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당동 더하기 25‘ - 읽으면서 다시 떠올리는 가난 (1)>
1.
삶이란 그런 것이다.
어디 책 따로 설교 따로이며, 이론 따로 실천 따로가 가능하단 말인가?
그건 다 자기는 살기 싫으면서 남들에겐 좋은 말로 인기나 얻으려는 반쯤은 사기꾼인 먹물쟁이들이 하는 수작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책의 첫 대문을 들어서자마자 나오는 이 선언!
[<사당동 더하기 25>를 쓰면서 이 불가분의 실천의 주체는 ’연구자‘였다가 ’필자‘였다가 혹은 ’교수‘였다가 심지어 ’우리‘였다가 때로 ’아줌마‘였다가 심지어 ’우리‘였다가 또는 ’나‘가 되었다. 이들 경계를 넘나들었다.]
그럼! 산다는 건 그런 것이다. 마음에 든다. 아니, 진실이다.
2.
1장 - 두 세상을 오가다. (밑으로부터 사회학하기)
그랬다. 나는 밑에 사는 사람이었고 두 세상을 사는 중이었다.
1979년부터 1985년까지 철거민들이 밀려나서 사는 상계동 끝 마을에 살았었다. 사람들은 비닐하우스를 지어서 그 안에서 지지고 볶으며 살고, 다닥 붙은 개미굴 같은 판자촌 골목에서 아이들은 몰려다니며 놀았다. 나도 그곳에서 지독한 가난과 함께 독신으로 자취생활을 하면서 총각시절을 살았다.
작은 교회에서 만난 친구들과 김민기의 ‘친구’나 ‘작은 연못’을 통키타로 부르며 밥 굶기를 밥 먹듯 지내면서 박정희가 죽는 뉴스도 보고, 광주에서 폭도들이 나라를 작살내고 있다는 관제오보도 욕하며 보았다. 지금도 일베류들, 심지어 아직도 일부 보수적기독교인도 주장하는 조작뉴스를 주먹 쥐고 울면서 보았다. 담임목사님은 스스로 상계동은 갈릴리마을이며 망해서 왔다가 조금만 벌면 도시로 나가버리는 뜨내기 교회임을 당연히 받아들였다. 그래서 얼른 돈 벌어서 나가세요! 그러셨다.
책의 시작부분에서 헬쓰장을 하는 금선 할머니 손주 덕주씨 이야기나 사례로 나오는 구구한 사연들, 모두 익숙한 풍경들이다. 굳이 조세희 작가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볼 필요도 없이 날마다 보고 만나는 생활을 이 조사기 86년보다 7년이나 전부터 상계동 철거민 마을에서 생활하던 중이었으니...
더 실감나는 분위기가 궁금하면 영화 ‘꼬방동네사람들’이나 ‘어둠속의 자식들’을 보라고 권하고 싶다. 가난한 사람들의 친구로 산 허병섭목사님의 모습과 그 시대의 군상들이 어떻게 밑바닥에서 살고, 가난이 대를 이어지는지 말이 아니고 피부로 먼저 와 닿을 것이다. 영화관에서 꺽꺽 울며 보았던 기억이 아직도 서럽게 떠오른다.
1981년 봄이었던가? 비가 쏟아지는 날, 다니던 영어회화책 판매회사가 파산하고 단체 실업자가 되었다. 우루루 짜장면 하나 먹고, 앞으로 뭘 해서 먹고 살 건지 종로의 다방에서 낄낄거리던 그 날, 돌아갈 가정이 있고 부모님들이 건재했던 다른 친구들은 널널하게 티비의 프로야구 원년 개막식을 신나게 보고 있었지만 나는 주머니 속을 만지작거렸다. 다음날 출근 할 곳도 없고 며칠을 못 넘길 생활비 등 처량한 마음이 몰려왔다. “나도 언젠가 취직을 하면 니들처럼 웃으며 프로야구를 봐줄테다.” 속으로 다짐을 하면서, 그리고 “나는 평생 결혼을 안 하겠다. 이 꼴로 가족을 건사하기는 틀렸다.” 그러면서... 가난은 그렇게 대를 물린다는 것을 뼈저리게 알아가고 있었다. 당시 상계동 들어가는 버스가 215번, 15번 두 개였다.
