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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으로 읽는 ‘죽음과 종교‘ (5) - 제1부5장, ‘죽음의 현장에서’>

희망으로 2014. 10. 12. 20:35

<묵상으로 읽는 죽음과 종교‘ (5) - 15, ‘죽음의 현장에서’>

 

5장에서는 죽음에 대한 반응의 단계들을 여섯 가지로 설명한다.

부인’ ‘분노’ ‘타협’ ‘우울그리고 중요한 용납마지막으로 기대와 희망을 말합니다.

 

 

내가 그런 상황이 되면 몇 단계부터 시작할까? 아마도 첫 단계부터일거다. 많은 이들처럼...

 

암센터에 있으면서 이 글과 비슷한 내용을 보았다. , 그것도 심한 말기를 선고받고 살 수 있는 날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았을 때 많은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의 단계라고 했다. 아주 특별한 종교적 수련을 한 사람이나 특별한 낙천적 성품을 가진 사람은 가끔 몇 단계를 통과하고 넘어서 그 다음 단계로 바로 들어가는 놀라운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고 했다. 더 놀라운 것은 앞 서너 단계에 오래 머물지 않는 사람들이 투병에 성공하고 생활로 복귀하는 통계가 높다고 했다.

 

자신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지 않은 다음에야 죽음이 가깝다는 선고를 받으면 어떻게 부인분노의 단계를 건너갈 수 있을까? 어떤 분은 무려 4단계를 건너 5단계 째인 용납부터 들어가기도 한다니 정말 놀랄 일이 맞다. 진심으로 부럽기도 하고. 많은 이들은 앞 4단계를 통과하지도 못하고 주저앉아 그대로 죽음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에누리 없이 자신을 돌아보니 나도 그 무리에 들어갈 것 같아 착잡하기도 하다.

 

죽음에 대한 타협의 단계는 이전에 맞이한 부인이나 고립의 단계와는 달리 우리 삶의 마지막 과정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단계입니다.’ - (75p)

 

그러면서 이때부터 사람들은 소원이 단순해진다고 말한다. 이전까지의 소원들은 더 이상 중요하지도 않고 삶이 연장될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다. 또 화해와 용서의 걸음도 내딛을 수 있다고 한다. 아마도 이 단계의 특성이 이 책이 말하자고 하는 삶을 위한 죽음에 대한 생각의 핵심 포인트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5단계는 일방통행일까? 앞으로만 가는? 사실은 반복 되는 경우가 많다.

 

앞의 3번째 단계인 타협에서 긍정적인 가능성이 열리지만 4번째 단계에서는 우울과 체념의 단계가 닥친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숙한 사람은 곧 바로 5번째 단계인 용납으로 넘어 간다고 책에서는 말한다.

 

과연 그럴까? 마치 3번째도 못가거나 간신히 타협의 단계를 지났는데 우울에 걸려서 허우적거리다가 용납에 이르지 못하면 미성숙한 사람이 되고 마는 논리다. 그리고 이 땅의 교회는 특히나 처음부터 5단계에 오거나 5단계에서 머물 것을 쉼 없이 요구하고 무정하도록 압박을 한다. 교인들이 얼마나 많이 자살을 하는지 통계를 보면 동의를 할 것이다.

 

그럼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아예 5단계나 6단계인 기대와 희망은 꿈도 꾸지 않을까? 사실 죽음이라는 대상이 주는 무게와 공포가 초기에는 신앙인 비신앙인을 별로 가리지 않고 무차별 짓누른다는 게 어찌 보면 더 솔직한 평가일거다. 갈수록 구분이 되고 큰 힘이 되는 것은 사람이 가진 본성보다 하나님이 숱하게 주신 말씀이 가진 힘 덕분이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지금도 살아계시는하나님이라는 고백이 나오는 이유다.

 

자연적인 상태에서는 동시에 여러 단계가 나타나기도 하고, 다시 되돌아가서 반복하기가 일쑤다. 그건 죽음이 예고되고 고통과 시련이 동반되어 오래 끌면서 천천히 오는 경우에는 더더욱 그러하다. 전쟁터나 사고로 인한 순식간의 죽음이라면 그런 단계가 별로 필요도 없고 나타나기도 힘들다. 그저 체념 하나면 신앙인이거나 비신앙이거나 상관없이 죽음을 맞이할테니.

 

 

죽음의 당사자는 죽음 자체보다 죽음의 과정이 더 힘들다.

 

이 책을 보는 많은 분들이 5장에서 소개한 김준곤목사의 <영원한 첫 사랑과 생명언어>의 내용, 딸 신희의 죽음과정을 감동으로 이야기 한다. ‘용납단계와 기대와 희망단계에 가장 어울리는 사례로. 나도 공감한다. 그 죽어가면서도 저주와 원망, 분노로 일관하지 않은 인내와 바람을 유지했다는 성공적 순종을.

 

하지만 동시에 그 내용속의 한 부분이 더 오래, 무겁게 남았다. 어쩌면 죽음이 멀리 있을 때와 정작 죽음이 지나간 후에는 그에 비하면 누워서 떡먹기, 땅에 손 집고 헤엄치기와 같다고 하면 지나칠까?

