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빠지고 나서야 알게 되는 좋았던 것들>
1. 남은 것도 소중하다.
“순둥이... 니가 부럽다.”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아내가 허리를 푹 숙이며 통곡을 한다.
“왜 난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거야 엉엉...”
순둥이는 물휴지 상표 이름이다.
방금 아내의 엉덩이와 허벅지에 묻은 변을 닦고 휠체어에 놓아 둔 것.
오늘 따라 아무리 힘을 주어도 나오지 못하는 배변을 비닐장갑을 끼고 손으로 빼냈다.
그러다보면 여기저기 어쩔 수없이 변이 묻는다.
순둥이. 말처럼 그렇게 변이 잘 나와 주면 얼마나 좋을까?
아내의 오열에는 그만큼 서럽고 고통스러운 몸의 상태가 쌓여있다.
그래서 울지 말라고, 그만하라고 말리지도 못한다.
그저 휴지를 뚝뚝 짤라서 손에 쥐어주거나 등짝을 두드리며 쓰다듬기만 한다.
좋은 말들도, 힘을 주는 희망의 생각들도 이런 상황이 오면 다 밉다.
그만두고 싶고 신앙조차 허울만 좋은 신기루 아닐까 의심스럽다.
- ‘설마 신에게 사기를 당하는 건 아니겠지?’
아내가 처음 대장 신경이 마비되었을 때는 좌약을 넣고 30분 정도 기다리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그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1년 지나면서 1시간 또 1년 지나면서 1시간 반, 2시간...
그러다가 몇 년이 지나면서는 기다려도 아예 안 나와서 결국 장갑 끼고 빼내기 일쑤.
좌약이 내성이 생겨 더 이상 장을 운동을 시켜주지 못했다. 배만 아프게 하고.
결국 5년이 지나면서 약 대신 손으로 30분 이상을 배를 두드리고 비데로 자극하고
그렇게 씨름하면서 해결해 나왔다. 그리고 장에 좋다는 여러 가지를 계속 사용했다.
장에 좋다는 유산균 음료 윌(will)을 나는 손도 안대고 아내만 날마다 하나씩 먹였다.
또 섬유질 풍부한 밀기울을 두유에 타서 먹이고, 함초액이 좋아 그것도 구해 먹였다.
그 중 비싼 함초액은 정말 효과가 있고 변을 보는데 많이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그런데 형편이 딸려 가장 비싼 함초액을 중단했더니 바로 변화가 왔다.
눈에 보이게 힘들어지고 애를 먹는다.
‘먹을 때는 그렇게 좋은 줄 몰랐는데 중단하니 바로 알겠네...’
마치 아프고 나서야 건강할 때가 얼마나 좋았는지를 실감하는 것과 똑같이.
많은 경우에 우리는 그런다. 소중한 사람이 떠난 후에야 그 빈자리의 크기를 아는 것처럼.
오죽하면 유행가에서도 그랬을까. ‘있을 때 잘해, 그러니까 잘 해!’라고.
내게 아직 남아 있는 귀한 것들이 너무 고단한 당장에 치여 무시당한다.
어느 정도는 남아 있을 게 분명한 건강, 생명, 친구, 희망까지도 마치 없는 듯
지금 한 가지가 괴롭다고 다 놓고 싶어진다.
하지만 자포자기하여 그것들을 잃고 나면 나는 또 얼마나 힘들어질까?
더 심한 절망에 빠지고 더 심한 불편을 감당해야 할거다.
오늘 우는 아내와 늘어나는 간병세월이 나를 지치게 한다.
자꾸만 몰려오는 깽판의 유혹 앞에서 나는 그 뒤를 짐작하며 참는다.
‘아픈 후에야 건강이 소중하다는 걸 안다.
그럼 잃어버리기 전에 남은 걸 귀한 줄 알아야 하지않을까?
그것마저 잃고 땅 치며 후회하지 않으려면...’
2. 보이는 사나움 뒤에 숨은 안쓰러움
“쿵!”
육중한 화장실 유리문을 미는데 안에서 뭔가 쾅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급히 반대로 당겨내고 들여다보니 휠체어를 탄 노인네가 쩔쩔매고 있다.
“아이쿠, 미안해서 어째요? 안이 보이지 않아서 그만...
그나저나 이 문은 항상 열어두어야 하는데 왜 닫혀있었지?“
사과하면서 중얼거린 내 말을 들었는지 그 노인분이 도로 미안해한다.
“좁은 세면대에서 씻고 돌아서다가 그만 문을 닫아버렸네요.”
“아하...”
그때야 기억이 났다.
이 어르신이 얼마 전 나와 대판 싸운 그 분이라는 걸.
아내가 남자 화장실에 들어가서 씻는다며 복도에서 닫힌 샤워실 문을 계속 흔들었다.
두 번, 세 번 대답을 하고 양해를 구하다가 내가 나와서 이러저러 사정을 말했다.
그런데 요지부동이었다. 그러면서 여자는 여자 쪽 샤워실을 가라고 막무가내였다.
아내는 혼자서 씻을 수 없고 보호자인 내가 남자인데 어쩌라는 거냐고 해도 안 들었다.
간호사들이 와서 말리고 구경난 듯 사람들이 빙 둘러서서 바라보고 그랬다.
그런데... 그때 사납고 무지막지 어거지를 부리던 모습과는 너무 딴 판이었다.
좁은 자리에서 편마비된 한쪽 팔 다리만으로 휠체어를 돌리고 나오지 못해 끙끙맨다.
“제가 돌려서 밀어드릴께요.”
그 분도 분명 나를 기억하는 모양이다. 우물쭈물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입 안으로 웅얼거리며 고맙다고 말하는데 민망하거나 당황하시는 게 분명하다.