라르슈 공동체의 설립자 장바니에 신부는 ‘두 세계 사이의 하느님나라’ 라는 책에서 정신박약아나 장애자들을 정상인 사람, 세상과 연결시키는 역할을 하는 하나님나라를 설명했다. 이 두 세계는 중간에 누군가 있어야 한다. 죄인들과 하나님을 화해시키고 회복하러 오신 예수님처럼, 그들 스스로는 결코 가난도 절망도 벗어나지 못한다. 대를 물릴 수밖에 없는 악순환이 기다린다. 이 조사로부터 시작한 선한 작용들이 두 세계를 이어주기를, 사람의 본성, 정상인들의 욕망을 기준으로 보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시도임을 알면서도...
3.
2장 - 가난 두껍게 읽기
가난이라는 대상이 원래 두껍다. 얼핏 생각하면 하늘은 끝이 없고 오르고 또 올라도 닿지 않는다고 떠올린다. 그런데 아래로는 누구나 바닥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가난은 분명 아래로 추락하는 방향이지만 끝이 없다. 빠지고 끝이려니 하면 더 아래가 있고 더 추락할 여지가 또 있다. 신기한 수렁이고 늪이다. 그래서 가난은 두껍기 그지없다. 그러니 두껍게 읽을 수밖에...
책 속에도 잠깐 예가 나온다. “흑인이면서 가난하다는 건 어떤 느낌인가?” 라는, 그렇게 가난 속에도 차원이 있고 등급이 있다. 세상은 재개발을 통해 부를 챙기는 계층이 있고, 재개발을 겪으며 구석으로 구석으로 밀려나가는 더 가난해지는 철거민 계층이 있다. 그리고 그들을 조사하고 연구하는 또 다른 지대의 사람들이 있다. 책 속에서도 그곳 주민들은 묻는다. “저 아줌마는 누구인데 맨날 마을을 들락거리는거야?”라든가, “영세가 뭐예요?”라고 묻는 덕주씨의 세상이 있다.
80년대 유행하는 단어들이 있었다. 야학, 노동운동, 철거민투쟁, 운동권대학생 등,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나 ‘어둠의 자식들’ ‘꼬방동네사람들’을 보면 가난한 사람들 속에서도 바깥으로 탈출하려고 심지어 더 가난한 사람들을 속이고 등치고 억압하는 계층도 나온다. 머리가 좀 돌아가거나 힘이 좀 센 깡패들과 악질 부동산 괸계자들, 가난한 사람들이 지겨워 배신하고 몸까지 팔아가며 벗어나려다 불행해지기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성공할까? 그러나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그들을 기다리는 건 더 큰 외로움이나 보복, 타락으로 인한 좌절감들이었다. 아님 인간성을 완전 상실하게 되는 파멸이고...
연구자의 시선으로 그들을 만나고 기록하는 긴 이야기들, 과정, 자료들이 2장 - ‘가난 두껍게 읽기’에 나온다. 발을 중산층이나 안전한 지역에 두고 어설픈 착한 마음만 가지고 기웃거리다 된서리를 맞는 상황도 있고, 마음을 몰라주는 얄팍한 눈앞의 이익을 따라갈 수밖에 없어서 다시 가난의 굴레로 떨어지는 사례들도 나온다. 사당동이고 상계동이고 미국 흑인슬럼가이고 남미 어디고 다 있고 반복되는 가난의 본질이다. 스스로는 벗어나기가 참 힘든 두께와 약한 인간의 본성, 특히나 불안에 오래 찌든 가난한 사람들의 상태란 그렇게 되기가 더 쉽다.
그럼에도 이 살핌과 기록과 이해로 다가가는 자료들이 중간 완충지대를 만든다. 극과 극, 양극화 시대를 풀어 나갈 아주 작은 희망의 싹이 거기에서 시작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배고픈 사람에게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다. 어떤 이들은 오늘 지금 당장 굶지 않게 가능한 방법으로 나누고 먹이는 일을 하기도 한다. 무엇이 더 중요하고 더 정답일까?
4.
3장 - 산동네 달동네 별동네 ___
80년대 철거민들의 이야기를 다룬 ‘꼬방동네사람들‘을 보면 하나같이 술주정에 폭력적인 아버지 남편들이 나오고, 한 집 건너 장애를 가지거나 질병에 걸린 가족이 있다. 왜 더 저축하지 않고 더 열심히 일하지 않냐고 하는 사람들의 지적을 하는데도 거리가 먼 행태들이 무수하다.