 

‘(생략) ... 신희의 최대의 공포는 참을 수 없는 극한 고통이었다. 신희가 고통을 참는 것을 보면 이마에 식은땀이 배고 두 발과 두 손목을 비틀고 온 몸을 비틀며 주님을 부른다.’ -(83p)

 

나는 다시 자신의 속을 들여다본다. 나는 그 고통의 과정을 견디고 수용할 수 있을까? 이것은 죽음이라는 대상과는 또 다른 고민의 대상임을 느낀다. 예를 들어 그냥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다면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죽는 길을 열 번도 선택할 수 있다. 반대로 고통 고문을 견디면서 하나님을 인정하라면 자신이 없다. 부인하고 고통을 피하고 싶을 것이다.

 

하나님 대신 그 자리에 죽음을 넣어도 같은 느낌이다. 언제라도 불의와 죄악으로 사는 길보다 깨끗하게 올바른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 고통 없이 죽음을 건너가게만 해준다면. 하지만 긴 고통이 동반된다면? 차라리 불의하게라도 사는 길을 갈 것 같다. 당신은? 여러분은?

 

 

죽음의 공포는 죽음을 미화해서 벗어날 수 있는 게 아니고, 삶에서 고통을 줄이고 이겨내는 구체적 몸부림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그래서 죽음은 여유 있게 옳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때(흔히 절박하지 않은 사람들이 고통중의 사람에게 당당하게 권하는 모진 경우처럼), 고통의 과정과 기간을 슬쩍 두리뭉실 포함하면서 결론 내리는 고상한 죽음의 치장은 허무하게 느껴진다. 다시 김준곤목사의 글로 돌아가보자.

 

과거는 회한과 슬픔뿐이고 미래는 안개처럼 불확실하고 불안하다. (중략) 한 해 한 해를 사는 것이 아니다. 하루하루도 아니다. 한 발짝 한 호흡 주님 사랑하며 창세기 첫날처럼 날마다 영원한 첫 사랑을 살자.’ - (85p)

 

죽음이 중심이 아니고 삶이 중심이다. 생명을 걸고 살아야하는 신앙인의 삶을 말이다. 죽음을 아름답게 정의 내리기만 하면 과거와 미래가 신나고 룰루랄라 살아진다고 하지 않는다. 한 해도 길고 하루조차 길어서 한 발짝씩 한 호흡씩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진짜 삶을 위한 죽음을 극복하는 시작이 될 것이다.

 

같은 의미에서 이영호 연세대교수의 편지는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고 삶을 말한 것이었다. 어떻게 더 소중하게 아름답게 삶(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아니고)을 보낼 것인가를 권하는 내용.

 

 

신자인 우리는 모두 병동 아닌 무형의 병동에서 죽음을 느끼는 서로를 돌보는 무명의 호스피스들이 아닐까?

 

‘(생략) 우리 다 똑같은 길을 가고 있어요. 그분도 형제님들 앞에서 가셨다 이렇게 생각해요. 저도 또 가야 해요.’) - (90p)

 

돌보던 행려병자의 죽음 앞에서 메리 수녀가 한 말이다. 죽음을 그들에게 안겨준 이야기가 아니고 마지막을 평안과 고통을 줄이는 삶의 이야기다. 다음 부분에 콕 집어서 설명을 한다.

 

호스피스 사역자들은 말기 환자에게 두 가지를 약속합니다. 첫째, 호스피스는 고통을 경감시켜줄 것을 약속합니다. (중략) 적지 않은 경우에 말기환자들이 진실로 두려워 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죽음에 수반되는 고통입니다. 둘째, 호스피스는 인생의 마지막 고독의 순간에 함께 있어줄 것을 약속합니다.) - (95p, 96p)

 

어쩌면 이 책이 말하자고 하는 삶을 위한 죽음에 대한 생각의 핵심이 아닐까 싶다. 말기환자가 아닌 보통 사람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바로 고통이라는 상상이고, 살아서도 겪는 고통은 죽음과 비슷한 것일 수 있다. 그 죽는 것 같은 삶에 필요한 것은 고통의 경감, 함께 있어주는 것!

 

(저자는 5장의 끝에서 마치 연속극의 마지막처럼 또 문제를 던진다. 사랑하되, 혹은 애통하되 결코 유한한 사람에게 하지 말라고 한다. 하나님 안에 머물지 않는 사랑은 사라지고 말며, 죽음을 통해서 경험하는 상실과 허무는 죽음너머의 영생과 부활이 아니면 해결이 안 된다고 못을 박는다. 지금의 삶과 지금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생명을 누려야 한다던 초점이 다시 수단이 되고 자칫 예고편이 되는 모순으로 돌아가는 것 같아 혼란스럽다. 하나님 안에 머무는 수준이 어디 쉬운 것이며, 그 자리에서 흔들리지 않고 가족이든 남이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쉽지 않다. 종교적 죽음교육과 현실적 공감의 거리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