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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다발성경화증환우회 소식지]- '가족, 그 아프면서 자라는 나무'

희망으로 2014. 11. 4. 07:39

한국다발성경화증환우회에서 2014년 소식지에 실을 글을 부탁해서 보내드렸었다.

소포로 소식지랑 아내가 먹을 비타민 선물이랑 택배로 보내오셨다.
다들 아프면서 무거움을 담고 살아가지만 서로 힘내는 모습을 담고 있었다.
세상에는 각자 모르는 사이로 태어나서 같은 길을 가게 되는 사람들이 있다.
부부가 그렇고, 이렇게 같은 병을 만나서 살아가는 환우회 동료들이 그렇다.
내 책을 소개해주셨다. 고맙게도, 여기 글을 올린다. 
기도를 부탁하는 심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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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그 아프면서 자라는 나무>


봄. - 천국과 지옥은 동시에 다가왔다.

2008년 5월, 그 해 봄은 유난히 찬란했고, 동시에 지독히 우울한 추락이 동시에 일어났다.

막내딸은 한 달 전 전국양궁대회 초등부(여자)에서 4개의 금메달 중 3개를 따고 개인전 단체전 우승을 했다. 나머지 하나도 동메달을 따서 학교와 가족들을 놀라게 했다. 그 아이의 12번째 생일이 5월 9일이었다. 어느 때보다 생일을 잘 치러주고 싶었다. 자랑스럽기도 하고 얼굴이 새까맣게 타도록 고생한 아이를 칭찬해주고 싶었다.

아이의 생일날 아침 심하게 통증을 느끼기 시작하더니 어디가 아픈지 도무지 모르고 온갖 병원들을 떠돌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넉 달, 거의 산 송장이 되도록 심각해져버린 아내는 한 대학병원에서 MRI를 찍고서야 ‘척수종양’이라는 벼락같은 진단을 받았다.

이후 몇 번이나 더 재발해서 응급실, 스테로이드 주사 처치, 퇴원, 그 반복을 하면서 내려진 최종 진단은 희귀난치병 ‘다발성경화증’이었다. 충주의 한 한방대학 과장이 제발 다발성경화증만 아니기를 빈다던 그 병이었다.

봄은 생명의 계절이다. 죽어보이던 식물들조차 새 싹을 밀어내며 소생하는 계절. 우리는 그 봄이 오기까지는 아주 평범하고 조용한 가족이었다. 하지만 아내의 발병이후 우리는 다시는 그렇게 호락호락 봄을 맞이하고 되는대로 편히 보낼 수 없게 되었다. 새로운 희망의 싹을 피우고, 생명이 죽지 않게 몸부림쳐야 했다. 가족이라는 나무를 살리기 위해.


여름. - 본격적인 이산가족으로 접어들다.

아내는 지독히 심한 편이었다. 발병한지 수 년 된 분들도 직장도 다니고 불편한 대로 살림도 살아내는 모습은 우리에겐 꿈같은 상태였다. 3번 5번, 그렇게 재발이 오면서 소변도 막히고 배변 신경도 마비되었다. 한 쪽 폐가 멈추어 숨도 못 쉬었다. 산소호흡기를 달고 중환자실을 들락거릴 때는 앞이 캄캄했었다.

처음으로 하늘을 원망하고 아내조차 원망스러웠다. 눈도 고장이 났다. 눈동자는 풀려서 흰자위에 둥둥 떠 있었다. 종이테이프로 한쪽 눈을 가려주지 않으면 아내는 어지러워 못 견뎠다. 사람 몸이 고장 나면 얼마나 무거운 짐 덩어리, 고통의 샘이 되는지 아내가 제대로 보여주었다.

사지마비로 대소변 일상생활을 몽땅 남에게 의존해야하는 아내 때문에 24시간 붙어있느라 직장도 접어야 했다. 그러니 수입도 없는 우리는 병원비를 감당 못해 집을 팔아치우고, 그리고도 블랙홀처럼 빨려 들어가는 빌린 돈은 갚을 길 없어 신용불량자가 되었다. 그것도 아내가 대신 짊어졌다.

계속해서 ‘설마...’ 하는 불길한 예상들은 여지없이 현실이 되어 우리가족에게 들이닥쳤다. 악몽도 세상에 그런 악몽이 있을까? ‘이건 안 오겠지?’ 하면 또 들이닥치는 시절이란 정말 한여름의 폭염과 같았다.

아이들은 뿔뿔이 흩어져 생존을 연명하다시피 지내야 했다. ‘어떻게 지내니?“라고 묻기가 무섭고 너무 미안해서 아예 말을 꺼낼 수 없었다. 한 달에 하루 병원으로 오면 그냥 밥 같이 먹고 좁은 보조침대나 병원 로비 의자에서 새우잠을 자고 보내곤 했다. 그러기를 몇 년, 혹독한 가뭄과 뙤약볕에 말라 죽어가는 가족처럼 살았던 길고 긴 여름이었다.