복도에서 그렇게 대판 싸운 사람에게 도움을 받아야하는 입장이 되었으니...
종종 그런 장면을 본다.
장애를 가진 분들이나 가난하고 옹색한 처지에 빠진 분들이 아주 사나워지는 순간을.
쌈닭같이 목소리를 높이고 사소한 일에도 목숨이 걸린 한 판처럼 결사항전을 하려는 듯
그런데 나는 그 뒤쪽, 혹은 바닥에 무엇이 있는지를 몰랐다.
그 표면적인 용맹스러움의 그늘에는 쌓인 피로와 불안과 조바심들이 있다는 것을.
절박하거나 체면을 지킬 수 없는 형편 등이 마음을 슬프게 하고 예민하게 한다는 걸.
그 노인분의 약한 등짝을 보고 말았다.
길고 긴 아내 간병의 세월동안 무기력한 가장으로 위축되어진 나처럼,
순전히 남의 도움으로 생명줄을 이어오면서 생긴 내 예민함과 비슷한 그런 구석이 있음을.
보이는 사나움 뒤에는 스스로 자랑스럽게 존재하지 못하는 안쓰러움이 있다.
눈에 보이는 것이 모두가 아니며, 정말 그들은 물리쳐야 할 몰상식한 대상이 아니라
따뜻한 바람으로 외투를 벗겨주어야 할 겨울 동상 걸린 사람일지도 모른다.
‘미안했습니다. 내가 전에는 그 모습을 못보고 앞쪽 얼굴만 보았고,
귀에 들리는 욕지거리만 전부인 줄 알았습니다.
말하지 않는 신음은 몰랐고 안 보이는 불편함과 슬픔도 몰랐습니다.‘
3. 이별이 두려워 사랑을 아낀다.
한 시간 가까이.
길거리 편의점 테이블에서 딸아이와 말씨름을 한다.
“왜 자꾸 그렇게 말해?”
“내 말뜻은 그런 게 아니었다니까...”
“좀 들어만 주고 ‘힘들었구나’ 해주지 자꾸만 해결을 해주려고 하잖아 아빠는!”
“그게 아닌데...”
그러다 결국은 천근 무게는 될법한 철문을 나와 딸 사이에 내리고 말았다.
“이제 곧 너도 성인이 되고 그러면 우리 이런 다툼도 서운할 일도 없어질거야.
그러니 네 마음에 안 들어도 조금만 참아주렴. 얼마나 우리가 같이 있겠니...“
“......”
“우리 집은 20살만 되면 어지간하면 간섭도 요구도 안하잖아?
물론 스스로 경제적 생계도 책임지고 꿈도 혼자 힘으로 이루어야 하지만...“
아이는 그 말에 우울해지는 표정이다.
곧 떨어져서 지내게 될 거고, 그러면 잔소리도 의논도 모두 줄어들건 빤하다.
우선 주거범위가 멀어질 테니 그렇다.
또 많은 일을 스스로 결정하고 해결하면서 더 그렇게 될 것이다.
“어떤 부모도 자녀와 같은 세월을 살아서 모든 것을 누리지는 못하잖아?
그러니 좀 서운해도 우리 이렇게 보고 사는 동안을 잘 보내자.“
딸아이는 예고 없이 억울하게 닥친 엄마의 질병 때문에 고생을 했다.
그럼에도 아이는 누가 각본을 쓴다면 최상으로 쓸 그대로 자라주었다.
상을 수시로 받아오고 하고 싶은 것들을 열심히 다 해내면서도 아프지 않고.
대화중에 다투게 된 동기도 그랬다.
바로 직전 치른 고3 마지막 1학기 중간고사를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했단다.
그래서 목표한 정도의 성적을 냈는데 담임선생님이 그러시더란다.
“마지막 한 번 남은 기말고사에서는 좀 더 성적을 올려보자! 할 수 있지?”
그래서 부담 때문인지 기분이 상했는데 나는 자꾸만
왜 그게 기분이 나쁘냐고 이유만 묻는다면서 내게 따졌다.
그러나 어쩌랴. 모든 것을 주고 싶고 아주 사소한 하나라도
힘이 되어주고 싶다보니 나도 모르게 오버페이스를 하게 되는 걸.
아이가 자라면서 점점 멀어지는 것이 마음속으로 서운함도 느껴지지만
한편으론 더 큰 두려움은 반대로 아이와 너무 가까워지는 것이다.
자유를 누리는 울타리만 되어주는 가까움이라면 부작용이 없겠지만
가까워질수록 염려할 것이 많아지고, 서운함도 늘어나니까 문제다.
그러다 필시 어느 날 상처를 받거나 상처를 주기도 하게 된다는 걸 안다.
어쩌다 원치 않는 이별의 시간이라도 오면 우리 피차 감당하기가 힘들 것 같다.
그런 가까움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나는 진실을 안다.
명분은 나중에 우리가 자연스럽게 멀어질 거라고, 미리 각오하자면서도
정말은 이별이 두려워, 상처받을 순간이 두려워 사랑을 아끼는 것임을.
아낌없이 주고도 욕심 없이 온전히 떠날 자신이 없어서 그런다는 걸.
아이에게 좋은 아빠와 좋은 신앙의 선배가 되고 싶은데 잘 안 된다.
하나님께 받아서 양육임무를 잘 완수하고 세상으로 돌려주고 싶은데.
조금만 애를 쓰면 아이를 가두려고 하게 된다.
아이와 다투고 아이를 울리고 나서야 나는 내 모습을 알아차린다.
내 소중한 아이를 어떻게 힘들게 했는지를.
그런데 고작 하는 것이 ‘이별이 두려워 사랑을 아끼는 것’ 뿐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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