇다고 몸 해치도록 불규칙한 생활도 안하는데 큰 병으로 아파서 이렇게 고생을 하고... 정말 이해가 안돼,”

“그러게...”

“딱 하나, 이유라면 성질 나쁜 남편만나 산 거 뿐인데... 그게 이유인가?”

그리고는 아차! 싶어 얼른 아내의 얼굴을 꽉 잡았다. 혹시나  ‘그래그래!’ 하고 끄덕거리거나 빙그레 웃지도 못하도록! 말 끝나기 무섭게 꼼짝도 못하게 잡은 것은 아무래도 그게 큰 병이 난 진짜 이유가 될 수도 있겠다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디 입만 막고 눈만 가린다고 진실이 가려질까?

“그래...그 때문일 수도 있겠다. 오늘도 조심하지 않아서 엉덩이를 가위로 짤랐지, 이런 남편을 만났으니 병도 나겠다. 당신 천국에 가면 나 쳐다보지도 말고 아는 척도 말고 멀리 떨어져서 좋은 사람들과 아름다운 정원에서 맛있는 거 먹고 행복하게 웃으며 지내. 거기서라도...”

“왜? 나더러 빨리 죽으라고? 내가 그럴 거 같아?”

“으잉? 그런 뜻이 아닌데...” 내가 내 발등을 찍고 말았다.

여기서 상품 없는 퀴즈 하나!
남은 인생 끝나버린 기분이거나 포기해야만 하는 중한 환자들을 가장 울리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건강한 사람들? 아니다. 답은... 바로 같은 환자들이다. 그중에서 비정규직 환자! 일시적으로 머물고 벗어나는 복 받은(?) 사람들.

병원 생활을 오래 하면서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스치며 보냈다. 그중에는 입장이 다른 두 가지로 부류가 나뉘어 기억에 남는다. 작은 교통사고나 일시적 질병으로 잠시 환자의 신분으로 있다가 복귀한 쪽이 있고, 또 한쪽은 영구적인 장애나 희귀난치병, 말기암으로 장기 입원해서 같이 보낸 환자들이다. 또 심한 뇌경색 치매로 다시는 바깥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진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잠시 어울려서 웃고 지낼 때는 서로 차이가 없어 보이다가도 어느 순간 불쑥 아주 속 뒤집어 놓는 경우가 있었다. 쉽게 돌아가지 못하는 환자들에게 상처를 주고 힘들게 하는 부류들은 바로 그 일시적 환자였다가 일상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었다.

일시적인 환자들은 그들이 퇴원하고 복귀하면 곧잘 아팠던 경력은 무용담으로 바뀌기도 한다.
그리고 또 하나의 특징은 영구적인 환자들은 오히려 병에 대해 좀처럼 입에 안올린다. 그래서 얼핏 보면 별 괴롭지도 않고, 절망하지 않고 잘 사는 사람처럼 보인다. 오히려 일시적 환자들이 더 비관적이다. 무섭다고 난리를 치고 징징거리며 사네 죽네 한다. 병원비로 얼마를 까먹었네, 어디를 못가고 이러고 살면 무슨 재미냐는 등, 참 가지가지 한다. 입도 못 열고 속이 타도록 담고 사는 사람들 앞에서...

그러면 영구적 환자들은 수시로 그러는 그들에 비해 마음이 편하고 행복해서일까? 아니다. 한번 씩 울음이 쏟아지면 거의 죽음의 사선을 넘나들 정도로 심한 우울증에 빠진다. 종종 그 허무를 못 넘기고 자살로 마치는 경우도 허다하다.  

병원 안에서처럼 세상살이에도 그렇다. 일시적인 어려움에 빠졌다가 회복되는 경우와 출생 자체부터 대를 물려받아 벗어날 가망성이 없는 가난 등, 거의 탈출이 불가능한 불행을 안고 살아가는 경우다. 어려움에 처했을 당시에는 둘 다 겉으로는 비슷해 보이고 한때는 공감도 같이하지만 사실 많이 다르다.

