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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 뉴스에 네팔의 지진사태 소식이 속보로 나온다.
정말 안타깝고 지금도 겪고 있을 분들의 고통이 마음 아프다.
그러다가 어떤 태도들이 화를 돋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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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사람은 많이 다치지 않아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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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자가 300명도 아니고 3000명도 넘었다.
앞으로도 얼마나 더 늘어날지 모른다.
국내에서 30명만 사망하는 사고가 생겨도 난리통이 날거다.
멀리 있는 사람과 가까이 있는 사람의 생명 값이 다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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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도 겪은 감정이 다시 떠오른다.
미국에서 비행기가 추락하여 수 백 명이 죽었는데
한국인은 1명뿐이라 다행이라던 멘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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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바다 건너라는 거리의 정도에 비례로 슬픔이 좌우된다?
하기는 우리 속담에 ‘강 건너 불은 구경’한다는 말도 있다.
오죽하면 그런 말이 나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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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태도에 속상해하는 나도 예외가 아니다.
나도 모르게 먼저 일어나는 감정은 그렇다.
멀리서 난 사고는 한결 여유 있게 애도(?)를 표한다.
사람 속에는 본래 그런 잔인한 감각이 잠재되어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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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속보가 나왔을 때 사망자가 680명 좀 넘었다고 하자
어느 일베 소속 말종이 뉴스 기사에 댓글로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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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싸! 1000명 찍고 가자!’ 뭐 그런 내용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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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살인을 하고 싶은 정도의 충동적 분노가 일어났지만
따지고 보면 50보 100보, 도찐개찐이다.
고상한 외면이나 노골적 생명 경시나 바닥이 비슷하고 결론도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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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르는 남보다 한 다리 건너서라도 아는 사람이면 더 애통한다.
그리고 친인척이거나 만난 적이 있는 사람이면 더 그렇다.
세월호 사고로 애통하는 가족들과 그 아픔에 동참하는 감정도 그런 이유일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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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바다 건너 사고마다, 모르는 사람들의 슬픔에도 동일하게 동참하기 힘들다.
70억 인구를 그렇게 느끼다가는 일생내내 울고 살지도 모른다.
제 명도 다 누리지 못하고 스트레스와 병에 걸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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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을 늘 갈구하고, 받고 산다고 감사하는 신앙인들은
과연 하나님과 가까운 거리에 사는 걸까?
만난 적이 있거나 사돈의 팔촌 관계쯤 되는 걸까?
무슨 이유로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애지중지 하시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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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나님처럼 사랑의 에너지가 넘치거나 위대하지 못하다.
그러니 어째야 하는 걸까?
거리만큼 애도의 민감한 정도를 차별화 하고,
만난 적이 있거나 혈연관계의 단계를 적용해서 팔 걷고 나서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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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한 대답을 제외하고 생각해보니 그저 이런 답이 나온다.
지독한 근시, 손닿는 거리만 느끼는 인간의 능력과
모두를 생명의 본질로 귀하게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
그 간격을 1미리씩 줄이는 노력으로 평생을 살다가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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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마음이라도 가져야 나중에 나도 누군가에게 수용받고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때 덜 민망하지 않을까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