한 밤중에 전화를 걸어놓고도 서로 아무 말도 못하고 훌쩍이며 전화기만 붙들고 30분 1시간을 보낸 적도 있었고, 필요한 게 없냐고 물으면 아무 것도 필요 없으니 돌아오기만 해달라고 말해서 또 목이 메기도 했다. 그럼에도 여러 방법으로 먹고 잘 곳을 찾아 버티면서 제 자리를 지켜준 아이들, 탈선하지 않아준 세 아이들이 고맙고 고마웠다.

마땅히 그늘을 만들어주고 넉넉한 물과 영양을 공급해주어서 폭염의 계절을 넘기도록 해줘야 할 아내와 나는 좋은 부모가 될 길이 없었다. 그건 방목의 수준을 한참 넘어선 방치였다. 그렇게 우리 가족들은 뜨거운 살인적 계절을 용케도 이기며 지나가고 있었다. 목마를수록 뿌리를 더 깊이 내리고 수분을 줄기와 가지로 공급하는 나무들처럼, 우리 가족들도 그렇게 시련 속에서 뿌리를 깊이 내리며 생존능력을 키우며 자라고 있었다. 때로는 지독한 환경이 지독한 훈련이 되어 강해지기도 하나보다.


가을. - 열매는 밤과 낮, 비바람을 이겨야 여문다.

스무 곳이 넘는 병원을 유목민처럼 떠돌면서 재활치료와 항암주사로 관리하는 동안 완전 식물인간에 가까웠던 아내는 팔 다리에 조금씩 움직임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목도 가누지 못하던 사람이 베개를 고이지 않고도 버틸 수 있게 되고, 한 손으로 수저를 쥐고 밥을 스스로 먹을 정도가 되어 갔다.

여기는 특별히 감사해야할 분들이 있다. 행운으로 가능해진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온갖 부담을 안고도 아내를 받아준 국립암센터 김호진 선생님. 긴 햇수를 함께 공감하고 위로를 주시면서 치료에 임해주신 일은 아무리 여러 번 인사해도 부족하다. 그리고 친구처럼, 가족처럼 재활치료를 계속 웃으며 감당해준 여러 선생님들. 그 분들이 있었기에 하루하루는 절망적인 불변의 상태로만 보였지만 5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면서 거짓말 같이 할 수 있는 것들이 늘어 난 것이다.

그동안 아이들도 학업과 군 복무를 마치기도 하고, 정말 위태로운 어린 나이에서 혹 큰일이 생기더라도 살아낼 수 있을 만한 나이로 벗어나고 있었다. 가을이 오기 시작한 것이다. 나무들이 당연히 열매를 맺기 시작하고 여물게 하는 계절처럼 우리 가족이라는 나무도 열매가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길고 혹독한 여름을 견딘 대가로...


겨울. - 다시 봄을 볼 수 있을까?

언제인가 TV를 보는데 이런 말이 나왔다. 암을 진단 받았을 때 공통적으로 하는 말을 조사했더니 두 가지가 가장 많았단다. 하나는 “왜 하필 나에게...”이고, 또 하나는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하는 말. 돌아보니 나도 여지없이 그 두 가지를 자주 중얼거렸다.

왜 안 그럴까? 지금도 심하게 투병 중인 환자나 가족들 입에서 수시로 흘러나오는 말이다. 좀 덜한 사람부터 아내처럼 아주 심한 사람까지 가리지 않고 밀려오는 분노와 슬픔이 있다. 이 병은 끝이 없고, 그 끝을 향하여 내리막길만 간다는 사실이 그렇다.

알면서 가는 동토의 길. 누가 함부로 훗날 꿈을 말하고 희망, 극복을 쉽게 권할 수 있을까? 그래서 늘 발아래 살얼음판을 밟으면서 산다. 혹 금이 가고 혹 깨어져 빠지지 않을까 염려하는 마음으로, 동시에 수시로 불어오는 한파와 얼굴을 세차게 때리는 눈보라도 견뎌야 한다. 긴 밤의 외로움은 또 어쩌나.

그래도 고마운 것은 이 긴 겨울밤 같은 투병 간병의 삶에 많은 사람들이 들어주고 함께 힘을 보태주었다는 것이다. 같은 병을 가진 동료들과 환우회의 간사님들, 여러 단체들의 후원 등. 그 모든 분들의 노고와 배려가 마치 미리 온 봄날의 희망 같았다.

따지고 보면 모든 사람은 지위의 높고 낮음, 재물의 많고 적음, 건강의 정도를 불문하고 모두 마지막을 향해 간다. 누구 단 한사람도 예외가 없고, 누구도 어떤 명분으로도 피하지 못한다. 가족들은 기억해 줄 것이다. 얼마나 열심히 살아냈는지, 원치 않았지만 닥친 불행에도 불구하고 화만 내지 않고 의젓하게 사랑의 마음으로 가족들이 서로 노력한 것을, 그래서 혹 다음에 또 올지 모를 어떤 어려움도 겁내지 않고 힘내서 이겨내는 바탕이 될 것이다.


하여 나는 7년간의 간병생활을 일기로 썼고, 그것을 <그러니 그대 쓰러지지 말아> 라는 책으로 묶어 아내와 아이들에게 주었다. 우리 가족에게 닥쳤던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을 어떻게 견디고 살아냈는지를 잊지 말자고. 그 속에 고마웠던 분들과 기뻤던 날들도 함께 인정하자고.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