쉽게 예를 들어보자. 두 개의 항아리가 있는데 한쪽은 바닥에 구멍이 나있고 한쪽은 막혀있는 경우. 둘 다 물을 채울 때는 비슷하게 힘들지만 한쪽은 곧 끝이 나고 쉴 수 있지만, 한쪽은 끝도 없이 부어도 채워지지 않는 그야말로 밑 빠진 독의 차이다. 영원한 시지푸스의 저주와 같다. 영구적 환자들을 울리며 곧 돌아가는 비정규직 환자들 차이가.

그런데 일시적으로 어렵거나, 더 성공하지 못해서 애태울 때는 죽는 소리를 하다가, 어려움을 넘어가고 목표를 달성하면 그들은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자랑을 한다. 믿음이 승리했다고 간증을 하고, 그래서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이 분명하다고 외친다. 사실은 그렇지 못할 경우에도 믿음은 존재하고 하나님은 살아계셨을지도 모르는데...

‘아픈 질병에도 부류가 다르고, 절망에도 깊이가 다른 세계가 있다.’


‘나는 다른 사람의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 라는 제목의 책이 있다.

가난한 엿장수의 딸로 태어나 가발공장을 거쳐 미국 군인이 되고 하버드대학 박사까지 취득한 정말 역경을 딛고 성공하여 수백 번의 강의를 다니는 서진규씨의 책이다.

그는 어떻게 역경을 딛고 성공하게 되었냐는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젊은 시절에는 분노와 오기였어요. ‘왜 나는 무시 받아야 하나’ ‘다른 사람보다 더 잘해야 돼’라는 오기 때문에 살아왔지요. 그러나 제가 어느 정도 성취한 뒤에는 그 같은 오기와 분노는 사라졌어요. 이제는 ‘꿈’ 때문에 살아가요. 제가 이 나이에 힘들게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 노력했던 것도 이 때문이에요. 누군가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삽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롤 모델이 되고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꿈이나 목표를 세우는 멘토가 되기도 한다. 본인도 그 역할을 기꺼이 하고 싶다고 강연마다 선언하고 다닌다.

그러나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악착같이 살아지지도 않고, 그렇게 마음을 먹는다고 모두가 서진규씨처럼 성공하라는 법도 없다. 재능이나 체력(그도 건강이 많이 도움이 되었고 그렇지 않았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도 말했다.)을 모두 타고 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모든 역경에 빠진 사람들이 모두 희망의 증인이 되는 성공을 할 수는 없다. 세상의 통계도 그러하다.

만일 모두가 꿈을 가지고 마음만 먹으면 다 성공할 수 있다면... 세상은 하나의 동일한 부류만 존재할 것이다. 밝은 낮만 있거나 희망만 있거나. 그러면 자동으로 신은 설 자리가 없고 온갖 고통을 당하는 사람을 위로하는 종교도 있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 세상이 과연 존재할까? 과연...그런 세상이 좋은 세상이기는 할까?

‘노력해도 안 되는 것도 있고 기도해도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하늘에 천국과 지옥이 있듯 세상에는 고난으로 영구적 불행을 감당하는 삶이 있고, 행운과 성공으로 누리는 삶, 그렇게 두 개의 세계가 있다. 착하거나 옳고 그르게 사는 것과는 사실 딱히 결부되지도 않는다. 종교를 가지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모두가 성공적이고 해피엔딩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살아도 죽기까지 실패자와 불행으로 보이는 삶도 부지기수다.

대표적인 삶의 모델이 예수님이고 예수의 제자들이다. 또 가난과 전쟁, 고난의 시대를 희생적 삶으로 산 봉사자들 성직자들도 그렇다. 출세와 부귀와는 거리가 멀고 흠잡을 곳 없는 아름다운 삶이지만 평가와는 별개로 그들은 고단하고 가난에 시달리며 극단적 억압을 받았고, 심지어 갇히고 목 잘리는 순교의 끝을 당한 경우가 수두룩했다.

