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으로 읽는 ‘죽음과 종교‘ (3) - 제1부3장 -‘죽음에 대한 관찰’>
이 3장에서 저자는 죽음에 대한 몇 가지 사실을 표현한다. 지극히 당연하고 상식적인 생각들이다.
‘죽음은 보편적입니다‘
‘죽음은 필연적입니다’
‘죽음은 자연스런 과정입니다’
‘죽음은 예측치 못한 때에 옵니다’
‘죽음의 과정은 점진적입니다’
‘죽음은 개별적으로 찾아 옵니다’
‘죽어가는 과정은 전인적입니다’
‘죽음은 삶의 한 부분입니다’
‘죽음은 인생의 마지막 출구를 걸어가는 과정입니다’
거의 이 작은 제목들만 읽어도 이해가 되고 더 무슨 설명을 보탤 필요가 없을 만큼 나열이 되어있다. 정말 죽음에 대한 관찰이다. 그러면 이해가 되었으니 죽음이 두렵지 않고 받아들일 준비가 된 것일까?
죽음은 인정하고 준비하면 두렵지 않아질까?
‘우리는 죽음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사실 죽지 않을 사람이 죽은 것이 아닙니다. 어차피 죽을 사람이 조금 일찍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우리의 죽음에 대해서 준비해야합니다.’ - (36p)
그럼에도 인정과 준비가 쉽지 않고 충격과 슬픔을 떨치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저자도 죽음에 대해 준비하고 인정하자면서 한편으론 또 쉽지 않다고 말한다.
‘죽음은 개별적으로 찾아오기에 우리를 고독하게 만듭니다. 죽음은 우리 주변의 가족들조차 남남으로 만듭니다. 죽음 앞에서 우리는 철저히 고독한 존재가 됩니다.’ (39p)
철저히 고독한 존재는 후천적으로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누구는 오고 누구는 안 오는 것도 아니다. 안다고 해소되고 모르는 사람만 겪는 대상도 아니다. 이해를 하면 조금은 평안해지기는 하겠지만 원천적으로 벗어나거나 이겨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철저한‘ 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며 ’고독‘이라는 상태로 단정하지 않을 것이다.
저자는 그러면서 죽음은 삶을 완성하고 마무리하는 동기이자 결과라고 말한다. 영화 <새도우랜드>의 이야기를 예로 들면서,
‘결국 죽음은 삶의 한 부분이며 삶을 마무리하며 완성하는 부분입니다. 죽음이 없이 우리는 삶만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조이와 잭의 표현대로 ’우리는 둘 중 하나만 가질 수는 없습니다.‘ - (46p)
죽음은 다음 골목을 돌아서야 아는 것, 지금 삶도 뜻대로 안 되는데...
나는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그 쉽지 않은 죽음의 준비를 이렇게 생각한다. 우리의 조절능력 밖이기에 내버려 두어야한다고. 그것은 같은 영화의 다른 대사에서 느낀 것이다. 여행 중에 소나기를 만나 오두막에 피한 루이스의 말이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새로운 것을 원하지 않아. 그냥 이대로가 좋아. 다음 골목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지도 않아.’ - (45p)
다음 골목에 해당하는 죽음을 알아서도 아니고, 이겨낼 수 있어서도 아니고, 알 필요조차 없다는 태도. 그것은 지금의 삶으로 얻은 깨달음이고 결심이다. 결국 철저히 고독한 사람의 죽음이 제대로 준비하는 길은, 철저히 지금의 삶에 충실하고 행복해질 때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삶은 결코 잘 죽기 위해 사는 전초전이 아니다. 죽음과 상관없이 귀하고 행복을 누려야 할 주연이 아닐까 싶다.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고 동시에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시며 선언한 내용들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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