한 가지 물어보자. 비가 와서 돈벌이를 공친 날품팔이 가장의 지독한 괴로움에 어느 사람이 도움이 되는지를, 한 사람은 그를 불러서 밀가루 부침개에 막걸리 한 사발을 마시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어주고, 또 한 사람은 기술교육을 시켜주고 노동법을 가르치며 멀리 세상을 바꾸는 준비를 하라는 경우, 이 두 가지는 경쟁적인 선택의 대상이 분명 아니다. 사람이 가난을 뿌리치는데는 두 가지가 필수적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대부분 눈앞의 괴로움에 몰락한다. 술을 마시고 분노를 주먹으로 가족에게 풀고...
오랜 가난은 그렇게 사람을 습관화시키고 절망에 익숙하게 한다. 3장 ‘산동에 달동네 별동네’는 그렇게 시작된다. 첫 페이지의 그림일기처럼. 그들의 눈에는 동사무소 직원이 희망의 대상이었고 손에 잡힐 것 같은 꿈이었다. 대학교수나 높은 공무원, 큰 회사의 사장은 아예 다른 세상이었던 것이다. 하루를 살아야 미래가 있는 법이니, 하루에는 하루가 필요한 양식을, 미래는 미래가 필요로 하는 꿈이 있어야 하는 법이 정답이다.
가난을 어떤 수단으로 삼았던 정치인들 학자들 운동권들은, 정작 가난해서 가난을 벗어나려고 가난한 동지들을 배신한 사람들보다 더 해로운 경우가 많았다. 역사적으로나 시대적으로도. 반대로 멀리 정당한 꿈과 목적지를 가지고도 오늘 지금을 같이 살았던 이들도 안다. 천국을 말하면서도 참새보다 깃들 곳 없고 여우보다 굴도 없이 풍잔노숙을 함께하던 예수. 투쟁과 목숨을 건 생활을 함께하면서도 멀리 내다보던 체게바라. 배운 것을 신앙과 봉사라는 결단으로 살기 위해 늘 그들 곁에 머물렀던 많은 성직자와 단체들이 있었다.
그렇게 지금과 미래가 하나의 사람, 하나의 삶에서 작동하지 않는 많은 이론들, 집단들은 늘 가난한 사람들을 더욱 허무하게 만들기 일쑤였다. 이 책의 연구와 기록들이 그렇게 함께하는 일, 진정으로 ‘넘나드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라며 3장을 읽었다. 본격적인 사당동 이야기, 무수히 많은 각가지 사연들을...
주거, 생계, 일상, 질병, 이별, 죽음... 처절하면서도 햇빛처럼 눈부시고, 먹구름처럼 몰려오는 불행 속에 발악하듯 탈출을 꿈꾸는 모든 철거민지역의 살림살이 모습이 나온다. 그냥 생명이 버티는 모습이다. 하나님이 함께 한다고 가장 인정하기 싫으면서도 가장 필요로 하는 상황이 계속 이어진다.
소설이 더 진할까 르포가 더 진할까? 적어도 달동네에서는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것이 삶이다. 아무도 소설을 그렇게 쓰고 싶어하지 않는다. 슬프고 슬프고 또 슬프고, 라거나 무겁고 무겁고 또 무겁고... 그런 소설을 쓰는 작가는 밥 굶어 죽기 때문에 안 쓴다. 이곳 사당동의 삶의 진짜 기록은 그렇게 쓸 수밖에 없다. 그만큼 깊고 갖가지 사연들이 지독하고 지겹고 지루하게 펼쳐진다. 날마다.
(이 책 3장 사당동 사람들, 인생의 조건에서 나온 사례들의 소제목만 보아도 삶이 엿보인다.)
o 해방촌 손녀 : “맨날 똑같아요” (149쪽)
oo 건설십장 – 파출부부부: 끝내 이혼 (155쪽)
ooo 시계노점상 아줌마집 : “아이들이 딱 정상에 올라서면” (160쪽)
oooo 묵장사 아줌마집 : 여성가구주와 딸들 (163쪽)
ooooo 일용잡부 – 과자 리어카상:“싸움도 가난 때문” (165쪽)
oooooo 미장원집: “아들 유학 보냈어요” (1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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