어쩌면 인류의 역사를 통 털어 계산을 뽑는다면 기적과 감사의 간증을 하는 경우보다 더 많은 수가 그저 그런대로, 해피엔딩이 아닌 삶의 종말을 맞이한 것으로 결론이 날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지 상관없이 모두 하나님의 통제와 시선아래 존재한 것도 분명하다. 당연히 한편으로는 의도적 방치로 계속된 세상인 것도 분명하다. 세상의 반쪽을 누가 담당하고 반쪽만 담당하는 하나님이 아닌 다음에는.

그러면 왜 세상 전체를 다스리는 능력을 가졌고, 사랑만이 본질인 하나님이 그 반쪽의 힘든 세상을 방치하고 불행으로 끝장이 나는 인생에 개입하지 않고 내버려둘까? 그렇게 살다간 그 숱한 사람들은 어떻게 변호해주고, 남들이나 역사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도록 해줄 것인가? 많은 질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 답은? ...‘모른다.’

수 백 년이 지나 재평가 받거나 체면을 살리는 경우도 있고 아예 시간 속에 묻혀 정말 개죽음처럼 무명으로 사라져버린 생명도 부지기수일 것이니 뭐라 정답이 있고 확신을 주는 이론이 있을까? 그럼에도 그 길을 가고 후회하지 않는 사람들은 왜? 왜 그랬을까? 모두가 희망의 증인이 되고 성공한 사례가 되어야만 살아 있는 믿음이고, 버림받지 않은 신앙인이라고 정의를 내린다면 그들은 뭐하고 부를 것인가? 실패자? 바보들?...

‘이제 절망속에서도 증거가 된 사람들, 그래도 아름다운 이야기를 해보자. - 두 세계 사이의 하느님나라’


1964년 8월 4일 라르슈(L'Arche) 공동체를 설립한 장바니에 수사는 약간의 가구가 갖추어진 허름한 작은 집 한 채를 얻어서, 콩피에뉴 근처의 요양원에서 지내고 있던 라파엘과 필립보를 받아들였다.

그가 세운 라르슈 공동체는 10명 안팎의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모여 가정처럼 생활하는 모델로 세계 곳곳에 늘어났다. 나중에 헨리 나우웬도 같이 지내게 된 그 공동체는 세상과 사회에서 완전히 다시 복귀가 불가능하고, 심지어는 가족들에게서조차 버림받다 시피한 장애인들을 가족으로 받아들였다. 8명 정도의 장애인과 4명 정도의 보조자들이 가정스타일의 삶을 이루어가는 것을 중점으로 했다.

라르슈에는 가정생활의 열기와 부모의 보호 그리고 여러 가지 장애로 고통을 겪는 다른 사람들- 가족들로 부터 거부당하는 같은 고뇌를 안고 있는 사람들-의 위로조차 멀리한 채 병원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들은 모두 사회적 멸시와 거부의 충격과 상처를 입었다.

라르슈의 가족이 된 그들 장애인들은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복귀한다거나, 세상의 기준으로 보는 극복, 성공 같은 것은 아예 기대할 수 없다. 그러니 그들로 이루어진 공동체 자체도 어느 날에 올 성공 같은 것은 있을 수가 없다. 그냥 계속 되는 삶만 있을 뿐, 기도의 결과로 오는 기적, 믿음의 축복, 뭐 그런 인간승리 부류는 아예 관심의 대상도 아니었던 것이다.

장바니에 수사는 그런 공동체를 왜 시작했을까? 헨리 나우웬 같은 하버드에서도 잘 나가는 대 교수가 왜 생활을 접고 그 공동체로 들어가 오직 한 명, 아담만을 동반자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살았을까?

장바니에 수사는 그 삶의 정신을 ‘두 세계 사이의 하느님나라’ 책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우리는 어떤 면에서 아주 보잘 것 없는 작은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는 고통과 기쁨이 놀라운 모양으로 한데 어우러져 있습니다. 우리 공동체들이 완전한 모습으로 존재하기는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오직 공동체 생활을 하려고 애쓰며,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상처 입은 사람들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일 뿐입니다. 우리는 '상처 입은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더불어 살며 그들의 형제자매가 되고, 그들과 더불어 삶의 여정을 가고 성장하기를 원할 뿐입니다.”

그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기준으로 ‘두 세계’라는 표현을 썼다.
하나는 불행을 당하고 있는 사람과 만나기를 두려워하는 부류들의 세계가 있다고 보았다.
또 하나의 부류는 그들에게 부담을 주는 불행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 세계다.
그리고 그 두 세계의 사이에 하나님이 계신다고 보았다.

사도 요한도 성경 속에서 마음을 닫는 세계와 마음이 닫히는 대상인 궁핍한 형제 세계,
그렇게 두 세계를 말했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 버리면,
하느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요한1서 3,17)

‘나는 절망속의 증인이 된 것일까? 그래도...괜찮다.’


세상에는 한없는 은총과 자비로 기적을 보고 성공하고 웃는 희망속의 증인도 있어야 한다.
또한 마찬가지 이유로 더 아래로 내려갈 여지가 없는 수난의 삶도 하나님 존재의 증거다. 너무 당연해서 바보같은 말이지만 그 수난의 삶을 사는 사람들, 영혼도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이다. 그 수난의 삶속에도 굳굳하게 믿음의 길을 간 사람들이 있다. 바로 예수의 제자들, 특히 바울 같은 경우는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는 완전한 실패자요 바보 같이 고통의 길만 걸어간 어리석은 삶의 모델로 보일 수도 있다.

2천년이 지난 지금은 온 세상의 신앙인들에게 인정과 존경을 받지만, 당시 잘린 목으로 벌판에서 동물과 곤충들의 밥이 되고 사람의 조롱거리가 될 때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겉보기에는 그렇게 망하고 또 망하기만 하면서도 그럼에도 가고 또 가는 절망속의 증인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두 세계의 증인들이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나와 아내는 후자의 모델로 부름 받았는지도 모른다. 이 말을 하기는 너무 죄송하고 걸리는 부분이 있다. 너무 어렵고 힘든 형편속에 생을 이어가는 분들이 주변에 아주 많기 때문이다. 그에 비하면 우리 가정은 많은 보살핌과 도움의 손길을 받으며 여기까지 죽지 않고 살아왔다. 그러니 절망속의 증인 운운 하는 말은 도움 주신 분들과 어려움을 견디는 분들에게 거드름이다. 배신이고...

얼마 전 둘째 아들을 불러내었다. 맛있는 샐러드 사줄 테니 나오라고.
그 아들을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결국 마음에 있는 말을 하고 말았다,
살아서 하는 유언을.

“아들아, 혹시 내가 엄마를 돌보다가 너무 힘들어 견디지 못하거나 병적인 우울함이 와서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절대 지금까지 믿어온 엄마 아빠의 신앙을 부정하지 말아주라. 평생 니들에게 보여 온 신앙 고백에는 변함없다는 것을 믿어줘! 혹시 주위에서 그렇게 수군거리면 절대 그런 게 아니라고, 꼭 남들에게도 말해주라‘ 라고...

정말 진심이었다. 나도 자식들에게 믿음의 길을 걸어간 부모로 당당하고 훌륭하게 마치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고 싶다. 그러나 사람의 마지막은 누구도 큰소리 칠 수 없다는 것을 주위에서 여러번 목격하면서 자신감이 없어졌다. 아내의 최고 소원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혹 몸이 아프더라도 횡설수설 정신을 놓쳐서 자식들에게 상처와 고통을 남기고 떠나지 않게 해달라는 것. 그게 어디 마음 먹고 노력한다고 될까? 그게 가능하면 누가 근심할까...

그래서 나는 그 연장선에서 절대로 사람의 성공 출세가 결코 100% 하나님의 뜻은 아니라고 믿기로 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고 반드시 모든 기독교인이 세상에서 출세하고 죽을 질병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나고 남들 보란 듯 잘되기만 하지는 않을 거라고, 그리고 그래도 나는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부인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다.

병원에 너무너무 미운 사람이 있었다. 보통은 남들이 잘 대해주면 자기도 보답으로 잘해주고 애를 쓰는 법이다. 그런데 그 사람은 아주 작은 일에도 너무 날카롭고 예민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았다. 변덕스럽고 싸움닭 같고...

그런데 어느 날 늦은 시간에 쓰레기를 버리러 복도 비상구 계단을 나갔는데  그 사람이 한숨지으며 울면서 전화 하는 것을 보고 말았다. 우리의 사정을 어느 정도 아는 그이는 단지 ‘많이 힘드시지요?’ 라는 엉겁결에 한 나의 말 한마디에 놀랄 정도로 감동해서 울먹거렸다. 어느 누구의 위로나 말보다 힘을 얻은 표정으로.

그래서 나는 알았다. 이래서 절망의 한 가운데, 아님 깊은 심연에서 다른 이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역할을 시키려고 우리 가족을 고랑텅이로 내몰았나 보다 라고, 만약 정말 그 이유로  그랬다면, 가장 깊은 절망의 상태, 극단적 우울증으로 올지 모를 고통의 상황도 나는 받아들이려 한다.

‘절망속의 증거, 그럼에도 변치 않고 믿는 증인이 되는 길을 가라면 기꺼이 수용하려고 한다.’ 어쩌면 그 겉모양 때문에 경건하고 성공만을 믿음의 결과로 믿는 이들에게 손가락질 받고 파문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누가 그런 삶을, 그런 케이스가 되고 싶어 할까? 나도 그러기 싫지만 징조가 그렇다. 어려움에 어려움만 점점 더 가중이 되어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숨을 끊고 죽든지, 그 고통을 안고 벌레들의 발악처럼 끙끙거리며 생명을 유지하든지, 어느 쪽이든지 쉽지 않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려면 그들만큼 비슷한 고통의 터널을 지나가야 한다. 그래야 위로가 믿어진다. 그래야 그 입으로 부르는 예수, 하나님 이름이 밉지는 않을 것이다.

희망과 성공의 길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는 성공적 사례가 필요하듯, 불행한 이들에게도 자기보다 더 지독하고 더 대책 없이 이어지는 삶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고 사는 고백을 보여 주는 삶도 필요하다. 그래야 그 증인을 보면서 위로를 받거나 혼자만 버림받은 게 아니라는 확신을 가질테니까.

‘나는 선서한다. 내게 주어지는 어떤 경우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나님을 믿고 감사 한다!’


나는 두 개의 세계를 인정한다. 세상은 늘 동시 상영을 하는 중인 것도!
그 양쪽의 세계가 짧게는 하루, 길게는 인생이라는 수레를 끌고 가는 두개의 바퀴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태양만, 사랑만, 희망만 있는 삶은 어떨까 상상하다가 끔찍한 어딘가 도달하곤 그만둔다. 권태라는 회색 세상. 그곳은 진짜 공동묘지 같아서.

감사는 누구를 위해서 하지? 용서는 누구를 위해서 하지? 그러다 알았다.
성경에서 원수를 사랑하고 오리를 가자면 십리를 가라는 것은 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고 나를 위해서 라는 것을. 미워할 때의 심정과 용서하고 사랑할 때의 삼정을 비교해보면 바로 답이 나온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된다. 나만 아픈 게 아니더라는...

너무 힘드니까 나처럼 힘든 남의 마음이 보였다. 그러니까 보이기 시작했다. 여기 저기, 이 사람 저 사람 모두 두 겹 세 겹의 불행과 고통을 끌어안고 씨름하며 살더라는.
미운 사람의 속에는 미운 것만 있는 게 아니고, 나와 큰 차이가 없는 고통과 막다른 처지에 몰리면 그럴 수밖에 없더라는 사실도 알았다. 나만 아니라 상대도 그랬다. 나를 알아보고 공감하더라.

그 이후로 사람에 대해서든지 하늘에 대해서든지, 원망과 의문을 좀 내려놓고, 미운 사람에 대해서도  불평을 좀 줄이고 이해하고 마음을 여는 쪽으로 노력해보려 한다. 원수를 사랑하고 미움을 줄이라, 원수를 벌하는 것은 내게 맡기라 그건 내 몫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다시 결심한다. 혹 나를, 아내를, 우리 가족을 절망속의 증인으로, 증거로 삼겠다고 하면 기꺼이 그러겠습니다! 하고 수용하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